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
어제 아침, 그러니까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는 너무도 충격적이라 뭐라고 말을 붙이기 어려웠다. 다른 일정이 있었지만 미뤘고, 해야 할 일이 많았지만 기사에서 신경을 끊기 어려었다. 속보에 노출되거나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따라가겠다기보다 고인과 유족의 충격을 괜히 내가 걱정하고 있어서였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또한 유족과 그 동료들에게 위로를 전합니다. 이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많은 지인에게도 마음을 전할 수 있기를…
ㄴ
죽음은 언제나 어려운데 죽음을 마주한 슬픔은 종종 분노와 닮아 있고 저항과 닮아 있으며 절망과 닮아 있어서다. 이런 대형 참사 소식을 들으면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가 떠오르고, 또 한국 사회의 오랜 기억일 여러 참사가 함께 떠오른다. 나만 이런 것은 아닐텐데,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참사는 아직 충분히, 제대로 애도되지도 않은 사건이며 현재 진행형의 감정을 계속 반복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참사는 필연적으로 사회적 사건인데 사회 제도나 시스템의 문제여서만이 아니라 그 사건이 사회 구성원의 감정에 끼친 영향이 시간을 두고 축적되고 반복되기 때문이다. 여러 색깔의 애도 리본을 달고 다니는 것은 그저 내가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거나 좀 더 윤리적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회적 사건이 사회적 사건으로 충분히 논의되지 않았거나,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함에도 그렇지 않아서다. 말하지 않아도 여전히 기억되고 논의되고 있는 사건이기를 바라기도 하고.
ㄷ
지난 11월 초는 한무지의 12주기였다. 이제는 많은 이들이 잊은, 한국 퀴어 운동에서도 트랜스젠더퀴어 운동에서도 거의 언급되지 않는 잊힌 인물 같다. 물론 한 지인과는 종종 한무지의 이야기를 하는데 그럴 때마다 올해는 무슨 추모 행사를 마련하자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별도의 행사를 마련하지도 않고 있으니 사적 맥락에서는 애도되고 있지만 공적 기록에는 새롭게 생성되지 않는 존재가 되어 가는 것일까. 11월마다 진행하는 TDOR에서 한무지 추도식을 함께 할 수 있을까? TDOR에 참가한 일이 많지는 않아, 누군가는 이미 한무지를 여러 번 추도했겠지만 그럼에도 뭔가, 늘, 몸의 무게가 덜어지지 않는다.
ㄹ
몇 달 전 H랑 이야기를 하다가, 실수로 올해의 트랜스젠더퀴어 학술상을 만들 뻔했다. 호기는 있었지만 안정적 기금을 마련하기 어려워 그냥 H와의 대화로 끝냈다. 학술상이지만 반드시 등재지 논문일 필요는 없는데 여기에는 트랜스젠더퀴어 연구를 고민의 중심에 둔 이들이 늘어나기도 했고 뭔가 역사를 좀 다른 식으로 기록하고 싶기도 했다. 한무지나 일찍 세상을 떠난 많은 이들을 애도하는 행사를 겸하며 삶과 죽음, 양구와 문자, 기억과 기록 사이의 간극을 남겨두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너무도 게으른 나는 늘 뭔가를 해야지 하면서도 실제 완성하지 않을 때가 많으니 뭐라도 핑계가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지극이 부끄러운 핑계이기도 하다. 몇 년 내에 만들어야지…
ㅁ
사회적 참사와 지인의 죽음이 별개의 사건으로 인식되지 않는 것은 트랜스젠더퀴어가 한국 사회에 위치하는 의미 때문이기도 하며, 죽음의 침투성이 강력해서 현재의 죽음과 과거의 죽음이 중첩되기 때문일 것이다. 올해 들어 단독으로 완성한 글이 한 편도 없는데, 논문을 준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 논문은 과거를 통해 미래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작업이었는데, 글 소재에 죽음이 없어서 진전이 안 되나 싶을 때가 있었다. 한동안 글을 쓰면 언제나 항상 죽음으로 귀결되거나 죽음을 경유했었다. 서두를 쓸 때는 죽음을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았는데 글을 쓰다보면 자연스럽게 죽음을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나는 아직 어떤 죽음도 제대로 직면하지 않고 그냥 품고만 있는 것일까 싶기도 하다.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제대로 논의하는 것도, 직면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품고만 있는 상태.
ㅂ
2025년에는 몇 편의 논문을 쓸 계획이 있다. ‘여성’만의 공간에서 트랜스젠더퀴어를 공동의 의제로 수용했던 과거의 상상력을 재평가하는 작업, 한국 트랜스젠더퀴어 인권 운동사, 2007년 차별금지법 사건과 교차성 등 몇 편의 주제가 더 있지만 공개해야 쓰겠지 싶어서. 사실 써야지 싶은 논문 주제는 스무개가 넘는데 너무 게을러 못 하고 있다. 2025년에는 해야지. 이것을 다짐하는데는 참사와 죽음 사이에서 또다시 트랜스젠더퀴어를 혐오하는 태도와 주장이 강하게 등장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있어서다. 일단은 김유진 선생님이 쓴 “여자대학을 다니는 트랜스젠더퀴어의 젠더 수행과 여성공간의 역동 : 협상, 저항, 재의미화를 중심으로“가 더 많이 회자되기를. 무엇이 되었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좀 정리해야겠다. 더이상 누군가가, 나의 동료가, 나의 지인이, 혹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트랜스젠더퀴어가 트랜스를 혐오하는 세상으로 인해 먼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지 않기를… 그러고보면 12월 13~15일, 단지 사흘만 공연한 [정원사와의 산책]이 놀라웠다. 정말 슬펐고 정말 좋았고 고통스러웠고… 뭐라고 쓰기에도 부족한 감정이 휘몰아쳐왔다. 죽음의 용기와 연대를 잊을 수가 없다. 꼭 2026년에는 재공연하기를…
ㅅ
혹시나 오프라인에서 저를 알아보신 트랜스젠더퀴어나 앨라이가 계시다면 굿즈 달라고 말해주세요. 항상 이런저런 뱃지를 챙겨다니니 연대의 의미로 기꺼이 나눔하겠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단지 짧은 순간만이라도 뱃지를 고르며 웃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ㅇ
아, 그러고보니 5년을 괴로워했던 [퀴어 한국사]라는 책이 나올… 나왔… 암튼 곧 나옵니다. 저와 한채윤, 둘이서 365개의 사건을 다뤘습니다. 후기에도 적었지만 다시는 안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