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남자의 유통기한/비행기 납치범, 레일라 카흐레드/밀리언 달러 블랙 다이크

제8회 서울여성영화제
2006.04.07.18:00 아트레온 1관, [내 남자의 유통기한], 1층G-8
2006.04.07.21:00 아트레온 1관, [비행기 납치범, 레일라 카흐레드]/[밀리언 달러 블랙 다이크], 1층I-8

#[내 남자의 유통기한The Fisherman and His Wife]
작년 제 7회 서울여성영화제때, 선택한 영화의 특징은 상당수가 다큐멘터리라는 점이었다. 딱히 다큐멘터리 장르를 좋아하는 건 아니고, 다만 드라마라면 언젠가 극장에서 상영할 가능성이라도 있지만 다큐라면 그럴 가능성이 별로 없기에 이 기회에 다큐나 실컷 즐기자, 였다. 하지만 이런 결정은 곧 아쉬움으로 남았는데, 선택한 다큐들이 좋았지만, 드라마를 통한 쾌락을 즐길 순 없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작년 상영작 중 가장 매력적인 작품이라 꼽히는 상당수를 놓쳤다.) 그래서 이번엔 드라마를 일정 이상 선택하겠다고 다짐했고 그러다보니 대부분을 드라마로 채웠다.

[내 남자의 유통기한]은 바로 이런 이유로 선택한 작품이기도 하다. 드라마를 선택해야겠다는 강박이 덜했다면 지나쳤을 가능성도 컸다. 지나쳤다면 아쉬웠을까? 글쎄, 아마도 반반이지 싶다. 우선, 이 영화, 재밌다. 일테면, 잉어들이 얘기를 나누는데, 남편 역의 잉어가, 어떻게 첫 눈에 반할 수가 있느냐고, 당신은 왜 첫 눈에 반했냐고 묻자, 아내 역의 잉어가, 그땐 당신에 대해 잘 몰랐으니까, 라고 대답한다. 이런 식으로 영화는 속 시원하게 해주는 장면들과 ‘이성애’ 관계의 두 사람이 부부가 되고 어떻게 소통하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들 ‘이성애’ 부부는 기존의 젠더 역할을 뒤바꾼 듯 아닌 듯 행동하고 있는데 이 과정, 현대사회에서 기존의 ‘남성’ 중심으로 이루어진 사회와 가족제도에서 ‘여성’이 직장에 나가고 ‘남성’이 가사노동을 하는 관계들이 어떤 식으로 소통을 할 것인가를 질문하고 있다.

감독의 대답은? 열려있다. 어떻게? 밝히면 스포일러가 되니 비밀.

하지만 이 영화에서 아주 불편한 지점들이 나온다. 감독은 아니라고 했지만, 루인에겐 일본(동양)인에 대한 감독의 타자화하는 시선이 선명했다.

#[비행기 납치범, 레일라 카흐레드Leila Khaled Hijacker]
이 영화, 최고다. 애초 이 영화는 선택하지 않았는데 루인의 흥미는 [밀리언 달러 블랙 다이크]였고 두 편을 묶어서 상영하기에 봤을 뿐이다. 하지만 이 영화, 최고다. [시리아나]와 비슷한 질문구조에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시리아나]와는 비교도 안 되게 잘 만들었다. 아, 물론 드라마는 아니고 다큐멘터리.

감독이 직접 말하지 않지만 루인이 던진 질문은, 기존의 언어는 누구의 입장을 반영하는가, 이다. 얼마 전 한겨레에서 했던 정희진 선생님의 특강과 닿아있다.

우선, 레일라는 테러리스트라도 젠더가 얼마나 중요하게 작동하는지를 말한다. “테러리스트”로 영국에 잡혔을 때, 기자들이 한 질문은 “키스는 해 본적이 있냐?”, “섹스는 해봤냐?”와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비록 나이 든 레일라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우상과도 같은 존재지만 젊었을 때의 레일라에 대한 기억은 얼마나 매력적으로 생겼는가, 이다. 실력이 아니라 섹슈얼리티로 환원해서 판단하는 장면.

이 다큐의 문제의식은 감독과 레일라의 충돌에서 드러난다. 감독은 레일라를 그래도 문제가 있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냐고 묻고 레일라는 자신을 “자유의 투사”로 명명하며 되묻는다. 도대체 “테러”의 정의(定義, definition)를 누가 하느냐고. 미국이나 서유럽 사람들, 이스라엘 사람들에겐 레일라가 테러리스트겠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겐 자유의 투사이다. 이 말을 접하며 한국의 일제식민지 시대가 떠올랐다. 한국의 한국사 교과서엔 윤봉길이나 유관순들을 독립투사로 기록하고 있고 당시에도 그런 의미였지만 일본의 입장에선 반란이었고 폭동이었다. 누구의 입장에서 정의하느냐가 언어의 의미를 바꾼다. 다큐를 진행하는 내내 감독이 가지는 혼란 역시 이 지점이다. 팔레스타인 출신이지만 스웨덴에서 전쟁의 고통 “없이” 살았던 감독은 테러는 곧 사악한 폭력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레일라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만나면서 이런 믿음이 흔들리는 걸 경험한다.

감독은 어린 아이들에게 전쟁 훈련을 시키는 건 문제가 아니냐고 묻는다. 한국 언론에서도 자주 등장하는데, “테러범”들의 “비인간”적인 모습을 부각하기 위해 어린 아이들도 총을 들고 다니며 군사훈련을 받고 있는 사진들. 하지만 이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동일한 환경에 있다는 착각에서나 가능한 환상이며 이런 환경에 처하게 된 상황의 원인과 맥락을 묻지 않는 방식이다. 자신이 살던 땅이 침략당하고 자신의 가족들이 “적”들에 의해 학살당하고 있고 자신도 언제 그런 상황에 놓일지 모르는 상황인데, 왜 어린 아이들도 군사훈련을 하느냐는 질문을 던지는 건, 무지를 넘어 폭력이다. 서유럽 혹은 미국 같은 나라에서 주장하는 아동에게 최고라고 주장하는 환경 자체를 박탈하고선 왜 이런 환경을 갖추지 않느냐고 되묻는 건, 횡포일 뿐이다. 가진 자의 권력 과시 말고 다른 어떤 말을 붙일 수 있을까?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주로 한다고 간주하는 “테러”의 방법 또한 마찬가지다. 그전까지 이스라엘과 서유럽, 미국 등이 행한 폭력에 아무리 항의해도 그 어느 언론도 보도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겪는 일은 세상에 “없는” 일인 셈이다. 결국 선택한 방식은 테러였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듣게 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비행기 납치였다. (레일라의 말처럼 사람들 누구도 다치지 않았다.) 이때,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저항이 무조건 폭력적이라고 나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왜 “평화”적인 방법이나 “대화”를 하지 않고 “극단”적인 방법을 쓰느냐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기득권을 가졌거나 자신의 위치를 읽고 싶지 않는 사람이거나 저항해서 목소리를 내는 행위를 시기하며 상대도 자신처럼 침묵하길 요구하는 사람이거나. 루인은 비행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과연 “무고하”고 “아무 잘못 없는” 사람들인가에 회의한다. 모를 수 있음, 고민하지 않음 역시 권력이고 폭력이기 때문이다. 발포 명령자만 처벌하면 그 명령을 시행한 사람은 아무 잘못이 없다고 말 할 수 있을까? 그런 만행을 방관한 사람들에게 아무 잘못이 없었다고 말 할 수 있을까? 회의한다. (이와 관련해서 제주4.3이나 광주5.18을 떠올리고 있다. 전두환과 몇몇 지휘관만 처벌하면 그만일까? 총을 쏜 군인들은 그냥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니 아무 잘못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광주나 제주도에서 “빨갱이”들이 난동을 일으켰다며 욕한 다른 지역 사람들의 행동은 묻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전두환이 비자금 문제로 재판장에 섰을 때, 루인이 접한 부산 사람들의 반응은, “그래도 전두환이 인물이지”라는 식이었고, “우리는 진짜 빨갱이가 폭동을 일으키는 줄 알았다니까”라는 식으로 회피하려고만 했다. 이런 반응을 접한 루인에겐, 회의적이다. 또한 지율 스님의 단식 방법, 언설들이 이런 맥락과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모든 언어는 특정 누군가의 경험을 반영한다. 그 경험에 토대를 두고 있는 언어로 질문하고 판단하는 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 같다.

아직 두 번 더 상영할 예정인 이 영화, 강력 추천작이다.

#[밀리언달러 블랙 다이크A Knock Out]
이런 이유로 정말 즐기려고 했던 [밀리언 달러 블랙 다이크]는 그냥 무난하게 지나갔다. 인터뷰 장면에서 ‘게이'(미국에서의 의미로 ‘동성애’자)라고 밝혔지만 이 지점은 그렇게 부각하지 않고 있다. 스포츠마케팅에서 ‘여성’이 어떻게 상품화되는지, 이런 상품화에 저항하면 어떻게 퇴출되는지를 주로 드러내고 있다. 요즘의 루인이 기득권자와 저항자의 ‘폭력’이 가지는 의미의 간극/간격을 몸앓고 있고 그래서 [레일라]에 빠졌지만, 이 다큐도 충분히 재밌다.

*[내 남자의 유통기한]처럼 이 다큐 역시 한국어 제목이 영어와 많이 다르다. 다큐를 시작하고 제목이 나오면서 알았는데, 결국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따라한 것이었다.

서울여성영화제, 시작

개막식은 어제했다지만, 루인에겐 오늘부터 시작이다.

애니메이션 한 편 한 편, 장 ․ 단편 따로 치면 26편, 시간표로는 10타임. 주말은 아트레온에서 살 것 같다. 여기에 이 기간동안 [나나], [빨간 모자의 진실], [크래쉬]를 즐길 예정이니 일주일 사이에 13타임, 29편의 영화를 접하는 셈이다. 헉, 이렇게 적으니 일년 치 몰아서 즐기는 것 같다. 하지만 안다. 이런 시절이 있다. 어떤 땐 몇 달이고 영화관에 안 가는가 하면 어떤 땐 일주일에 몇 번이고 영화관에 간다. 그냥 이런 주기가 있는 것 같다.

작년엔 영화를 접하고 중간에 시간이 남으면 玄牝으로 돌아가서 영화평을 쓰기도 했지만 올해는 힘들 것 같다. 월, 화 이틀간 대학원 수업이 있어서. 다행이라면 읽을 텍스트가 적다는 것. 화요일 수업은 안 할 수도 있었지만 아쉽지는 않다. 등록금이 얼만데 휴강이란 말이냐!

다만 지금 조금 피곤한 것이 아쉽다. 오늘 새벽 2시 넘어서 잤으니까. 그래도 좋다. 신나는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고통과 상처로 변태하는 시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라고 쓰고 나서 수업커뮤니티에 들어가니 휴강하고 영화 보란다. 대신 다음날 있는 특강에 오란다. 앗싸! (이봐이봐, 위에서 적은 말과 반응이 너무 다르잖아;;;;;;;;;;)

[시리아나]: 기득권자와 저항자의 ‘폭력’, 그 간극

2006.04.05. 20시 25분. 아트레온. [시리아나]
※스포일러 없을 듯.

새 학기를 시작하고 얼마나 지났을까, 등록금인상과 관련한 총학의 대자보와 현수막을 접했다. 대학원에 입학하며 등록금 및 입학금 때문에 포기할까를 고민했던 루인이기에 좋은 결과를 기대했다. 하지만 얼마나 지났을까, 총학생회장을 비롯한 몇 명이 단식을 시작했다는 자보를 접하고 아픔을 느꼈다. 결국 이렇게 투쟁으로 가는가. 이제 남은 방식은 이 뿐인가.

단식을 한다는 대자보를 접한 며칠 후, 이른바 “대학생들을 위한” 매체에서 관련 기사를 실었다(정확한 이름은 모르겠다). 학기 초만 해도 ‘평화’롭고 즐겁게 가더니 결국 단식이나 삭발 등으로 “과격”하게 투쟁을 하고 있다는 기사였다. 이 기사를 접하고 불편함을 느꼈다. “과격”하다고? 이 신문은 누구의 입장에서 누구를 위해 기사를 쓰고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대학생을 위한” 매체란 표제아래 총장으로 상징하는 교직원들을 위한 신문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과격”하다니, 누구의 입장에서 “과격”하다는 걸까. 모든 저항은 기득권자와 그 기득권이 다수의 권력/권리이며 사회를 안정화하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과격”하다. 모든 저항은 “과격”할 수밖에 없다.

일전에 상대방의 ‘폭력’에 기분이 나빠 며칠이 지나서야 불쾌함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던 적이 있다. 어떻게 되었냐고? 루인이 사과해야 했다. 상대방은 기분 나쁘면 진즉에 자신에게만 조용히 말하지 왜 블로그와 같은 “공론”의 장에서 떠드느냐고, 오히려 자신이 피해자라고 상처받았다고 말했다. 기분 더러웠지만 결국 루인이 사과했다. 어떻게 소통하고 어떻게 말할 것인가와 함께 누구에게 문제제기를 할 것이냐는 중요한 문제이다. 성폭력 사건과 관련해서 피해경험자가 자신의 피해 사실을 공개하는 순간, 가해자는 명예훼손이니 인권침해니, 역고소니 하며 오히려 자신이 피해자라고 호들갑을 떤다. 분명 발화해야할 문제이지만 때론 이렇게 피해경험자를 가해자로 취급하는 일이 발생한다. 권력의 불균형 상황, 기득권자에게 도전하는 저항자의 모든 행위는 “과격”하기 마련이며 알아듣지도 못할 사람에게 항의/저항하는 건 언제든 피해경험자, 저항자가 가해자로 둔갑하는 일이 된다. (“넌 왜 그렇게 과격하니?” “상대방의 입장도 생각해줘야지.”)

하지만 기존의 언어 내에서 기득권자와 주류 이데올로기를 위협하지 않는 방식으로 저항하기는 불가능하다. “왜 그렇게 쿨하지 못하냐”,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해라”와 같은 언설들 속에서, 기존의 언어로 저항하기란 결국 기득권자의 “배려”와 “관용”을 ‘구걸’하는 방식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저항자, 피해경험자들이 가지는 죄책감은 (“좀더 ‘평화’롭게 할 수는 없는 걸까”, “왜 이렇게 과격한 걸까”) 기득권자, 가해자들의 권력/위치와 동일시하기에 생기는 것이다. “왜 그렇게 과격하냐”란 말은 권력과시/자랑일 뿐 반응할 만한 가치가 있는 내용이 아니다.

[시리아나]를 즐기며, 이런 몸앓이를 했다. “4마일”, “2마일”이라고 말하고 나서 나오는 장면에선 순간적으로 쇼크를 받았고 의자에서 뛰어올랐다. 누군가는 잔해도 없이 죽고 누군가는 악수를 하며 축하한다. 작은 보트를 타고 유조선을 향해 돌진하는 장면에선 눈을 감았다. 다행히 곧바로 장면이 전환했지만, 너무 아팠다. 누가 ‘더’ 폭력적인가. 영화를 통해선 미국이 ‘더’ 폭력적이라고 말하기 쉽지만 살아가는 일상에선 어떨까.

기득권자, 가해자는 치고 점령하지만 저항자, 피해 경험자는 치고 빠진다는 리영희씨의 말이 떠올랐다. 치고 빠지는 전략은 “비겁한 것”이 아니라 권력의 불균형 상태에서 각자가 구사하는 언어의 의미가 차이가 있음을 의미한다. 저항자들이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은 이렇게 “과격”할 수밖에 없다.

올 초였던가, 한 신부가 농민투쟁이 “과격”해지는 건 언론 탓이 크다는 발언을 해서 각종 언론에서 보도했던 적이 있다. 루인은 이 신부의 지적에 타당한 측면이 있다고 느꼈다. 기득권자(대다수의 언론을 포함)들이 정해준 선에서 투쟁/저항을 하면 무시하지만 그 선을 넘어서면 “과격한 농민투쟁”이란 식의 제목으로 언론에 실린다. “무력투쟁”이니 “과격하다”느니 하면서 온갖 소란과 호들갑은 다 떤다. 어떤 과정이든 농민들의 요구사항은 묵살되지만 적어도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그냥 앉아 고분하게 죽지는 않겠다는 의사를 드러낼 수는 있다는 점에서 “과격”할 수밖에 없다.

농민 투쟁으로까지 갈 필요도 없다. 어느 집단인지 밝히면 탈맥락적으로 인용하면서 왜곡할 가능성이 크기에 밝히진 않지만 루인이 지지하는 집단에선, 한 ‘이성애’자가 이반queer 관련 얘기를 꺼내자 다른 한 ‘이성애’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듯이 들렸다며 불편함을 토로하고 이반/트랜스 관련 얘기를 하기 싫다는 감정이 일정 사람들에게 공명했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다. 하리수와 같은 트랜스의 출현은 단 한 명이라도, 언론에선 성정체성의 위기니 어쩌니 하며 호들갑이다. 말세라느니, 곧 신의 천벌이 있을 거라느니 하는 식의 언설은 코미디가 아니라 심심찮게 접할 수 있는 일상이다. 10대 이반 관련해서 그나마 조금은 가시화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대부분은 (‘이성애’) 성정체성 확립에 혼란을 주니 위험하다며 자퇴를 종용하는 분위기다. 저항자의 발화는 그 내용이 어떤 것이든 “폭력적이고 위협적”으로 기득권자들에게 다가간다.

기득권자의 폭력과 저항자의 ‘폭력’은 그 내용과 의미가 다르다. 이를 동일시하는 행위는 위험할 뿐 아니라 자신의 기득권을 놓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루인에겐) 늦은 밤, [시리아나]를 접하며 이런 흔적들이 떠올랐다.

※사람 얼굴과 이름 기억을 잘 못하는 루인이기에 영화 초반엔 좀 헤맸다. 하지만 다시 접하기엔 힘들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