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가지 않았다.

아, 그러니까, 금요일 여이연 강좌는 가지 않았다. 으흐흑. 이런 거 빠지는 거 무지무지 싫어함에도 결국, 빠지고 말았다. 돈도 돈이지만 강좌를 들을 수 없었다는 사실이 무지무지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반쯤 안 갈 작정(반쯤은 갈 작정)으로 친구를 잠깐 만났다. 전해줄 것이 있어 잠깐 만난 것. 그러며 친구와 잠깐 얘기를 나눈다는 것이 저녁까지 같이 먹는 덕분에 시간은 7시를 훌쩍 넘긴 상태. 후후. 재미있는 건, 친구와 얘기를 나누며 얘기에 집중하는 동안에 알러지성 비염이 진정되었다는 사실. 결국 심리적인 요인도 작동한다는 의미다. 친구와의 얘기가 조금은 진지하고 심각한 내용이었고 그래서 말 속에 빠져있다 보니 비염이란 사실을 잊고 있었다. 헤어지고 나서, 비염이 진정되었네, 라고 깨닫는 순간 다시 비염이 스멀스멀 코를 간질였다는-_-;;;;

친구와 얘기를 나누다 가지 않은 것도 있지만 그래서 후회하느냐면 그렇지는 않다. 만약 비염이 없어서 강좌에 갈 작정이었다 해도 계속해서 친구와 얘기를 나눴을 거다. 그 만큼 중간에 자르고 나서기 어려운 얘기기도 했고 루인에겐 가장 소중한 친구이어서기도 하다. 그리고 그 시간만큼은 그 얘기가 강좌를 통한 변태의 쾌락보다 더 쾌락적이었다는 얘기(루인의 쾌락은 깔깔 웃는 유머의 의미가 아님은 말하지 않아도 당연한 사실). 그러고 보면 1000년대에 만난 사람 중에 아직도 친구로 지내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네.

여이연 오늘 강좌

이따 여이연 강좌 가야해서, 이렇게 [Run To 루인]이랑 놀고 있는데, 알러지성 비염 덕분에 갈등하고 있다. 듣고 싶은데, 가면 난감할 것 같다. 루인이야 괜찮지만 자꾸 기침하고 콧물 훌쩍거리면 사람들이 신경 쓰이고 강의 듣는데 방해되니까. 아, 갈등. 갈등. 갈등.

알러지성 비염: 의미 발생의 간극

“개”가 아님을 열심히 증명하고 있는 중.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어릴 땐 없었다고 기억하는데, 십 대 후반부터 알러지성 비염을 앓곤 했다. 겨울에도 감기 한 번 안 걸리고 지나가는 루인이지만 여름이면 어김없이 알러지성 비염에 몇 번은 종일 훌쩍거리며 지나가곤 했다. 하지만 작년엔 별 일 없었다고 기억하는데, 올해는 유난히 자주 비염이 도지고 있다. 후후. 아, 그렇다고 냉방병이 원인은 아니다. 에어컨 없는 집에서 살았고 지금도 에어컨은 쓰지 않고 있으니까. 여름 특유의 어떤 미세먼지에 더 예민한가 보다.

그래서 사람들이 감기냐고 물을 때 마다 말하고 있다. “인간임을 증명하고 있어요.”라던가 “개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어요.”라고. 속담에 “오뉴월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란 말을 빗댄 것. 하지만 왜 여기서 개가 등장하는 걸까?

친밀한 의미로? 오랫동안 인간들과 함께 살아왔으니까? 단순히 그렇게 말하기엔 “개”를 비하하는 의미를 동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라리 인간우월주의의 반영이라고 말하고 싶다. “개”를 포함하는 속담은 많고 그 속담들은 하나같이 “개”를 비하/열등의 의미로 불러들인다. “개만도 못하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등등.

“오뉴월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란 말은 왜 나왔을까? 때론 그것의 의미가 지금에 와선 혹은 특정 누군가에겐 작동하지 않는 순간이 있다. “오뉴월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의 의미를, 지금의 루인은 이해할 수도 없고 알아들을 수도 없다. 그저 그런 속담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이 말의 정확한 의미를 모른다. 이것은 한국인이라고 해서 한국어의 모든 뉘앙스를 알 수 있는 건 아니란 의미이며 언어의 의미 발생은 개인의 경험 맥락에 따라 다르게 발생한다는 의미이다. 속담으로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다지만 결국 속담이란 것도 언젠간 사라질 것이고 새로운 속담이 등장할 것이란 의미다.

이런 맥락에서 인터넷용어인 “안구에 쓰나미”란 말은 끔찍하다. 비록 쓰나미가 곧장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한 쓰나미 사태를 의미하진 않는다 해도 그때의 사건 이후로 쓰나미란 말이 널리 퍼졌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로인한 피해자들의 고통을 지워버린다는 점에서 이렇게 가볍게 소비할 수 있다는 점이 당황스럽고 때로 무섭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신의 경험을 설명하는 은유로 만드는 것의 폭력을 고민하게 한다. 일테면 “내 마음은 호수요”란 표현처럼 은유가 성립하기 위해선 어떤 현상을 고정적이고 변할 수 없는 대상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다른 해석을 배제하고 단일한 의미부여만 한다는 점에서 타인(의 고통)을 박제한다. 박제하는 순간 타인의 고통은 지워지고 박제하는 사람의 의도에 맞게 재구성하며 그리하여 그 말 속엔 더 이상 그 존재는 없다. 오직 “나”의 심정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가 될 뿐이다. 비둘기는 평화와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이런 비유법이 오히려 비둘기를 불행하게 만들기도 한다.

알러지성 비염에 몸이 맹~하다. 으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