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 소논문쓰기 + 기타등등

조금 전 중간고사로 제출할 소논문 한 편의 초고를 끝냈다. 애초 계획으로라면 금요일에 완성해야 했지만, 게으름의 결과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초고를 끝났다는 사실에 조금은 위로.

혼자서만 재미있는 일이지만, 이번 이 글의 제목은 [시적 언어의 혁명]이다. 큭큭. 서점이나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하면 정확하게 일치하는 책이 나오는데, 그 책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그 저자와도 별 상관없다. 물론 루인은 그 저자의 글을 제대로 읽어본 적도 없고 사실상 모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책을 의식하고 이런 제목을 붙인 것이 아니라 두 편의 책/논문을 해석하고 전체적인 개요를 짜다가 순간적으로 떠오른 제목인데, 우연히 겹친 셈. 큭.

쓰면서 재밌어서 이곳에 공개할까하는 몸앓이를 잠깐 했다. 8쪽 정도의 분량은 문제가 아닌데 내용에 영어를 그대로 쓴 부분이 있어서 관두기로 했다. 소논문을 쓰면서 인용하고 참고문헌 목록에 올리기도 하는 글 중엔 가끔씩, 루인이 쓴 글도 있다. 뻔뻔하긴. 하지만 블로그를 통한 글은 한 편 한 편이 참고문헌 목록에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 지론이다(인터넷 신문은 참고문헌에 올리고 블로그에 쓴 글은 안 올린다는 건 문제 있다). 문제는 가장 자주(라고 해봐야 몇 번 안 된다) 인용하는 글이 사실은 가장 부끄러워하는 글이다. 그 글엔 영어가 난무하기 때문. 무식을 광고하는 글인 셈이다. 뭐, 조금 전 쓴 소논문의 경우, 영문학과와 연계해서 수업을 하기에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이전까지의 학제가 고립적인 측면이 있어서, 영문과는 영문학만, 역사학과는 역사만 배우는 식이라면, 여성학 협동과정의 경우엔 이런 분과학문의 경계를 넘나들기에 잡다한 앎으로 빠져드는 매력이 있다. 대신, 협동 혹은 연계하는 학문을 함께 공부하지 않으면 힘들 수도 있다는 문제점이 있긴 하다(사실 이 문제점이 장점이자 매력이다). 아무튼 영문학과 연계해서 하는 수업이라 수업 시간에 사용하는 텍스트는 모두 영어고 어설픈 실력으로 번역하자니 그냥 영문으로 인용하는 편이 더 좋았다. 뭐, 핑계라면 핑계다.

하지만 아직 세 편의 글을 더 써야 하고 오늘 중으로 끝내야 하는 알바도 있다. 으으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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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서울여성영화제에서 상영한 영화제목으로 검색해서 들어오는 사례가 늘었다. 짐작하건데 여성학 수업을 듣고 리뷰를 제출해야 하니, 인터넷을 검색하다 들어왔겠지. 도움은 되었나요? 출처만 밝혀주시면 인용이야 상관없답니다. 별 내용도 없을 텐데 고스란히 퍼가시는 일은 없겠지요? 그렇게 믿고 싶답니다.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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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일을 한 통 받았다. 무지 반가운 메일이다. 설렘과 두근거림. 하지만 당장 시간이 급해서 할 수 있을까? 하고 싶다. 하고 싶다. 하고 싶다. 대신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달콤, 살벌한 연인: 맥락, 불필요한 죄의식 걷어 치우기

2006.04.19.21:15, 아트레온 2관 F-7 [달콤, 살벌한 연인]
기본적으로 스포일러는 없지만, 영화를 즐기는데 방해를 줄 수 있는 해석일 수는 있어요. 말하나 마나.

#1
그렇지만 상부의 군인들만 욕할 수는 없는 게 대중을 대신하여 기자들이 그 ‘이유’라는 걸 묻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우리 모두는 ‘이유’에 중독 돼 있다. 이유가 공급되면 안심이 되고 이유가 없으면 불안해한다.
-김영하, “복무염증과 애인변심” 씨네21 539호(2006)

문득 [올드보이]가 떠올랐다. 작년인가, 아무런 흥미도 없었던 그 영화를 접한 건, 세미나 텍스트로 사용한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였다. 결국 세미나 텍스트로 하진 않았다. 물론 이 영화가 아니라 다른 영화를 떠올릴 수도 있다. 어떤 영화든 상관없는데, 루인이 기억하는 한국 영화의 상당수가 기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건이 왜 발생했는지, 라는 이유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그 이유를 밝히는 순간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방식이다. 왜 살인을 했는지, 왜 버림 받았는지, 주인공의 불행 혹은 성격은 어린 시절의 어떤 고난으로 인한 것인지, 등등 이유/기원을 축으로 전개한다. [달콤, 살벌한 연인]은 이런 기원을 축으로 하는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어떤 과정을 거치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영화는 이미나(이미자)가 왜 “살인”을 했는가, 각각의 “살인”을 한 동기는 무엇인가엔 별다른 관심을 안 가진다. 첫 번째 “살인”만이 지나가는 말로, ‘아내’폭력 피해경험자로서 정당방위로 남편을 살해했다는 내용이 나올 뿐이다. 영화 전체적인 흐름이 살인의 동기를 찾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과정으로 “살인”을 하는지 맥락을 좇고 있으며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영화가 재미있는 이유 중 하나는 여기서 출발한다.

#2
결혼 한지 6개월 만에 이혼을 선택하면 “참을성이 없다”며 욕한다. 하지만 10년 넘게 혹은 20년 넘게 살다가 이혼 소송을 내면 “지금까지 잘 살았으면서 이제 와서 이혼하는 이유가 뭐냐?(애인이라도 생겼냐?)”라고 반응한다. ‘아내’폭력 가해 남편의 경우 대개 결혼 3개월부터 폭력을 시작하지만, 폭력을 시작하는 초기든 10년을 넘었든 항상, “아내”/’여성’에게 참고 “지혜롭게 해결”할 것을 요구한다. 병원에 실려 가거나 언론이 보도할 정도가 되면 “왜 진작 이혼하지 않고 참고 지냈냐”고 ‘여성’을 비난한다. 정당방위로 방어하다 “남편”을 죽이면 고의에 의한 살해가 아닌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폭력 가해 남편을 살해한 기사가 인터넷에 뜨면, 리플 중 상당수는 여전히 “어떻게 남편을 죽일 수 있느냐”, “이거 무서워서 결혼 하겠냐”라는 식의 피해경험’여성’을 비난하는 내용이다. 인터넷에서만 이런 것이 아니라 경찰서나 검사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피해경험’여성’은 언제나 자신이 가해자라도 되는 것 마냥, 고개를 숙이고 반성하는 모습을 연출해야 한다. “남편”이 칼을 들고 죽인다고 위협하는 상황에서 그 상황을 모면하려고 피하다 “남편”이 죽기라도 하면, “꼭 죽여야 했냐”, “고의로 죽인 것은 아니냐”란 소리를 경찰서와 재판소에서도 듣기 때문에 당당하게 정당방위였음을 주장했다간 갖은 비난이 빗발칠 것을 감수해야 한다. 정당방위였어도 “백배 사죄하는 심정”으로 “잘못을 뉘우치는” 표정으로 있어야 한다. 이런 “반성의 기미”가 없으면 “선처”나 “장상참작”은 기대하기 힘들다.

이 영화는 바로 이 지점을 뒤집고 있다. 이미나는 자신의 행동이 정당함을 알고 있기에 비록 “살인”으로 괴롭다 해도 “잘못”했다며 “반성”하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한국 영화에서 이런 캐릭터가 있었던가. 잘 모르겠다. 불필요하지만 ‘이성애’-젠더의 가부장제 사회가 강요하는 “죄의식”을 걷어 치웠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꽤나 몸에 든다.

#3
물론 중간 중간에 꽤나 불편한 장면들이 나온다. 감독이 젠더 감수성이 있었다면 이 영화는 더 재밌는, 어쩌면 루인에게 에로틱한 자극을 줄 영화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코미디 장르라는 형식답게 재밌다. 하지만, 2006년의 한국의 ‘주류’ 문화를 모르는 사람에겐 웃음 포인트가 다를 수도 있겠다고 느꼈다. 일테면 네이버나 싸이가 나오는데 이들이 어떤 의미인지를 모른다면 받아들이는 감정이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텍스트 해석은 텍스트 자체에 내재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맥락 및 해석자의 맥락과 연동한다는 의미이다.)

마무리도 잘 했다고 느꼈다. 구질구질한 청승이 아니라 영화의 전체적인 색깔로 잘 마무리했다.

‘정상’가족이라는 배제의 폭력

수업 예습에세이로 4월 4일에 쓴 글. 일종의 리뷰와 같은 성격이지요.
이재경씨의 논문은 여기로라고 하고 싶지만 알아서 찾으세요. 자꾸 깨지네요. 힛.
5월 2일까지 네 편의 소논문을 써야하는 상황이라 좋으면서도 조급한 몸인 상태.
어제 즐긴 영화 리뷰는 내일로. 흑흑.

1. 이재경 <한국 가족은 ‘위기’인가?: ‘건강가정’ 담론에 대한 비판>
― ‘정상’가족이라는 배제의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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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수업 시간에 “가족”에 대해 배우면서 독신은 가족이 아니라 가구란 얘길 듣고 당황했다. 비록 자취란 형식이긴 하지만 스스로를 가족으로 부르고 있었기에 독신 혹은 혼자 사는 사람은 가족이 아니라 가구라고 표현한다는 말은 기존의 가족개념을 어떤 식으로 구성하는지를 새삼 느낄 수 있는 경험이었다.
이후, 이른바 “건강가족법”이란 것이 생긴다는 얘길 들었을 땐, 경악했다. ‘건강’가족이라고? 그렇다면 루인은 “병든” 가족이란 얘기야? 비록, 기존의 이성애혈연가족주의에서 겪은 폭력적이고 억압적이 분위기를 겪으며 가족제도를 비판하고 독신‘가족’으로 살고 있지만 동시에 트랜스/이반(정체성)으로서 가족 구성권은 쟁취할 권리이기도 하다. 이런 루인의 경험에서 ‘건강가족(법)’이란 의미는 뭘까.

(학부 시절 수학을 전공하며) 모든 정의(定義, definition)는 승인과 배제 그리고 고착시키려는 욕망의 표현이라고 느꼈다. 정의한다는 건, 경계를 만들고 그리하여 사회에서 ‘승인’하려는 범주와 그렇지 않은 ‘비정상’적인 범주를 나누는 행위이며 법제화는 이런 욕망을 명문화 한 것이라고 의심한다. “건강가정기본법”이라는 것 역시 이런 정의/법제화의 구조에서 그렇게 벗어나 있지 않다. ‘건강가정’/‘건강가족’이라는 표현 속에 이미 어떤 특정한 형태의 가족구성만을 ‘정상’적인 형태로 간주하고 그렇지 않은 구성은 ‘건강’하지 않은 비‘정상’으로 간주하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때, 어떤 형태를 ‘건강’하다고 말할 것인가와 이렇게 정의(배제)할 수 있는 권력은 누가 가지는가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누가 무슨 권력으로, 그리고 왜 무슨 이유로 특정 가족 형태만을 ‘건강’하다고 명명하고 이를 통해 그런 가족구성에겐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다른 ‘가족’ 형태를 배제하려는 이유는 뭘까. 이런 이데올로기는 어떻게 해서 지속하는 걸까.
‘현실’적으로 별로 존재하지 않지만 “당연”히 절대 다수라고 착각하는 이성애혈연가족 외에도 무수한 가족 구성이 존재한다. “가족해체”를 우려하는 언설들은 이렇게 이데올로기/판타지로서의 가족형태와는 다른 구성을 가족이 아니라 ‘결여’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결손가정문제”, “편부모 가정에서의 비행청소년 문제”등과 같은 인식들은, 한부모 가족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문제가 아니라 “그런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들에겐 문제가 있을 거란 주변의 시선-정상가족이데올로기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임에도(즉, 이른바 “건강가족”이 문제의 원인임에도) 해결방안으로 제시하는 오류에서 생기는 “문제”며 인식이다.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서 결혼하고 살기 위해선 맞벌이가 필수이고 이로 인해 때로 “주말부부”나 “기러기 가족”이 생기는 건 ‘필연’이지만 “건강가족(법)”은 이런 경제적이고 계급적인 문제를 무시하는, 가족이 모여 살수 있는 특정 계층만을 감안하며 동시에 그 계층적 특성을 ‘보편적 기준’으로 제시하는 셈이다.
혼자 사는 독신가족은 가족이 아니라 가구라고 표현해야 한다는 언설은, 잠깐 혼자 떨어져 살고 있을 뿐 결국 “돌아갈” ‘진짜’ 가족은 따로 있으며 혼자 사는 사람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인식을 전제하고 있다.

“건강가족법”은 그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은 가족을 구성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동성 간의 결혼은 인정할 수 없다”고 법으로 선언하고, 트랜스는 사실 상 결혼 자체를 할 수 없는 상황이며, “장애인이 왜 결혼하려고 하느냐”고 말하는 것이 ‘현실’이다. 모든 사람은 가족을 구성해야 한다는 건강가정 기본법의 법조항 제8조1항(주1)의 인식은 모든 사람이 가족을 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주2)할 뿐 아니라 이런 질문 자체를 은폐/배제하(려)는 논리다. ‘이성애’ 비‘장애’인의 경험만을 반영하며 현재의 “가족 문제”의 원인을 해결로 제시하려고 할 때, “가족 해체”는 더 심해질 뿐이다.

주1: “모든 국민은 혼인과 출산의 사회적 중요성을 인식하여야 한다”가 그 내용이다.
주2: “모든 국민은 가족을 구성해야 한다”는 모든 사람은 가족을 구성할 수 있다는 전제가 있을 때만 성립할 수 있다고 느낀다._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