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ber Ault, “Hegemonic Discourse in an Oppositional Community: Lesbian Feminist Stigmatization of Bisexual Women”
Christopher James, “Denying Complexity: The Dismissal and Appropriation of Bisexuality in Queer, Lesbian, and Gay Theory”
in Brett Beemyn and Mickey Eliason eds. Queer Studies: A Lesbian, Gay, Bisexual, and Transgender Anthology, New York and London: New York University Press, 1996
지난주에, Queer Studies에 실린 논문 중, 몇 편을 골라서 읽었는데, 그 중 세 편은 양성애/바이섹슈얼과 관련한 글이었다. 양성애와 관련해서 읽은 글이라면, 아마 작년에 읽은 퀴어이론과 관련한 개론서에서 언급한 부분이 전부일 듯. Queer Studies와 작년에 읽은 책의 출간 시기가 얼추 비슷해서인지, 핵심 주장은 크게 많이 다르진 않다. 다만, Queer Studies에 실린 논문들이 좀더 구체적이고 세세하게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좀 더 좋았달까. 세 편의 논문을 좋았던 순서로 꼽으라면, Goldman-James-Ault 다.
Goldman의 논문은 제목이 좀 헷갈렸는데, 첨엔 저 제목을 “누가 퀴어를 퀴어로 만드는가(누가 퀴어를 퀴어화하는가)”로 해석했달까. 기본적인 영어문법도 무시하는 이런 해석에 찬사를-_-;;; 두 개의 퀴어(queer) 중에서 앞의 퀴어가 주어고 뒤에 나오는 퀴어가 동사라면 후자에 s/es가 붙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다는 건, 주어-동사 관계가 아니란 의미이다. 그런데도 주어-동사로 해석했으니, 이 무식함을 어쩔 거야. ㅠ_ㅠ 그러니 다시 해석하면, “그토록 퀴어한 퀴어는 누구인가?” 정도랄까. 앞의 퀴어는 뒤에 오는 퀴어의 수식어인 셈.
아무튼 세 편의 논문을 무식하게 요약하면, 양성애는 박쥐처럼 “남성”과 “여성”을 모두 좋아하는 존재라기보다는, 오직 한 젠더만을 좋아해야 한다는 인식에 대한 문제제기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 양성애는 레즈비언이나 게이로 가는 일종의 중간 단계가 아니란 것. 그러며 섹슈얼리티와 관련한 논의에서 레즈비언이나 게이만 언급할 것이 아니라 양성애 역시 언급하고 감안할 것을 의미한다.
일테면, 영화 [영원한 여름]을 해석하며, 루인은 게이만 언급했는데, 사실, 이 영화 속 주인공들의 관계를 게이-이성애-이성애로만 해석해야 할 이유는 없다. 게이-바이-이성애로 해석할 수도 있고, 바이-바이-바이로 해석할 수도 있고, 게이-바이-패그해그로 해석할 수도 있고. 소위 “같은 젠더”라고 여겨지는 이들의 관계를 반드시 “동성애”로 해석할 이유가 없으며, 이성애-동성애란 식의 구분과 해석은, 이분법을 강화하는 방식일 수 있음을 지적한다.
Goldman이 좀 더 매력적이었던 건, 퀴어관계에 인종이나 계급을 교차해서 분석하면 의미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음을 얘기하기 때문이다. 1993년 MTV 공연에서, 마돈나는 “This is Not a Love Song”을 부르면서, 자신을 포함한 세 명의 부치역할의 여성과 다른 세 명의 펨 역할의 여성이 무대에 등장한다. 이 공연을 분석하며, Goldman은 읽기에 따라선 퀴어공연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여기에 인종이 개입되면 얘기가 전혀 달라진다고 말한다. 즉, 부치역할의 세 명은, 마돈나, 백인여성, 아프리칸-아메리칸 여성인 반면, 펨역할의 세 명은 아시안-아메리칸 여성들이란 것. 이는 아시아여성은 “수동적이고, 이국적이며, 더욱더 여성적인 타자”라는 걸 강화하는 방식임을 지적한다.
젠더, 섹슈얼리티 외에도 인종이나 계급 등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말하기는 쉽지만 실제 이렇게 분석하거나 고민하는 글은 그렇게까지 많지 않다는 점에서, 이 글은 특히나 매력적이다.
오호.. 좀 더 이야기해주오. 잼나는데. (군침삼키는 소리../쩝쩝..)
헤헤. 예, 그럴게요. 당장은 아니고, 며칠 안으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