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올바름이란 조롱거리

“정치적 올바른”이란 말을 자주 접한다. 어떤 사람은 판단 기준으로 사용하겠지만 루인은 이 말을 조롱의 의미로 사용하는 편이다. “정치적으로 올바르기 위해 안달하네”로. 물론 루인이라고 “정치적 올바른”이란 강박에서 자유로운 건 아니지만 이 말을 너무너무 싫어한다.

기본적으로 “정치적 올바름”은 언어가 아니다. “올바름”의 기준이 없는 상황에서 이 말은 성립할 수가 없기에, “사진 촬영 금지”란 팻말 옆에서 사진 찍는 것처럼 언어가 아니라 그냥 무의미한 무엇일 뿐이다. 동시에 “정치적”이란 말과 “올바른”이란 말은 애초 양립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정치적”이란 말 자체가 이미 특정 지향을 내포하고 있는데, 어떻게 “올바를” 수가 있겠느냐고.

“정치적 올바른”의 가장 큰 문제는 그로 인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으며 말을 한다면 오직 하나의 목소리 밖에 낼 수 없다는 점이다. 모든 언어는 특정 누군가의 경험을 반영할 뿐이기에 필연적으로 다른 누군가의 경험을 배제한다. [Run To 루인]에도 몇 번 적었듯, 어떤 사람은 시각 경험이 없기에 “보다”는 말이 자신의 경험을 배제하지만, 어떤 사람은 시각이 없으면 자신이 존재하는지 조차 알 수 없기에 “보다”는 경험과 삶을 설명하는데 필수적인 언어이다. 이런 상황에서 누구의 경험으로 언어를 구성할까? “정치적으로 올바르”기 위해선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님, 그 집단에서 최고의 “타자”라도 찾아서 그 사람의 경험과 말을 기준으로 삼을까? 인종, 계급, 집단, 나이, 젠더, 섹슈얼리티, 성적 지향 등등의 경계로 해서 무조건 커밍아웃하게 해선 가장 “타자”를 선정하고 그 사람의 말을 사용할까? 이런 발상 자체도 말이 안 되는 코미디지만, ‘장애’인 ‘이성애’ 흑인 남성과 비’장애’인 이반 백인 여성이 있다면 누가 더 “타자”야? “정치적 올바름”이란 말 자체가 성립 불가능하고 실현 불가능한 판타지일 뿐이다. (앞서 말한, “올바름”의 기준이 없는 건 이래서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말이 불편한 이유는, 이 말이 특권을 과시하고 싶어 안달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반queer은 “정치적으로 올바르”기 위해 이반인권운동을 할까? ‘장애’인은 “정치적으로 올바르”기 위해 ‘장애’인권운동을 할까? 트랜스는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싶어서 언어를 모색하고 운동을 할까? “정치적으로 올바르”기 위한 행동을 하는 건 결국 그럴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거나 어떤 형태로건 기존의 제도에서 이득을 보고 있음을 과시하는 격이다. 물론 “정치적으로 올바르”려고 하는 사람은 그런 의도가 아니라고 하겠지만 언제 의도를 따졌냐고(모든 “의도”는 선하기 때문에 “의도” 따위엔 흥미 없다). 받아들이는 루인으로선 짜증나고 부아가 치민다고.

그리하여 그냥 자신의 위치에서 말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는다. 한국인은 미국 흑인 작가의 작품이나 유럽의 백인 작가의 작품에 대해 비평할 수 없느냐면 그렇지도 안잖아. “정치적으로 올바르”기 위해선 비평이 불가능하지만 한국인이 미국 흑인 작가의 텍스트를 비평하는 건 다른 지역, 다른 맥락으로 살아온 경험을 통해 ‘다른’ 읽기를 할 수 있기에 비평이 가능하다. 어떤 지점에 대해 말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이성애’ ‘여성’으로서 읽기, ‘레즈비언’ ‘남성’으로 읽기, 트랜스 이반 ‘장애’인으로 읽기 등등. 관건은 이런 해석을 유일한 해석으로 간주하며 다른 해석을 “틀렸다”고 매도하는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것. 이렇게 읽을 때에야 비로소 대화가 가능하고 다양한 목소리가 가능하다고 몸앓는다. “정치적 올바름”은 본질주의이기에 개개인을 변할 수 없는 존재가 화석화하고 그 사람의 경험을 절대적으로 간주하여 대화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이랑 종이 매체 발간

2006.03.25. 저녁, 이랑의 두 번째 종이매체를 발간했다. 늦은 시간까지 시간이 되는 이랑들이 모여 열심히 인쇄한 종이를 분류하고 스템플러로 찍고 테이프로 붙이고 깔끔하게 정리하고, 이렇게 해서 두 번째 종이책이 나왔다.

작년, 2005년 9월 20일 이후 6개월 만이다. 그때도 종이책이었다. 달라진 점은 판형이 커졌다는 거? 그땐 A4지를 절반으로 접은 모습이었지만, 이번엔 B5로 찍었다. 표지 합해서 총 15장. 인쇄소에 맡길 돈이 없이 직접 프린트하고 호치키스를 직접 찍고, 그 흔적이 보기 안 좋으니 종이테이프로 직접 붙이고. 그렇기에 더욱 애정이 간다.

물론 아쉬움도 있다. 루인의 글 중, 사실 별로 안 좋아하는 그래서 싣고 싶지 않은 글이 실리기도 한 것. 어떤 글을 실을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적었던 점은 많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건 이후 매체 발간에서 얘기하고 고쳐가야 할 지점이다. 그래도 매체는 예쁘게 나왔다. 담엔 좀 더 멋진 모습으로 나올 수 있을까.

4명이서 인쇄 작업과 마무리 작업을 끝내고, 사장님♡은 일이 있어 먼저 가서, 셋(쑥, 청연의꿈, 루인)이서 뒷풀이 아닌 뒷풀이 자리를 가졌다. 밤이 늦었고 밥 먹을 곳을 찾다가 마땅찮아 술자리를 가졌다. 뭐, 루인이야 술을 안 마시니 물을 마셨지만. 헤헤.

자리를 파하고 돌아오니 이미 한참 늦은 시간. 수업 준비를 위해 읽을 책이 있었지만 읽기엔 완성한 매체를 다시 들여다보느라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새벽, 속 쓰림에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신경성 위염인가 보다. 대학원 수업의 즐거움과는 별도로 텍스트를 읽어야 하는 강박으로 스트레스를 받았는데(루인처럼 글 읽는 속도가 느림 사람에겐 두 개의 수업에서 요구하는 읽을거리가 너무 많아요ㅠ_ㅠ) 인쇄하는 중에도 책을 읽었는데, 이렇게 신경을 쓰다보니 결국 신경성 위염으로 위산이 입으로 넘어오는 상황이 되었다. 아침도 저녁도 부담 없는 죽으로 해결했다. 지금도 속이 쓰린 상황이지만 그리 심한 건 아니다. 작년엔 거의 이틀간을 위산이 넘어와서 고생했다지.

아무튼 이젠 내일 제출할 발제문을 써야 한다. 부담 없는 발제긴 하지만 그렇다고 대충할 수는 없잖아.

#참, 책 분양은 아마 4월 초 즈음!

“차이에 의한 차별을 반대한다”를 반대한다.

심심찮게 “차이에 의한 차별을 반대 한다”와 같은 글을 읽거나 그런 말을 듣는다. 워낙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싶어 안달하는 시절이다 보니 이런 말 정도는 해야 마치 자신의 “정치적 진보성”을 과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기도 하다. 꼭 그렇지는 않고 보수적이더라도 이 정도 말은 함으로써 적어도 “폭력”에는 반대하는 양식 있는(“인권” 의식 있는?) 사람이라는 어떤 “자격”을 획득할 수 있다고 믿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은 좀 까칠한 상태구나, 싶다. 글에서 티가 팍팍 난다.)

루인은, 이런 언설 모두에 반대 한다. 이런 언설 모두 “차이에 의한 차별”을 하는 사람과 같은 인식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차이에 의한 차별을 반대 한다”와 같은 말들 모두, “차이”나 “다름” 자체를 질문하지 않고 “차이에 의한 차별”을 하거나 “다름을 틀림”으로 간주하는 사람들과 동일한 인식을 하고 있다. “차이”와 “틀림”이 있다는 전제 자체를 인정하고 있다. 그리하여 “차이”와 “다름”을 어떻게 발명하는지, 그것이 어떤 사회적 맥락에서 지속하고 재생산하는지를 질문하지 않는다. 왜 하필 피부색이 머리카락 색깔이나 눈동자 색깔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지는지, 외부성기에 의한 젠더가 왜 이렇게 의미를 가지는지, 왜 안경을 쓴 사람은 “장애인”이라고 부르지 않는지, 등등 왜 하필 그런 “차이”를 발명했는지, 이런 과정에서 누가 이득을 보는지, 어떤 역사적 맥락을 가지는지 등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고 기존의 “차이”를 당연시 한다는 점에서 불편하다. 그래서 때로 이런 언설은 자신의 기득권을 위협하지 않으면서도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는 착각에 빠지기 위한 언설이 아닐까 의심하기도 하다(물론, 이런 의심은 “누가” 이런 말을 하느냐에 따라 맥락으로 이해할 문제다).
(“정치적으로 올바른”은 언어도 아니지만, 특권화한 언설이라는 점에서 조롱거리일 뿐이다.)

물론 “차이에 의한 차별에 반대 한다”는 말의 효용을 모르는 건 아니다. “장애인”차별, 이반queer차별, 트랜스차별 등, 무수한 차별이 횡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언설과 이런 언설을 통한 정책 변화가 분명 일정 정도의 효과를 가지지만, 기존의 사회제도가 바라는 전제를 그대로 안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가진다고 몸앓는다.

“차이” 자체를 질문하지 “차이”를 전제한 “차별에 반대”하진 않는다. (그렇다고 “우리는 모두 똑같은 인간이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이런 언설 역시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언설은 애시 당초 질문 자체를 봉쇄하고 모두를 침묵케 하는 효과를 가진다는 점에서 더 위험하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