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엄치며 돌아다니는 언어

#이미 이곳에 쓴 글들을 토대로 수업 에세이를 위해 재구성하고 다시 쓰고 해서 완성한 글. 이미 이랑엔 공개했음. 어정쩡하게 길다는 느낌이 든다. 수업논문이지만 제목을 이렇게 달았다. 루인은 이런 식이 좋다.

헤엄치며 돌아다니는 언어
―서울여성영화제 상영작인 [비행기 납치범, 레일라 카흐레드], [침묵에 대한 의문], [커밍아웃]을 읽고

1.
새 학기를 시작하고 며칠이 지났을까, 등록금인상과 관련한 총학의 대자보와 현수막을 접했다. 대학원에 입학하기 전 등록금 및 입학금 때문에 포기할까를 고민했었기에 좋은 결과를 기대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총학생 회장을 비롯한 몇 명이 단식을 시작했다는 자보를 접하고 아픔을 느꼈다. 결국 이렇게 가는 걸까.

단식을 한다는 대자보를 접한 며칠 후, 이른바 “대학생들을 위한”다는 매체에서 관련 기사를 실었다(정확한 매체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학기 초만 해도 ‘평화’롭고 즐겁게 가더니 결국 단식이나 삭발 등 “과격”하고 “극단”적인 방법으로 투쟁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기사를 접하고 불편함을 느꼈다. “과격”하다고? 이 매체는 누구의 입장에서 누구를 위해 기사를 쓰고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대학생을 위한” 매체란 표제아래 총장으로 상징하는 학교의 입장을 반영하는 매체는 아닌가, 했다. 누구의 입장에서 “과격”하고 “극단”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 걸까. 모든 저항은, 기득권자와 그 기득권이 “다수”의 권력/권리이며 사회를 안정하게 유지하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과격”하다. 모든 저항은 “과격”할 수밖에 없다.

일전에 상대방의 ‘폭력’에 기분이 나빴지만 며칠이 지나서야 불쾌함을 블로그를 통해 간접적으로 표현했던 적이 있다. 어떻게 되었을까. 루인이 사과했다. 상대방은 기분이 나쁘면 진즉에 자신에게만 조용히 말하지 왜 블로그와 같은 “공론”의 장에서 떠드느냐고, 오히려 자신이 피해자라고 상처받았다고 말했다. 기분 더러웠지만 결국 루인이 사과했다. 어떻게 소통하고 어떻게 말할 것인가(자신의 목소리를 상대에게 전달하기 위해 어떤 전략/언어를 쓸 것인가)와 함께 누구에게 문제제기 할 것인가(누구와 소통할 것인가, 침묵의 의미는 무엇인가)는 중요한 문제다. 성폭력 사건과 관련해서 피해경험자가 자신의 피해 사실을 공개하는 순간, 가해자는 “명예훼손”이니 “인권침해”니 하며 역고소를 한다면서 자신이 피해자라고 호들갑을 떤다. 당연한 발화가, 피해경험자를 가해자로 역전하는 일은 빈번하게 발생한다. 권력의 불균형 상황에서 기득권자에게 도전하는 저항자의 모든 행위는 “과격”하기 마련이며 알아듣지도 못할(않을) 사람에게 항의/저항하는 건 언제든 피해경험자, 저항자를 가해자로 둔갑시킨다(“넌 왜 그렇게 과격하니?”, “상대방의 입장도 생각해줘야지.”).

하지만 기존의 언어 내에서 기득권자와 주류 이데올로기를 위협하지 않는 방식으로 저항하기는 불가능하다. “왜 그렇게 쿨하지 못하냐”, “왜 그렇게 감정적으로 말 하냐”,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해라”와 같은 언설들 속에서, 기존의 언어로 저항하기란 결국 기득권자의 “배려”와 “관용”을 ‘구하는’ 방식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저항자, 피해경험자들이 가지는 ‘죄책감’(“좀더 ‘평화’롭게 할 수는 없는 걸까”, “나는 왜 이렇게 과격한 걸까”, “상대방이 기분 나쁘면 어쩌지”)은 기득권자, 가해자들의 권력/위치와 자신을 동일시하는데서 생기는 감정이다. “넌 왜 그렇게 과격하냐”란 비난은 기득권자, 가해자들의 권력과시/투정에 가깝기에 반응할 만한 가치가 있는 내용이 아니라고 느낀다.

2. “과격”하고 “극단”적인 표현…? 누구의 입장에서?
리나 마크보울 감독의 영화 [비행기 납치범, 레일라 카흐레드Leila Khaled Hijacker]를 읽으며, 감독은, 기존의 언어는 누구의 입장을 반영하는가, 란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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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와 놀며 “약자는 상대방을 ‘히트’하고 ‘런’할 수밖에 없지만, 강자(미국)는 전세계 어디서나 ‘히트’하고 ‘스테이’(stay, 주둔)한다”는 리영희씨의 말이 떠올랐다. 치고 빠지는 전략은 “비겁한” 행동이 아니라 권력의 불균형 상태에선 각자가 구사하는 언어의 의미에 차이가 있음을 의미한다.

이 다큐멘터리의 문제의식은 감독과 레일라가 갈등하는 지점에서 드러난다. 감독은 레일라를 그래도 문제가 있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냐고 묻고 레일라는 자신을 “자유의 투사”로 명명하며 되묻는다. 도대체 “테러”의 정의(定義, definition)를 누가 하냐고. 미국이나 서유럽 사람들, 이스라엘 사람들에겐 레일라가 테러리스트겠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겐 자유의 투사이다. 이 말을 접하며 한국의 일제식민지 시대가 떠올랐다. 한국의 한국사 교과서엔 윤봉길이나 유관순 들의 행동을 독립투사로 기록하고 있고 당시에도 그렇게 불렀지만, 일본의 입장에선 반란/반역 행위였고 폭동이었다. 위치에 따라 다르게 명명하고 ‘같은’ 낱말의 의미도 다르다. 다큐를 진행하는 내내 감독이 가지는 혼란 역시 이 지점이다. 팔레스타인 출신이지만 스웨덴에서 전쟁의 고통 “없이” 살았던 감독은 테러는 곧 사악한 폭력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레일라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만나면서 이런 믿음이 흔들리는 걸 경험한다.

올 초, 한 신부가 농민투쟁이 “과격”해지는 건 언론 탓이 크다{정철근 “폭력시위도 언론 책임?”, 양성욱, 오남석, 심은정 “‘폭력시위 언론 탓’ 논란”}는 발언을 해서 각종 언론에서 보도했던 적이 있다. 루인은 이 지적에 타당한 측면이 있다고 느꼈다. 기득권자(상당수의 언론을 포함해서)들이 정해준 선에서 투쟁/저항하면 무시하고 보도를 안 하지만 그 선을 넘어서면 “과격한 농민투쟁”, “극단적인 폭력 시위”란 제목으로 신문 지상에 싣는다. “무력투쟁”이니 “과격하다”느니 하면서 온갖 소란과 호들갑은 다 떤다. 어떤 과정이든 농민들의 요구사항/목소리는 묵살하지만 최소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가만히 앉아 고분고분 그냥 죽지는 않겠다는 의사를 드러낼 수는 있다는 점에서 선택의 여지는 별로 없다고 느낀다. 저항자들이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은 이렇게 “과격”할 수밖에 없다.

지금 듣고 있는 한 (커밍아웃을 하지 않은) 수업에선 ‘동성애’와 관련한 단어만 나와도 불편하고 거부감이 든다는 얘기를 공공연히 하고 전반적으로 수긍하고 공감하는 분위기다. 그나마 “주류”라고 느끼는 ‘동성애’이건만, 수업 교제로 읽는 책이나 논문에서 섹슈얼리티, 성적 지향성 등은 얘기도 하지 않고 그저 “homosexual”이나 “bisexual”이란 단어가 스치듯 나오건만 ‘이성애’주류 사회에서 ‘동성애’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위협처럼 느끼는 것 같다. 하긴. 하리수와 같은 트랜스의 출현은 단 한 명뿐일지라도, 성정체성의 위기니 어쩌니 하며 호들갑이다. 말세라느니, 곧 신의 천벌이 있을 거라느니 하는 식의 언설은 코미디가 아니라 심심찮게 접할 수 있는 2006년의 일상적인 풍경이다. 10대 이반이 겪는 폭력적인 상황과 관련해서 그나마 조금은 가시화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변한 건 별로 없다. 커밍아웃은 꿈에서나 가능할 뿐 단지 친밀감으로 손을 잡는 행위, ‘남자’처럼 머리를 짧게 자르거나 ‘남성’스런 행동을 하는 정도만으로도 (‘이성애’)성정체성 확립에 혼란을 주니 위험하다며 자퇴나 전학을 종용한다. 기득권자의 언어에 저항하는(조금만 ‘다른’) 발화는 그 내용이 어떤 것이든 “폭력적이고 위협적”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주로 한다고 간주하는 “테러”의 방법 또한 마찬가지다. 그전까지 이스라엘과 서유럽, 미국 등이 행한 폭력에 아무리 저항해도 서방의 그 어느 언론도 보도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겪는 일은 “세상에 없는” 일인 셈이었다. 결국 자신들의 목소리/처한 상황을 발화하기 위해 선택한 방식은 “테러”였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듣게 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비행기 납치였다. 목적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듣게 하는 것이었기에, 레일라의 말처럼 비행기에 타고 있던 사람 중 누구도 다치지 않았다. 이때,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저항 방법을 무조건 폭력적이고 나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왜 “평화”적인 방법이나 “대화”를 하지 않고 “극단”적인 방법을 쓰느냐고 말할 수 있을까.

3.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듣기 싫어서 “침묵”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일전에 이랑의 공개 세미나 자리에 참석한 한 사람이, “피해를 겪으면 여성들도 목소리를 내야한다, 가만히 있으니까 별다른 변화가 없는 것 아니냐”라는 말을 했었다. 운동권 노래 중에 “딸들아 깨어나라”란 제목의 노래가 있다. 둘 다, ‘여성’이 “계몽하지 않아서” 문제라는 인식이다.

누구의 언어로 말하는가에 따라 어떤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상대가 아무리 소리쳐도 들을 수 있는 귀가 없으면 듣지 못한다. 그래서 종종 중얼거리는 말: “타자”들이 억압 상황에서 침묵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아무리 말을 해도 ‘들을 수 있는/들으려는 귀’가 없어서 안 들린다. 1990년대 중․후반 들어 ‘동성애’/이반이 가시화되자 그 전에는 한국 사회에 “없던” “변태”들이 “세기말이 되고 서구문화가 유입되니까 유행처럼 급속도로 번진다”며 “성정체성 위기”를 “염려”하는 말들이 꽤 있(었)다. ‘동성애’는 한국 사회의 전통에선 찾을 수 없는 수입품이란 얘기다(한국 사회에서, 받아들이기 싫은 모든 현상은 “수입품”이다). 하지만 과거에도 ‘동성애’관련 기록은 항상 있었고 관련 목소리도 늘 있었다. 199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겨우 들리니까 혹은 “귀”에 거슬리기 시작하니까, 그때 처음 생긴 거라고 얘기하는 셈이다(‘이성애’-젠더의 ‘남성’중심 담론에서 모르는 건 언제나 없는 것이다).

누구나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하기에 들을 수 있는 것 밖에 못 듣고 하고 싶은 모든 말을 발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침묵은 “침묵”이 아니라 아무리 말해도 못 알아들으면서(혹은 듣고 싶지 않아서), 못 알아듣는 ‘무지’를 들키고 싶지 않기에 발화하지 않고 있다고 명명한 것일 뿐이다. 물론 아무리 말해도 상대가 못 알아들을 거란 걸 알기에 협상으로서 침묵하기도 한다.

단편 애니메이션인 수잔 저스틴 감독의 [커밍아웃Listen] 역시 이런 지점을 포착하고 있다. 어머니와 딸의 대화를 말풍선을 통해 전달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있는 [커밍아웃]은 처음엔 말풍선이 서로에게 다가가지만, 딸이 ‘레즈비언’ 정체성을 말하는 순간, 딸의 말풍선은 어머니에게 도착하지 못하고 중간에 깨진다. 딸이 아무리 얘기를 해도 어머니가 듣고 싶지 않은 얘기는 중간에 깨져서 도달하지 않는다[言語道斷]. 발화하지 않아서 억압이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말을 해도 “들으려는 귀”가 없어서 억압이 계속된다.

레일라의 “비행기 납치”는 아무리 말해도 들은 척도 안 하기에 상대방이 듣게 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이런 식으로라도 하지 않으면 그런 일은 세상에 없다고 간주하다가 나중에 우연히 ‘발견’할 땐, “왜 진작 말하지 않았냐”고 반응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마를린 호리스 감독의 [침묵에 대한 의문A Question Of Silence]은 ‘침묵’의 이중적 의미를 절묘하게 포착하고 있다. 크리스틴 모레나는 영화 상영 내내 말을 하고 있지만 그 언어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용만 부인과 안드레아 브라우어, 그리고 심리학자 보스, 옷가게에 같이 있던 네 명의 ‘여성’들 정도다. 크리스틴의 침묵은 “침묵”이 아니라 침묵이란 형식을 통한 말하기다. 목소리를 통해 말하지 않을 뿐, 끊임없이 말하는 크리스틴의 침묵은 크리스틴의 목소리/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는 사람들에겐 “침묵”임을 암시함과 동시에 목소리를 통해 말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기에 선택한 협상으로서의 침묵이다. “병리적인 현상의 일상성”이 아니라 발화하는 방법 중 하나로 침묵이란 형식을 선택한 것이다.

4.
[비행기 납치범, 레일라 카흐레드]에서 감독은 레일라에게, 팔레스타인 어른들이 어린 ‘남자’ 아이들에게도 전쟁 훈련을 시키는 건 문제가 아니냐고 묻는다. “테러범”들의 “비인간”적인 “만행”을 부각하기 위해, 어린 ‘남자’ 아이들도 총을 들고 다니며 군사훈련을 받고 있는 사진은 한국 언론을 통해서도 자주 접할 수 있다. 이런 인식은, 세상의 모든 (‘남자’) 아이들은 동일한 환경에 있다는 전제에서나 가능한 환상이며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발생하는지를 묻지 않는 방식이다. 그래서 레일라는 되묻는다. 부모가, 가족이, 이웃이 학살과 추방으로 죽어가고 자신도 언제 어떻게 폭격으로 죽을지 알 수 없는데 어떻게 훈련을 받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감독이나 사진을 통한 “폭로”가 ‘남자’ 아이들이 어른들의 강제로 마지못해 훈련에 참가했다고 간주하는 반면, 레일라는 아이들 스스로 선택한 행동이라고 말한다. 근대의 발명인 아동기의 내용을 어떤 식으로 구성하느냐에 따라 접근 자체가 달라지는 장면이다. ‘직접적인’ 분쟁지역이 아닌 미국이나 유럽에서 근대 학교 교육 제도를 살아가는 아동들과 전쟁 지역에서 포탄이나 실탄을 매일같이 접하는 아동들을 똑같이 취급하는 것은 탈맥락화 하는 폭력이다. 미국이나 유럽의 방식을 판단기준으로 삼고 있는 이런 언어들은, 팔레스타인의 “테러”는 “악명 높은 만행”인 반면 “승자”인 이스라엘의 학살 주도자는 “영웅”이라 불리고 때로 총리가 되는 장면을 통해 흔들린다. 감독은 마지막 질문인, “레일라 때문에 팔레스타인이 악명을 얻으리란 걸, 비행기를 타기 전에 생각해본 적이 있나요?”에 레일라가 전화를 끊어버리는 소리와 함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도록 편집함으로써 이런 언어가 무지에 기반한 탈맥락적인 인식이라고 말한다.

언어는 객관적이지 않으며 항상 특정 누군가의 경험만을 반영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겐 “테러리스트”가 다른 사람들에겐 “자유의 투사”이고, 어떤 사람에겐 “침묵”이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는 것이라면 다른 사람에겐 발화하는 방식의 하나이다. 기득권자의 폭력과 저항자의 ‘폭력’은 그 내용과 의미가 다르며 그래서 “왜”가 아니라 “어떻게”로 질문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무수한 기원서사들이 이유나 원인만 밝히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얘기하지만 그렇게 해서 해결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고 느낀다. 크리스틴 들이 왜 옷가게 주인인 ‘남성’을 죽였는지를 밝히거나 레일라가 왜 비행기를 납치했는가를 밝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맥락들을 탈락한 언어로 묻고 판단하는 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 같다._M#]

단상 혹은 바쁜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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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월요일부터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안 마시고 잘 지나가나 했는데, 생활방식을 바꾸면서 일시적인 필요성이 생겼다. 평소 밤 12시면 이불 속으로 들어가 7시에 일어났는데, 12시 넘어 잠들고 6시에 일어나기 시작했기 때문. 방학이라면 이런 생활에도 커피 없이 적응하겠지만(신체리듬을 바꾸면 낮에 잠이 오기 때문에) 지금은 할 일이 너무도 많기에 낮 시간의 10~20분 조는 것도 아깝기 때문이다. 하나의 원칙은 하루에 딱 한 잔만 마시겠다는 다짐. 그 이상 마시면 속이 쓰리고 중독으로 넘어가기에 주의해야 한다. 크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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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종일 우울해서 밤늦게 초콜릿을 먹었다. 진하고 달콤한 다크초콜릿. 초콜릿을 먹으면 우울증이 괜찮아진다고 하는데, 사실 잘 모르겠다. 다만 달콤함을 음미하는 동안은 우울증을 잊고 견딜 수 있다. 그래서 심할 땐, 입에 쓴 맛이 날 때 까지 초콜릿을 먹는다. 어제가 다소 그런 상황이었다. 어제 일정에 따른 분량을 다 못했다는 자책이었다. 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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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개명을 승인한다는 법원판결 소식을 들었다. 아직도 어색하다.

지식과 언어는 누구의 입장을 반영하는가

역시 수업 예습에세이. 일종의 리뷰 혹은 독서일기;;;
조순경씨의 논문은 여기라고 해봐야, 깨져서 안 됨ㅠ_ㅠ
다른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예습에세이를 쓰는지 모르겠지만, 루인은 저자의 입장과 루인의 입장이 갈등하는 그 지점을 쓰는 편이다.
바쁘다고 블로그에 아무 글도 안 쓰기 애매할 땐, 역시 이런 글이…-_-;;;

2. 조순경 <한국 여성학 지식의 사회적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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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 수업을 통해 섹스/젠더/섹슈얼리티를 배운 후, 느꼈던 괴리와 갈등은 이후 고민의 중요한 지표이다. 젠더로는 설명할 수 없거나 상당한 간극을 이루고 있는 ‘경험’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한동안 기존의 젠더 설명에 자신의 삶을 끼워 맞추기도 했다. 그렇게 설명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젠더에 억지로 끼워 맞췄고, 어떤 ‘경험’들은 지우거나 없는 것으로 취급하기도 했다. “변태스럽고 부끄러운 경험일 뿐이야”라고 중얼거리며. 그래서 기존의 젠더 인식에 별로 문제제기를 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 갈등을 그냥 두기엔 균열이 컸다. 기존의 젠더 설명에선 치마를 입(고 싶어 하)는 ‘남성’이나 스포츠머리를 하고 ‘남자’처럼 입(고 싶어 하)는 ‘여성’을 설명할 수가 없고 단지 “변태행위의 예외”일 뿐이었다. 이런 불일치, 간극, 균열지점, 갈등 등을 고민하는 와중에 조한혜정 선생님의 <탈식민지 시대의 글 읽기와 삶 읽기>를 읽었고 그 과정에서 숨통이 트이는 느낌을 받았다. 기존의 지식/인식체계와는 맞지 않음에도 기존의 지식으로, 다른 누군가의 ‘경험’으로 해석한 지식으로 맥락이 다른 자신의 삶을 끼워 맞추는 행위가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벨 훅스의 글이 매력적이라 한국어로 번역하지 않은 몇 권의 책을 읽었을 땐, 왜 벨 훅스가 번역되지 않았을까, 로 혼자서 흥분했다. [Ain’t I A Woman]이나 [Feminist Theory]와 같은 책은 탁월한 통찰력을 주는데, 왜 “백인” 페미니스트들의 글만 번역되고 배우는 걸까.

모든 지식 생산 과정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맥락 속에서 이루어지기 마련이라, 무엇을 물을 것인가는 왜 다른 많은 문제들 중에서 그것을 묻는가, 그 질문은 어떤 맥락에서 발생하는가와 연동한다. “수입 이론”은 왜 특정 이론만 수입하는 걸까, 이런 선별과정은 어떤 맥락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트랜스/젠더/이반queer 이론을 고민하고 공부하고 있지만 이와 관련해서 국내에서 생산한 이론이든 번역한 책이나 논문이든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드문 상황이다. 하리수를 통해 트랜스가 “가시화”되었다고는 하지만 트랜스 이론을 통해 젠더를 다시 읽는 작업이라든가 트랜스 담론을 논의하는 작업은 아직도 극히 드물다. 어떤 일이 있다고 해서 ‘현상’이 되는 건 아니며, 어떤 현상이 가시화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어떤 이론적 논의를 생산하고 있는 건 아니다. 어떤 현상이 드러나도 그것을 통해 언어화하는 작업, 앎을 생산하는 작업이 이루어지는 건 또 다른 차원의 과정이 필요하다. 하리수를 통한 트랜스의 가시화는 젠더를 다시 질문하는 과정이라기보다는 그저 “그런 사람도 있더라”는 식으로, 젠더의 예외를 말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식의 유입과 생산, 그리고 ‘현실’의 설명은 언제나 특정한 요구/권력에 의해서만 발생한다.

‘현실’은 고정되고 모두에게 같은 것이 아니라 언제나 변화하며 어떤 입장으로 ‘경험’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성애’자들에게 “호모포비아”는 뉴스를 통해서나 접할 수 있는 낯선 일이지만 이반들에겐 “호모포비아”가 일상 ‘경험’일 때, ‘경험’하고 구성하는 ‘현실’은 다르다. 이반이라고 모두 같은 경험을 하는 것이 아니기에 자신의 삶을 해석하는 내용 역시 다르다. 언제 어떤 앎으로 삶을 해석하느냐로 과거는 끊임없이 변한다. 기존의 젠더 해석을 받아들이려고 하던 시절의 트랜스/이반 ‘경험’은 언제나 지워야할 일이거나 전혀 떠오르지 않는 ‘경험’이었다. 루인에게 트랜스/이반 ‘경험’은 일종의 발굴(‘창조’, ‘발명’)과정인데, 새로운 앎/언어와 만나면서 잊고 있던 혹은 삭제해야만 했던 과거를 되살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 과거를 계속해서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이성애’-젠더구조를 당연시 하던 시절엔 중 ․ 고등학생 시절 ‘동성’을 좋아한 감정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기존의 젠더 설명과 갈등을 겪으면서 이런 과거들을 발굴하고 한 번도 떠올리지 않았던 ‘경험’이 불쑥 떠오르곤 했다. 언제나 새로운 몸을 통해 다른 식으로 ‘현실’을 구성했고 과거는 한 번도 고정적인 내용이 아니었다. 트랜스/이반으로 자신을 명명하고 채식주의자로 명명하면서 비로소 느낄 수 있는 일들은 너무도 많았다.

하지만 이런 경험들이, 영어로 쓴 책이나 논문들을 읽으며 재구성하는 경우가 많다고 해서 “서구에서 수입한 것”이라거나 “수입 이론에 의존”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을까. 2006년을 살고 있는 지금, 어디까지가 미국적이고 어디까지가 일본문화의 잔재이고 어디까지가 한국적인 걸까. ‘순수’하게 한국적인 내용은 있을까. “우리의 현실”이 있다고 하기 보다는 어떤 언어가 자신의 경험을 더 잘 설명하거나 숨통 트이게 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닐까(따지고 보면 수입하지 않은 이론이 어디 있겠느냐고). 또한 “의존”이라면 의존이 그렇게 안 좋은 걸까. 오히려 독립적이라는 착각이 더 문제가 아닐까. “서구는 이론이고 제 3세계는 데이터”라는 언설은 역설적으로 서구이론이 “제 3세계”의 ‘경험’에 의존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누구나 서로와의 관계에 의존하고 있지만, 자신은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이라는 믿음 자체가 더 문제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각주 15번에 있는 “서구 여성학 이론에서 결여된 부분, 서구 이론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 문제영역이 곧 한국사회의 여성 경험의 특수성이며 우리와 서구 사회의 현실과의 차이라 할 수 있다”(186쪽)란 말은 문제로 다가왔다. 왜 서구(라고 불리는 특정 지역)는 “보편”이고 한국은 “특수”인가. 서구는 그들이 경험에 기반하고 있기에 그런 이론이 나왔으며 그것은 ‘보편’이 아니라 그런 이론이 나온 맥락이란 의미이다. 한국에서의 경험이 서구의 그것과 다른 것은 한국의 경험이 “특수”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언어를 찾는 과정은 바로 이런 지점에서 발생한다고 느낀다. “자신의 문제를 풀어갈 언어를 가지지 못한”(183쪽)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몸이 말하는 언어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없음”이 문제이다. 기존의 언어와 자신의 몸이 가지는 갈등과 불편함을 읽는 작업이 바로 자기 자신의 자리에서 읽는 작업이 아닐까. 그래서 이런 읽기는 기존의 권력에 아부하기 보다는 기존의 권력에 도전하는 작업이라고 느낀다. 기존의 권력에 아부하고 기존의 언어를 문제시하지 않으면서 갈등하는 감정들을 언어화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하리수를 통해 “트랜스젠더”란 명명을 접했지만 끌림과는 별도로 트랜스가 숨통을 튀어주는 언어로 다가온 건, 젠더를 고민한 이후였다. 기존의 언어에 머물려고 할 땐, 비록 ‘안전’했을지는 몰라도 우울했고 언제나 자기 분열 과정에 있(었)다. 기존의 권력체제에 있는 이상, 자신의 ‘경험’을 언어화할 수는 없다. 비록 “미쳤군”이란 얘기를 듣는다고 해도 기존의 권력에 도전하고 이런 과정을 통해 몸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순간이, 더 행복하고 때론 ‘권력’이 되기도 한다.

아직도 언어를 모색하는 미미한 과정에 머물고 있지만, 균열과 분열 과정과 이때 느끼는 감정을 읽는 작업이, ‘다른’ 지식을 생산하는 자원이 되리라 믿는다. “타자성”은 열등함의 지표가 아니라 자원/힘이기 때문이다._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