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아주 잠깐, 그래서 몇 시간 정도는 이렇게 시간을 풀어 놓고 물 속에서 놀아도 괜찮아. 욕조에의 로망이 있어서, 언젠가는 욕조가 있는 집에서 살겠다는 바람이지만 자취생에 입에 풀칠이나 하면서 살 수 있으면 다행이라는 정도의, 거의 유일한 현실 인식으로 살고 있는 루인에게, 지금 시간은 욕조 가득 물을 받아 놓고 그 곳에 잠기고 싶지만, 그저 인터넷을 부유하고 있어. 이 시간 강박. DVD를 보고 싶었지만, 토요일로 미루기로 해. 인터넷을 떠돌다 벌써 이렇게 시간이 흘렀어. 어느 새, 몸은 책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있나봐. 20여 일의 시간 동안 읽고 밑줄 긋고 이면지에 정리하고 그렇게 정리한 내용을 편집하고, 전체적인 개요 속에 적절한 인용구나 쓸만한 아이디어들을 배치하고… 글을 요약 정리하는 기계가 되고 있다는 느낌을 잠깐 받았어. 일주일 전, 두 편의 논문 중 한 편의 초고를 완성하고 쉴 사이 없이 곧 바로 다음 논문으로 넘어갔을 때. 기계처럼 습관적으로 밑줄 긋고 요약하는구나. 다행이야. 이제 한 동안 그렇게 무식하고 폭력적인 방식이 아닌 그냥 즐겁게 놀 수 있겠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어.
대충 세어 보니, 두 편의 논문에 얼추 90개의 참고문헌 목록이 올랐어. 겹치는 것이 여럿 있으니 제외해도 대략 70여 편의 논문이나 책. 물론 20여 일의 시간동안 모두 다 정리한 건 아니고 어떤 건 이번을 위해 (다시)읽었고 어떤 건 글을 쓰다 예전에 읽은 책의 어떤 구절이 떠올랐고 인용하거나 그 글을 참고하라는 언급을 남겼고 그래서 참고문헌 목록에 올라간 셈이지. 하지만 징그럽다고 느꼈어. 첫 번째 글엔 참고문헌 목록이 50개. 글은 한글2002로 작업해서 A4지로 18페이지. 두 번째 논문의 참고문헌은 40개. 10페이지. 이 무슨 무식한 짓이람.
지난 토요일 첫 번째 논문을 제출하러 가며, 두 번째로 쓸 논문의 개요를 구상하며, 중얼거렸어, “내가 나이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 아닌 척 하지 않기 위해 글을 쓴다”고.
그때 고민 중에 있었어. 토요일에 제출하는 수업은 커밍아웃했고 오늘 제출한 수업은 그렇지 않고. 물론 선생님은 루인의 관심이 퀴어와 트랜스임을 알고 계시지. 루인의 ‘경험’에서 출발하지 않고선 글을 쓸 수 없으니 갈등이 컸어. 어떻게 할 것인가. 남의 얘기처럼 쓸 것인가, 그냥 글을 통해 커밍아웃할 것인가. 잠정적으로 지도교수였음 하는 상황에서 커밍아웃하지 않고 나중에 석사논문을 쓸 수 있을까? 자신 없었어. 그러다 중얼거렸어. “내가 나 아닌 척 하지 않기 위해 글을 쓴다”고. 그래. 그 말은 지금의 루인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고 싶다고 그렇게 해야겠다는 다짐으로 중얼거린 말이야. 이런 다짐을, 글을 시작하며 쓰는 인용구에 포함하기도 했어.
완성하고 제출하고 나면 어떤 기분일까, 전혀 상상하지 않았어. 그럴 여유가 아니었거든. 8월 초까진 학기 중인 것만큼이나 바쁠 테니까. 아니 그러길 바라니까. 사실 두려웠어. 4월 말부터 계속 바빴고,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는 그 느낌, 5분 거리에 있는 우체국에 갈 시간도 아까워 징징거리던 그 시간의 빠듯함. 물론 알아. 여유 있게 하려면 얼마든지 여유 있게 할 수도 있단 걸. 어떤 사람은 루인이 논문 초고를 완성하던 날 논문 구상을 하고 있다고 했으니 루인이 유별난 건지도 모를 일이야. 그래도 좋아. 이건 루인의 방식인 걸. 더구나 루인과 그 사람의 실력은 전혀 다른 걸. 한 편의 논문을 쓰는데 일주일이 걸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열흘 넘게 걸리는 사람이 있고 2~3일이면 쓰는 사람이 있고. 루인은 열흘이 넘게 걸리는 사람. 아니. 그 이상 걸리는 사람. 초고가 제출마감에서 최소한 3일 전에는 나와야 한다고 믿는 쪽. 그건 루인의 실력을 알기 때문이지. 그렇지 않으면 글이 엉망이 되는 걸. 그래서 더 유난스럽고 더 바쁜 티를 내는 거지. 혼자서 일을 벌이고 혼자만 바쁜 척, 하는 유난스러움. 알아. 루인이지만 루인도 재수 없는 걸. 그리고… 두려웠어. 이런 시간의 흐름이 끊길까봐. 그래서 흐름을 잊을까봐. 그래서 더 바쁜 척 하고 더 바쁘기 위해 일을 만들고 그랬나봐. 방학 기간 동안 읽을 책 목록을 벌써 다 짰고 할 일을 벌써 다 정했고…. 할 수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니라 이 흐름을 놓칠까봐, 그것이 두려웠어. 이 흐름이 좋은지 아닌지는 판단할 상황이 아니야. 즐겁기 때문에 계속 이어가고 싶다고 욕망했어. 욕망하고 있어.
제출하러 갔는데, 선생님께서 허무하지 않느냐고 물으셨어. 허무? 무슨 의민지 몰랐어. 그땐 5번째 수정본을 인쇄해서 곧장 선생님사무실로 간 길이었거든. 잠깐 상담을 하고 여성학과 사무실로 돌아가서 玄牝으로 돌아오려고 준비하는 동안, 뭔가 허전하고 허무한 느낌이 몰려왔어. 아, 이런 느낌이구나. 욕심만큼은 아니지만, 그래서 너무 속상하지만, 그래도 제출하고 나면 기분이 좋을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더 잘 쓸 걸 하는 느낌부터 아주 멍청한 글을 썼구나 하는 자학, 뭔지 모를 허탈함. 그런 것들이 밀려왔어. 뭔가 하나를 끝낸 느낌. 하지만 이 느낌을 수습하기 보다는 충분히 느끼기로 했어. 소중한 자양분이 되리라 믿어. 모든 시간은 소중한 자양분이라 믿는 것과 마찬가지야. 그래서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기로 했지. 후회해서 무엇 하느냐고. 그땐 그 선택이 최선이었는걸.
21일 만에 나스타샤와 접속하며 오랜 만이구나 했지만 한 시간이 지났을까, 불안이 밀려왔어. 이렇게 오래 나스타샤 혹은 인터넷을 통한 컴퓨터와 놀아도 되는 걸까, 했어. 몸은 이렇게 변한 거야. 결국 즐기고 싶던 DVD는 토요일로 미루기로 해. 오랫동안, 토요일은 대청소와 한없는 게으름으로 쉬는 날이니까. 그날, 예전에 산 [스윙걸즈]랑 [메종 드 히미코]를 즐기기로 해. 내일은 새로 시작하는 세미나(WIG)를 하는 날이니까, 오늘은 그걸 준비하기로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