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야,

썩지도 못할 낙엽을 밟으며 돌아왔어요. 이젠 썩을 수도 없는 운명으로 변한 것이 자신의 몸을 보는 것만 같이 묘하게 즐거웠죠. 몇 해 전, 몸에 새긴 상처가 아물지 않고 흉터로 변한 것과 닮아 보였거든요.

우리는 항상 서로의 불운을 경쟁했지요. 누가 더 많은 불운 속에 있는지 이야기 하고 ‘내’가 더 불운하다고 더 불운하다고 악다구니하며 지냈죠. 그래요, 우리는 서로의 불운을 멸시하고 그 불운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서로를 감시하는 관계였어요.

바람이 부는데도 뒹굴지 않는 낙엽을 보며 당신을 떠올렸어요. 당신이란 거울 너머 있는 저를 외면하고 싶었거든요. 더 불운해야만 사랑할 수 있다고 믿던 시절이 떠올라요. 그렇게 해서 남은 상처들이 다시 흉터로 남으려고 하네요. 썩을 수조차 없는 몸의 흔적들이 있어요. 실은 썩어가면서 더 선명해지는 흔적들이죠. 변하면 안 된다고 안 된다고 부둥켜안고 매 해 새로운 상처를 덧대고 그렇게 곪아가는 곳에 또 한 번 날을 들이밀고.

당신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요. 몸 한 곳의 욱신거림, 그 욱신거림으로 떠올리는 당신, 그리고 빗장 걸린 마음.

몸 한 곳에 이런 표정으로 웅크리고 있는 자신을 만나요.
당신은 안녕한가요?
전 안녕하답니다.

오델로

일전에 산 전자사전에 오델로란 게임이 내장되어 있다. 복잡하고 순발력이 필요한(혹은 시간 제한이 있는) 게임에 약한 루인이지만 이렇게 시간 제한 없이 약간의 전략(?)만으로 충분히 재미를 즐길 수 있는 게임은 좋아하는 편이다. 물론 기본적으로 게임 자체를 즐기지는 않지만 종종 도피하고 싶을 때, 이 보다 좋은 도피처도 없다.

이런 이유로 요즘 오델로에 빠져 있는데(승률 100%에 달한다, 으하하-_-;;) 그 증세가 좀 심각하다. 어느 강의 시간이든 항상 눈은 칠판이나 강사를 향하고 귀는 강사가 하는 말을 ‘듣고’ 있는데 머리 속엔 오델로 판이 그려지고 어떻게 하면 역전할 수 있을까 하는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렇게 둘까, 저렇게 둘까 마구마구 고민하다 보면 강의 중이란 사실은 잊고 다른 공간으로 이동해선, 아차, 이런 상황은 불가능하지, 라는 깨달음과 함께 다시 강의 중인 공간으로 돌아오는 상황을 반복.

으흐. 거의 모든 상황이 오델로로 환원되는 찰라! -_-;;

(지금도 인터넷에서 오델로 프로그램을 찾고 있었다;;;)

갑작스런 결정

[월래스와 그로밋]을 처음 만난 건, 아주 오래 전이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우연히 TV를 보다 단편 3편을 묶은 시리즈를 방영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챙겨봤었다. 무엇이 [월래스와 그로밋] 시리즈에 그렇게 끌리도록 했을까. TV을 거의 안 보는 루인이기에 우연히 만난 인연(!)이 몇 있다. TV를 자주 본다면 인연이라고 안 했을 텐데 정말 우연히 TV를 보다가 오래 기억에 남는 프로그램을 만난 일은 신기할 따름이다([델리카트슨가의 사람들]도 이런 우연의 인연으로 봤다).

이런 인연인지 몇 장 없는 DVD타이틀 중엔 [월래스와 그로밋](3편의 단편 모음)과 [치킨 런]이 있다. 그리고 이번에 개봉한 [월래스와 그로밋 : 거대 토끼의 저주]도 사야지, 했다.

아침에 샤워를 하다, 내일 아침에 영화관에 가야겠다고 중얼거렸다. 영화관에 가는 일도 오랜만이지만 아침 일찍 갈 테니 주변 사람들로 인해 불쾌할 일이 없겠지 하는 기대도 한다. (아침 9시에 하는 [유령신부]도 재미있겠다 싶다.)

헌데 무엇이 이 영화에 대한 매력을 불러일으키는 것일까. 보고 나면 알 수 있을까. 예전과는 다른 몸을 가진 지금의 루인에게 이 영화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