미즈키님의 블로그에서 “잠깐”이란 글을 읽으며, 이런 저런 주변 사람들의 상황이 떠올랐다. 몇 주 전엔 ps네 갔었다. 결혼한 지 2년도 안 되었는데, ps의 파트너는 거의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었다. 하긴, 그 전에도 루인이 갔을 때만 뭔가를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땐 집안일을 하는 척이라도 했는데, 이젠 이런 흉내도 안 낸다는 걸 느꼈다. 아는 누군가는 자기 “남자” 동생이 결혼 전에는 아무 것도 안 해서 사이가 꽤나 나빴는데, 결혼하고 나니 변하더라고 했다. 개개인의 차이일 수도 있고, “전시행정”일 수도 있고. 아무려나,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있잖아, 미즈키님의 글을 읽다가, 트랜스로서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어떤 걸까, 라는 질문 앞에, 아무 것도 안 떠오른다는 걸, 너무도 막막해서 “정전”이라도 된 건가 싶은 느낌이란 걸 깨달았다. 개개인들의 다양한 맥락에 따른 차이가 있지만, 한국사회에서 “이성애 여성”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의 이미지, 나이가 들어갈 때의 모습과 관련한 어떤 이미지는 그래도 있는 편인 것 같은데. 적어도 “내가 나이가 들면 대충 저렇게 변할 수도 있겠다”라는 어떤 이미지는 가질 수 있으니까. 그런데 트랜스는? 레즈비언 트랜스나 게이 트랜스는? 비정규직 레즈비언 트랜스는?
가끔, 다른 트랜스들과의 자리가 꽤나 불편하거나 우울해지는 경우가 있다. 먹고사는 문제와는 별개로, 호르몬이나 수술과 관련한 얘기를 나눌 때가 그렇다. 호르몬은 일찍 시작할수록 좋다고, 그래서 10대나 20대 초반이 좋고 그 이상으로 넘어가면 효과를 많이 못 볼 수도 있다고 얘기한다. 어떤 트랜스젠더는 루인에게, 언제 호르몬을 시작할 것이냐고 묻는다. “글쎄, 아직 고민 중이에요”라고 대충 얼버무리며 넘어가지만, 근데 언제 할까? 하기는 할까? 정말 안 하고 살아갈까? 나이 50에 병원에 찾아가서, 더 이상 못 견디겠다고 호르몬을 하겠다고 의사에게 말할까?
한국에서 성전환수술로 유명한 한 의사가 해준 얘기: 자식들은 모두 결혼했고, 아내와도 합의를 했다며, 성전환수술을 요구한 50대 mtf/트랜스여성이 있었다. 그 의사에게 아내와 같이 갔는데 아내도, 자기도 더 이상 힘들어하는 모습을 못 봐주겠다고, 수술을 바란다고 했단다. 그 mtf는 이미 정신과 진단을 받았고, 정신과 의사는 성전환수술을 허가했다. 그럼에도 그 의사는 수술을 거부했다.
트랜스젠더와 관련한 토론장에서 이 이야기를 하며, 그 의사는, 나이 50에 수술을 요구하며 찾아온 그 트랜스가 너무 징그러워서 도무지 못 하겠더라며, 수술을 거부했던 사실을 아주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이 일화가, [프랑켄슈타인]을 읽다가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에게 파트너를 만들어 준다는 약속을 했다가 끔찍하고 징그러워서 만들지 않기로 결심하는 장면과 겹쳐서, 빅터에게 상당한 분노를 품었었다. 그리고 이 일화는 다시 트랜스의 나이 듦과 겹친다.
지금 자주 만나는 트랜스들은 거의 모두 20대이고, 그중 상당수가 호르몬을 하고 있고, 몇몇은 수술도 했다. 루인처럼, 나중에 어떻게 할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로선 호르몬을 하지 않겠다고 얘기하는 이들은 없고. 건너서 아는 트랜스들 중 나이가 들었다고 여기는 이들은 모두 호르몬을 꽤나 오래 했거나 수술을 한 몸들이다. 하리수는 2001년에야 비로소 방송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얼마 전엔 “이성애”결혼도 했다. 호르몬을 한다면 어쩌면 평생 호르몬주사와 함께 살아가야 할지도 모르고, 30대 혹은 40대에 호르몬 투여를 시작한다는 게 어떤 건지, 현재로선 상상불가이다. 30대 후반엔가 호르몬을 시작해 수술을 모두 한 mtf/트랜스여성은 지금 카페를 운영 중에 있다. 그를 루인의 어떤 미래상으로 상상하기엔 맥락이 너무 다르다.
그리하여, 트랜스로서 나이가 든다는 것이 무엇인지, 상상이 안 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지금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트랜스들은 무얼 하건 “최초”라는 수식을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다. 아이가 있는 트랜스들이 호적상의 성별변경을 요구하는 것도, 호르몬이나 수술과 관련해서 의료보험을 요구하는 주장들도, 인권운동을 표방하며 발족한 성전환자인권연대 지렁이도 모두 “최초”라는 수식을 짊어지고 있다. 이 말은 “기념비적인 사건”일 수는 있지만, 그런 만큼이나 매 순간의 일들에 있어 “역할 모델”이 없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역할모델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뭔가 막막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1950년대 1960년대 신문에 났던 그 많은 “남장여자/여장남자/트랜스젠더”들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현재 들리는 나이든 mtf들의 삶은, 카페 운영이나 결혼한 삶이 전부인데, 이와는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은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우울하기보다는 막막하고, 막막하기 보다는 먹먹하고, 먹먹하기보다는 우울하다. 그저 계속 공부를 하고 싶다란 말 말고, 막연하나마 다른 어떤 상상이 가능할는지. 트랜스에게 나이가 든다는 건 어떤 걸까.
주소바꾸었습니다^^
natal.egloos.com
예, 알려 줘서 고마워요! 🙂
인생이 막막하다는 건, 빛이 없는 깜깜한 동굴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인 거 같아요.
깜깜하지만 동굴 벽이라도 더듬으며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할 것인가, 혹은 그냥 멈추어 있을 것인가…기타 등등.
느릿느릿 소심하게 동굴벽을 더듬다 보면, 어쩌면 저처럼 깜깜한 동굴에서 헤매고 있는 또 다른 이의 손을 꼭 잡고 같이 앞으로 나갈 수 있을 것도 같아요.
쓰다보니 얘기가 산으로 가네요.
막막하지만, 그래도 혼자는 아니니까요, 붙잡을 다른 이의 손이 있으니까요. 혼자는 아니란 깨달음이, 계속할 수 있는 힘인 거 같아요. 🙂
사람을 도우라고 있는 의사가 돕지 않은 걸 자랑스러워하다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고 화부터 나네요. <프랑켄슈타인>을 읽으면 답답하고 슬픈 게 조금만 온정을 갖고 인간으로서 대했으면 비극을 면했을 수도 있을 것만 같은데, 인간은 어쩜 그렇게 자기랑 조금만 다르면 같은 인간으로 못 보는지…역시 답답하네요.
근데 그 의사가, 자기 입으로 자신을 “트랜스젠더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지요. 그 사람 병원에 가면 이 말을 인쇄해서 붙여 놓기까지 했대요. -_-;;
저도 비슷한 생각을 종종해요. 나이듦에 대해 예상을 하는 것은 나보다 먼저 생을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 생과 대응시키는 경우가 많은데, 내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없거나, 심지어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조차 적을때는 정말 막막먹먹우울함을 느껴요.
나이라는 차별말고, 나이 들어가는 방식에도 정치적인 논쟁점이 있다고 새삼 느끼고 있어요. 많은 글들이 막연하게 나이듦을 얘기하지만, 누구의 나이듦이냐에 따라 너무 다른 상황일 수도 있으니까요.
근데 왜 문득, 이 상황에서, “평범하게 사는 것도 쉬운 게 아냐”란 말이 떠올랐을까요. -_-;;;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