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개가 된 사나히(고연옥/구자혜)

일요일에 ‘벼개가 된 사나히’를 관람했다. 생각보다 사람이 적었는데, 이 공연만이 아니라 내란 사태라 공연계의 타격이 크다는 말을 들었다… 얼른 내란 우두머리와 동조자들 모두를 잡아들여야 하는데 뭐하나 싶네.

암튼 여성국극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공연 <벼개가 된 사나히>는, 어떤 의미에서 여성국극의 전통에 가장 충실했다. 여성국극과 관련한 논의가 나오던 초기에 읽었던 논의 중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기존의 전통과 규범, 통상적인 문법 등을 깨는 파격이 중요했다는 점이었다. 사회적, 기술적 변화가 있으면 그것을 적극 반영하며 여성국극을 계속해서 갱신했다는 논의는 여성국극을 누가 어떤 포인트에서 구성할 것인가에 따라 전혀 다른 형식과 입장으로 전개되겠구나 싶었다. 또한 사회적 고민과 질문을 어떤 식으로 여성국극에 담아내며 새로운 경로와 사회적 맥락에 닿을 것인가가 중요한 지점이었다. 정확하게 이런 맥락에서 나는 이번 작품이 여성국극의 자기갱신을 치열하게 고민한 작업이라고 느꼈다.

일단 추가 2회를 더 예매했다. 언제나 그렇듯 구자혜 연출의 작업은 두세 번은 더 관람하고 싶은 매력이 있고 이번에도 그렇다. 무엇보다 국극 배우들의 소리가 좋아서 그냥 감상하고 싶기도 하고.

감기

이번 감기… 독하다는데 진짜 독하네요… 계획했던 많은 일정이 어그러졌고 가고 싶은 집회도 못 갔지만… 암튼 간신히 살아났다. 그 와중에 이무기 팀의 공연 다녀온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는데 살짝 혼몽한 상태였음에도 매우 좋았다. 그나마 독감은 아니어서 다행인가…

그리고 요즘 상황에서 쓰고 싶은 글이 있지만, 먼저 메모만 남기면…

양비론은 가해자, 폭력범, 혹은 내란범에게 동조하는 일이지 공정한 행태가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양비론은 양쪽 입장을 공정하게 전달하는 행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정치적 지형을 뒤섞어 논쟁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일이다. 그게 한국 보수 혹은 극우 언론이 해온 일이고 이를 통해 민주당계 정치인을 악마로 만들어 진보 정책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민정당계 독재/내란 세력을 유능한 인물로 포장한 방식이기도 했다. 또한 이런 양비론이 트랜스젠더퀴어에게 작동한 차별과 억압을 논의 불가능하게 만드는 태도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양비론을 멈췄으면.

어휴… 불법퀴어이론입문 업데이트해야하는데… 올해는 해야지…

어떤 두려움

오프라인 행사에서는 가끔 말한 적이 있는데, 2000년대부터 트랜스젠더퀴어 운동에 참여하고 글을 쓰고 언어를 만들려고 애써왔던 한 명으로써, 2015년 이후 트랜스 혐오가 대중화되었던 시기에 충분히 제대로 개입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늘 강하게 남아 있다. 아무렇지 않을 때도 많지만 불현듯 그 죄책감이 밀려와서 다급해질 때가 있다.

2015년을 지칭하는 다양한 언어가 있어 누군가는 페미니즘 리부트로 부르고, 누군가는 페미니즘 대중화라고 부르고, 이 모든 명명이 가능하다는데 전적으로 동의하면서도 나는 그 이후 시기를 트랜스젠더퀴어 혐오의 대중화(혹은 트랜스 혐오의 대중화)라고 부르고 싶어 한다. 뭔가 제대로 정리한 적은 없지만 적어도 나의 체감은 그러한데 2015년 이후 페미니즘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슬프게도 트랜스 혐오가 논쟁거리로 등장했다. 트랜스젠더퀴어 혐오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여전히 특정 퀴어 범주와 관련한 혐오가 등장하지만 그 중 트랜스젠더퀴어 혐오가 가장 강한 힘을 갖고 생성된다. 누군가는 태만한 방식으로 트랜스 혐오를 재생산하고, 또 다른 이들은 그 말에 항의하고 반박하기 위해 어마하게 많은 글을 쓰고 있지만 그 글은 혐오를 생산하는 이들에게 닿지 못한다. 이것이 유난히 내게 두드러진다는 감각은 그 전 시기까지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트랜스젠더퀴어 혐오를 논하면 많은 사람이 이것을 서구의 옛날 사례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2015년 이후 이 논의는 지금 현재 한국의 논의가 되었고 지형은 훨씬 복잡해졌다. 아차하는 순간 이분법의 단순한 지형에서 적대만 생산하는데 동조하게 된다. 그래서 트랜스 혐오의 대중화라고 부르는 것은 혐오를 생산하는 특정 누군가를 분명하게 지칭하지 않으려는 고민이기도 하고, 트랜스 혐오가 대중화되는 상황에 동조하는 많은 행위를 질문하고 싶은 것이기도 하다. 책임을 면제하려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책임을 질문하고 싶은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두려운데, 내란과 대형 참사로 분노와 애도의 시기에 트랜스 혐오가 또 다시 힘을 받고 있을 때, 동료들이 연달아 세상을 떠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염려 때문이다. 동료를, 지인을 먼저 떠나보내는 경험은 무뎌지지 않고 오히려 타격감이 쌓여가기만 한다. 아무리 관계를 통해 위로를 받더라도 그 타격감은 누적된다. 그래서 슬픔은 오래가는 연대의 힘이 된다. 오래 침전한 상태로 지냈지만 그럼에도 올해는 좀 뭔가를 해야겠다. 두려움이 시위를 하는 힘이듯, 그 힘으로 뭔가를 좀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