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순간의 졸음.
그 졸음을 참기가 힘들다. 한여름, 녹아내리는 몸처럼 몸은 녹아내리고 그 태양열에 감기듯 눈은 감겨간다.
가끔 이런 폭염 같은 졸음이 몰려온다.
단 몇 분간의 참기 어려운.
그 졸음을 참기가 힘들다. 한여름, 녹아내리는 몸처럼 몸은 녹아내리고 그 태양열에 감기듯 눈은 감겨간다.
가끔 이런 폭염 같은 졸음이 몰려온다.
단 몇 분간의 참기 어려운.
욕망이란 건, 몸 어딘가에서 몸을 타고 돌아다니는 무엇이라는 몸앓이. 결핍이 아니라 결핍과는 상관없이 발생하기도 하는(혹은 결핍과는 전혀 무관한).
그런 어떤 욕망과 종종 놀곤 한다. 몸을 타고 돌아다니는, 결핍도 아닌데 발생하고 있는. 그 욕망은 행해질 수도 있는 것이기도 하고 행해질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재미있는 건, 행해질 수 있는 욕망을 유예한다는 것. 정신분석에선 유예의 쾌락(?)이라고 말했던가. 어쩌면 그럴 수도 있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당장 행해질 수 있는 어떤 욕망을 행하지 않고 몸을 타고 놀도록 두곤 한다. (타고 노는 것은 누구이며 내버려 두는 것은 누구인가.) 행해질 수 있는 욕망과 유예하는 욕망(들). 유예하는 욕망을 즐기거나, 이런 욕망들이 몸에서 서로 경합하는 그 순간을 즐기고 있을 때, 욕망은 결핍과 관련 있는 것일까. 결핍과는 별도로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욕망을 결핍으로 보려는 시선 자체가 어쩌면 계급 우월주의에 의한 것일지도 모른다. 욕망 자체가 죄악시되었던 시대가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더욱더.
또한, 타고 노는 욕망은 누구이며 유예하는 욕망은 누구인가, 라는 식의 질문 자체가 근대 이분법(monolithic)의 반복이다. 욕망을 접근하는 방식이 문제이다. 유예하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욕망임을 감안할 때, “행하는”, “유예하는” 식의 구분은 욕망을 ‘이성’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거나 ‘나’와 욕망을 분리시키려는 것이다.
욕망 자체가 (또 하나의) 나인데, 그렇다면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까.
#玄牝에서 뒹굴다 보니 이 지경에 이르렀다. 흐흐흐
그들의 오만함과 폭력성에 치가 떨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