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후유증이라니

오늘도 아침 라디오 시선집중에서 국민의힘 최고위원이 나와서 탄핵 후유증 운운하는 말을 듣고 화가 났다. 탄핵 후유증은 잘못된 정치 행위로 인해 촛불집회를 하고 조기 대선을 치뤄야 하는 국민의 차원에서 할 수는 있는 말이다. 그런데 국정농단의 공모자이거나 동조자인 국민의힘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피해자 비난에 해당하는 말이고 내란에 동조하는 우리를 이해해달라는 소리에 불과하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탄핵 후유증은 국정농단과 내란에 국회의원과 정치인의 직업 윤리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대응하지 못 하고 국정농단과 내란에 동조하면서 발생한 여파지, 그것이 왜 탄핵을 해서 생긴 여파냐.

어휴… 할 일 많은데 너무도 화가 나네.

어지러운 날

그냥 잡담처럼 쓰면… 아니, 정치와 관련한 글을 내가 쓰면 자칫 술자리 정치 잡담 같을까봐 두려워 가급적 정치를 직접 언급하는 글을 안 쓰지만, 지금 안 쓸 수 없는 상황이라 개인 기록 수준에서 글을 남기면…

처음엔 아이돌 관련 어떤 글을 쓰려고 메모를 하고 있었다. 그러며 화요일 밤에 유튜브 라이브 방송을 보다가 거의 실시간으로 12.3 친위쿠데타/내란 소식을 들었다. 비상계엄이라니 이 무슨 소리냐. 너무 충격적이었고 분노가 일어 곧장 국회 앞으로 갈까를 고민하기도 했다. 그때 나의 주요 대응은 두 가지였는데 시사인 유튜브 실시간 방송을 켜는 것이 하나였고(정보를 정확하게 듣는 것) 다른 하나는 담당 수업의 지속 여부가 불확실하니 이에 대한 공지문을 어떻게 쓸까였다. 비상계엄 상황에서 오프라인 수업이 가능할지 확신이 없어 일단 공지문 초안을 쓰기도 했다. 물론 155분 정도만에 국회는 비상계엄을 해제했고 공지문은 삭제했다.

155분은 여러 고민이 드는 장면이었는데 한국이 삼권분립 국가라는 것의 의미가 정확하게 무엇인지를 확인시킨 장면이었다. 많은 국회의원이 국회를 지키기 위해 담을 넘어서라도 국회 본회의장에 도착했고 그리하여 계엄을 해제했다. 물론 모든 국회의원이 담을 넘어서라도 국회에 간 것은 아닌데, 누군가는 월담하기보다 브이로그를 찍었고(이준석에게 월담하라고 제안하니 ‘시끄러워 임마’라고 답한 장면은 이준석의 본질이다) 누군가는 국회로 가기보다 당사로 갔다. 물론 부득이하게 국회에 갈 수 없는 이들도 있었다. 국회의원의 정치적 책임과 임무가 무엇이며 또 국회의원을 혹은 정치인을 싸잡아 비난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었다.

계엄포고령은 현 정부의 적이 누구인지 명확히 했다. 정치를 혐오하며 대통령이 된 윤석열 내란수괴는 정치, 언론, 출판, 노동자 파업, 의료 등 한국 사회의 근간을 이룰 거의 모든 것을 혐오하고 적으로 삼고 있었다. 이런 인간이 대통령 자리에 계속 있는 것은 가당한 일인가. 무엇보다 정치를 혐오하는 정치인이 왜 대통령을 하고 있는가. 정치 혐오는 정치를 불가능하게 할 뿐이라는 것을 왜 대통령 자리에 있는 인간을 통해서 확인해야 하는가.

어제(2024.12.07.)는 오후부터 밤까지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 있었다. 알만한 사람이 없는 곳에 자리를 잡았는데 날은 추웠지만 자리에 앉아 있는 동안은 기묘하게도 춥지 않았다. 많은 이들의 발언도 들었는데 페미당당의 심미섭님 발언은 정말 좋았다. 공식 발언으로 말씀해주셔서 감사하기도 했다. 이런 마음이 모여있어, 그 자리에 있는 동안은 따뜻하게 느꼈는지도 모른다. 국민의힘이 내란범에 동조하며 탄핵 표결에 불참하고, 결국 부결이 사실상 확정되어 자리를 떴을 때 그때야 비로소 너무 추웠다. 온 몸이 떨렸는데 이게 탄핵 부결에 따른 분노인지 그저 추워서인지는 분간하기 어려웠다. 늦은 저녁을 먹고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집 근처 지하철역에 정차했을 때, 누군가가 “윤 석 열 을 탄 핵 하 라”라고 크게 외쳤고 그의 일행은 웃고 있었다. 지하철에 타고 있는 이들 상당수도 키득거렸다. 그들 상당수가 국회 앞에 있다가 돌아가는 길이었겠지. 그러고보니 오전에 다이소에 가서 3단 방석을 구매했는데 두 팀이 그 방석 어디에 있었냐고 물어서 어쩐지 든든했다.

하지만 통신3사는 정말 화가났다. 사람이 상당히 모이면 늘상 원활한 통신을 위해 중계차량을 설치했는데 어제는 그런 거 없었다. 여의도에 있는 내내 데이터가 안 터져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음모론이 절로 떠오를 수준이었다.

그나저나 국힘은 탄핵후유증 어쩌고 저쩌고 하고, 그러자 오늘 아침 김종배의 시선집중에서 한 청취자는 국민도 계엄후유증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건 사실이다. 나는 지난 화요일 이후 일찍 잠드는 게 좀 무섭다. 밤 10시가 넘어서면 불안해서 라이브방송을 켜기도 하고 괜히 포털사이트 뉴스 화면을 새로고침한다.

+첨언으로… 고지식할 정도로 전통적인 뉴스보도 윤리를 고집하려고 하는 태도는 어떻게 지금과 같은 시국에서 얼마나 소중한지를 다시금 느끼게 한다. 어느 방송은 이준석에서 면죄부를 주려고 하는 동안, 시선집중은 당시 현장에 있었던 이들의 입장을 듣고, 화요일밤 수원에서 국회로 내달린 청취자와 인터뷰를 했고, 5.18광주민주화항쟁 관계자와 계엄과 관련한 인터뷰를 했다. 이후에도 비슷하다. 언론의 태도와 윤리가 무엇인지를 다시 고민한다. 참고로 이준석에게 면죄부를 준 방송은 변희수와 관련한 의제를 안 다뤘고, 윤여정이 수상소감으로 퀴어를 언급할 때 그 부분만 빼고 인용했었다.

조용필 콘서트

지난 주말 바쁜 와중에도 유희라고, 조용필 콘서트에 다녀왔다. 오랜 만에 가는 콘서트인데다 올해 20집을 낸 뒤 첫 번째 콘서트여서 어쩐지 가야할 거 같았다. 뭐랄까, 나이가 많은 가수의 콘서트는 올해가 마지막이면 어쩌나 싶을 때가 있어, 가지 않을 때도 어떤 망설임과 고민이 있다.

첫 곡을 듣는 순간부터 나는 이번 콘서트에 어떤 편견이 있었고 그것이 와장창 깨지는 것을 느꼈다. 이번 20집이 마지막 앨범이고 이후로는 앨범을 내지 않겠다고, 싱글이나 EP만 내겠다고 했다. 신보 발표 기자회견에서는 기자가 정중하게 창법이 바뀌었다고 물었는데 조용필은 자신도 나이가 들어서 예전과 같은 창법일 수 없다고 답했다. 조용필은 나이가 들어서,라고 답했고 나는 고음이나 락 스타일의 곡을 이제는 부르기에는 목에 부담이 간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최근 앨범의 스타일처럼 좀 더 차분한(?) 노래를 선곡하지 않을까 했다. 하지만 시작부터 연달아 부른 5곡 모두 락이었다. H와 같이 갔는데, H는 만날 조용필은 트로트 가수 아니냐고 놀렸는데 첫 곡의 시작을 듣자마자 바로 사과했다. 자기가 크게 오해했다고. 거의 30곡 정도를 부르는 동안 대부분의 선곡이 락이었고, 그날은 앰프 예열이 잘 되었는지 전날과 달리 세팅이 바뀌었는지 정말 콘서트장 전체가 진동하도록 시원하고 웅장했다. 의자와 바닥이 진동했다.

일단, 조용필 콘서트를 보면 깨닫는 것. 콘서트는 무대의 예술이고 그래서 조용필은 무빙 스테이지(진짜 무대가 증식하고 움직인다)를 쓰거나 스크린을 다양하게 활용해왔다. 그리고 이번 공연에서는 빛의 예술로 만들었다. 콘서트의 가장 기본이 음향이라면(노래와 연주 실력은 그냥 당연하니까) 음향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그 다음 무대에서 할 수 있는 작업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에서 이번 공연은 빛의 예술이라는 답을 가지고 왔다. 빛으로 폭우를 만들었고 빛으로 스크린을 만들었다.

가장 충격적인 거. ‘그래도 돼’를 라이브로 들으면서 깨달았는데, 그냥 이어폰으로 듣는 것보다 훨씬 더 부르기 어려운 노래였다. 그리고 창법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기자의 질문은, 나이듦에 대한 질문이 아니었다. H는 라이브를 들으며 음원을 들었을 때 느껴지는 어떤 촌스러움이나 뽕끼를 전혀 느낄 수 없고 엄청 세련되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원래 조용필은 콘서트 때마다 현재성을 갖도록 편곡을 하고,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면서도 새롭게 편곡을 한다고 말했기에 편곡의 차이라고 이해했다. 편곡의 차이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집에 돌아와서, 선곡 중 하나인 1980년에 나온 노래를 1990년대 중반에 부른 판본을 틀었는데, 창법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1990년대 부른 라이브에는 1980년 당시의 창법이 거의 그대로 있었다. 이번에는 그게 아예 없었다. 19집, 20집을 내면서 창법을 바꾸고 최근의 스타일로 바꾸면서 1980년대 곡 역시 최근의 창법으로 다시 부르고 있었다. 올해 74살, 데뷔한지 55년이 더 지난 가수도 여전히 현재성을 갖추기 위해 자신에게 익숙한 방식을 다 바꾸고 있구나.

이래저래 감동적이고 즐거운 자리였다. 그리고 하나. 모나리자를 부르가 갑자기 백발의 노년 여성으로 보이는 분이 자리에서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고 이후 계속 춤을 췄다. 앞서 트로트 스타일의 노래를 부를 때도 일어나지 않으셨는데 모나리자에서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하셨다. 왜 모나리자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