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분양!

일전에 적었듯, 책 분양 들어가요. 헤헤.
하지만 반드시 주의할 사항은 헌책방에서 산 책들이기에 결코 깨끗하다고 할 수가 없어요. 때론 누군가의 밑줄 흔적이 있을 수도 있고 때론 새책방에서 산 책 보다 더 깨끗할 수도 있고. 이건 순전히 운의 문제예요. 헤헤.
신청 방법은 언제나 그렇듯 선착순. 예전엔 “다 줘!”하면 다 드렸지만 이젠 그러지 않을래요. 좀더 필요한 사람에게로 가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서요. 우선은 신청부터 해주세요.
문제는 오프라인으로 알고 지내는 경우는 별 상관이 없지만 온라인으로만 알고 지내는 경우겠죠. 이곳, [Run To 루인]을 통해 자신의 수신 주소를 적을 수 있을 정도의 신뢰가 있는가의 문제가 있으니까요. 그럴 수 있다고 결정하신 분만 나중에 주소를 적어주세요. 뭐, 선착순이라 신청이 곧 확정이니까, 루인의 답글이 달리면 다시 비밀답글로 주소를 적어 주시면 이랑 종이매체와 함께 우편으로 보내드릴게요.
뭐, 아직 리플 한 번 안 달았다고 해서 뻘쭘해 하지 마세요. 루인에게 겹치는 책을 나누려고 하는 것일 뿐이거든요.

책 목록은

안드레아 드워킨 [신에게는 딸이 없다Mercy](1993, 고려원) : 루인은 이 책을 읽다가 다 못 읽었던 흔적이 몸에 있어요. 아파요. 단, 출판사 정보를 잘 확인 하세요;;;
폴 러셀 [The Gay 100 – 2](1996, 사회평론) : 두 권짜리 책인데 첫 번째 책은 없고 두 번째 책만 있어요. 역사 속의 ‘동성애’자들을 소개한 책이죠.
권혁범 [민족주의와 발전의 환상](2000, 솔) : 최근 [여성주의 남자를 살리다]란 책을 낸, 스스로를 “남성 페미니스트”로 명명하는 권혁범씨의 책이에요. 뭐, 이 책은 페미니즘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다면 없다고 할 수도 있고요.
캐럴 J. 아담스 [프랑켄슈타인은 고기를 먹지 않았다](2003, 미토) : 현재 한국에서 접할 수 있는, 채식주의 페미니즘 이론서로는 거의 유일하다 시피 한 책이에요. 미국에서 1990년대 초반에 나왔고 지금의 루인이나 루인과 함께 세미나를 한 나무님에겐 비판을 받고 있는 책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채식주의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 쯤은 읽을만 해요.
준비에브 브리작 [난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1997, 황금가지) : 소설인데, 아파요. 거식증과 관련한 책이고 거식증과 관련해서 많은 추천이 있는 책이기도 하고요. 루인은 이 책을 읽고 브리작에 푹, 빠졌어요.
김연자 [아메리카 타운 왕언니 죽기 오분 전까지 악을 쓰다](2005, 삼인) : 제목을 클릭하면 정희진 선생님이 쓴 서평이 나와요.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어요.
파스칼 로즈 [제로 전투기](1999, 열린책들) : 작년 1월 초, 이 책을 읽고 한 동안 우울에 푹, 빠졌어요. 그런 책이에요.
스코트 펙 [거짓의 사람들](1997, 두란노) : 역시 클릭하면 정희진 선생님의 서평이 나와요. 예전엔 좀더 보기에 괜찮은 사이트가 있었는데 지금은 찾을 수가 없네요.
박완서 [너무도 쓸쓸한 당신](1998, 창작과 비평사) : 루인은 박완서 선생님이라고 불러요. 어차피 아는 분은 다 알 테니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어요.
엘리자베스 김 [만 가지 슬픔](2001, 대산) : 어떤 페미니스트는 이 책과 정희진 선생님의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를 읽고 여성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했어요.

사랑을 빙자한 폭력: 욕설을 하지 않는 이유

사랑이란 이름을 빙자한 폭력들이 있다. 일테면 (초, 중, 고등) 학교 선생들이 행사하는 “사랑의 매”라고 불리는 폭력과 가족이 그렇다. 중학생 이후, 루인에게 가족은 언제나 폭력적인 느낌으로 다가왔기에 “가족주의를 지향 한다”는 말은 폭력을 아무렇지 않게 행사하겠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삼성의 광고 문구 중에 “또 하나의 가족”이란 말이 있는데, 꽤나 끔찍하게 다가온다. 적어도 루인에게 이 말은 역효과다.) 물론 루인의 이성애혈연가족이라고 24시간 내내 폭력적인 분위기는 아니지만, 가족이란 이름으로 행하는 폭력에 항상 노출되어 있었다. (물론 요즘은 영악해서 이를 역이용하기도 한다;;;)

어제, 사무실에 있다가 루인은 왜 욕설을 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래서 했던 대답이 욕설에의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이라고, 스스로도 부끄러운(수줍은) 대답을 했다. 하지만 사실이다. 이성애혈연가족주의에서 들은 욕설들에의 트라우마, 그것이 루인이 욕설을 하지 않게 했다. 작은 욕설이라도 들으면 일종의 공포를 느끼기 때문에.

아무리 화가 나는 경우에도 욕설은 효과적인 대응이 아니라고 몸앓는데, 그건 루인이 “쿨”하거나 성숙해서가 아니라 이런 경험 때문이다. 결국 이런 경험이 한편으론 자원이 된 셈이랄까. 화가 났을 때 욕설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식으로 표현할 언어를 찾으니까. 이런 의미에서 “그건 폭력이에요”라는 말은 루인이 하는 가장 심한 ‘욕설’인지도 모른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 폭력이란 말은 사람마다 그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이럴 땐 참 애매하다. 뼈가 부러질 때까지 구타가 있어야 폭력이라고 명명하는 사람과 공포 분위기 혹은 참을 수 없이 숨 막히는 분위기만으로도 폭력이라고 명명하는 사람, 권력을 이용해서 강제를 행사하는 것, 상처가 될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폭력이라고 명명하는 사람, 등 다양하다. 그래서 루인도 늘 폭력적이다.

다른 해석들: 지식 독점의 위험

권력은 ‘무지’를 통과하지 못하지만 ‘무지’가 공포/권력을 만든다. 알지 못할 때, 앎에의 접근이 제한되어서 누군가 말해주는 내용만을 믿어야 하는 무지의 상황에서 권력이 발생한다.

번역과 권력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어제 그토록 ‘유명’한 프랑스 페미니스트 작가/철학자의 글을 읽으면서. 그 작가는 ‘유명’해서 페미니즘을 조금이라도 공부하면 한 번은 듣고 지나가지만, 루인도 수업 시간을 통해 몇 번은 들었지만 글을 직접 읽은 적은 없었다. 오늘있는 수업 텍스트였기에 며칠 전부터 읽었을 따름이다. (이름을 밝히지 않는 건, 이 글 주제와 별로 상관없기도 하지만, “○○ 읽어봤다~!”하는 식의 무식을 떠벌리는 자랑이 될까봐. 그렇잖아도 무식한데 이런 식으로 무식을 과시하면, 흑;;;, 비참해진다.) 글을 읽으면서, 중얼거린 건, 자국어인 한국어 외에 다른 외국어를 안다는 것, 그리고 한 가지 번역본만이 아니라 다른 번역본도 같이 접한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를 실감했다.

물론 작가는 프랑스 사람이고 프랑스어로 글을 썼기에 루인이 간신히 읽을 수 있는 영역본 또한 번역자에 의한 번역/해석일 뿐이다. 프랑스어로 쓴 글을 영어로 번역했고 그 번역본을 읽으니 결국 중역하는 격. 하지만 프랑스어로 쓴 글을 한국어로 번역한 책 역시 한국어 번역을 다시 해석/번역해야 하는 상황이라 그다지 차이가 없었다. 어차피 모든 해석은 중역이니까.

그리고 이런 상황에 안도했다. 지금의 시대가 오직 한국어 번역문만 접근할 수 있고, 그래서 번역자의 번역 내용을 “진실”이라고 믿어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얼마나 끔찍했을까. 지식을 가진 자, 지식에의 접근권을 가진 자가 권력을 가지는 상황이 발생했을 것이고, 한국어로 번역한 텍스트를 읽다가 아무리 읽어도 비문 혹은 오역 같아도 문제제기가 불가능했겠지.

인터넷을 통해 세상이 좋아졌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독점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얘기하고 싶다. 일전에 이차텍스트에 대한 불신을 적은 적이 있는데 딱 이런 경우였다. 물론 한국어 번역자의 번역이 잘 된 부분이 없진 않지만, 영어와 놀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는 루인의 수준에서도 영어로 읽는 게 편했다면 말 다한 거 아닐까.

번역 자체가 어떤 언어를 사용할 것인가의 문제이며 그래서 저자의 내용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번역은 반역이 아니라 해석이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번역자의 입장/위치에 의해 내용을 구성하기 마련이다)의 문제이며 이는 다른 자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글을 어떤 내용으로 알릴 것인가의 문제이다. 만약 대한민국이란 나라에 프랑스어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 영어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각각 한 명씩만 있다면 그 나라에서 생산하는 텍스트의 내용은 그 사람의 해석에 의해서만 읽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그 사람은 사실 상 절대적인 권력과 권위를 획득한다(실제 이런 상황은 비일비재하다). 이건 단순히 그 사람이 권력과 권위를 획득한다는 것 이상인데 다른 사람의 해석을 차단하며 다른 해석을 애시 당초 발화할 수 없게 하고 다른 상상력을 통제하는 끔찍함이다. 의심할 수 없고 번역자의 해석을 믿을 수밖에 없기에 생기는 끔찍함. (이런 끔찍함이 학제에선 너무도 비일비재하다는 거, 너무 끔찍하지 않아?)

너무도 매력적인 텍스트를 두 가지 번역본(영어와 한국어)으로 대조해서 읽으며 이런 몸앓이를 했다. 물론 그 텍스트 자체에 대한 해석은 다른 텍스트와 연결해서 더 풍성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즐거움도 느꼈다.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