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비우스시간

시간이 뫼비우스 띠와 같다면, 빙빙 돌면서도 여기가 어딘지 궁금하겠지.

한 걸음 내디디면 옆 자리는 낯설게 움직이고 새로운 시간이 몸을 휘감겠지. 한 걸음 옆으로 옮겼을 뿐인데, 여기는 안쪽, 저기는 바깥쪽. 이렇게 얼토당토않은 말 같지만 그렇게 느껴지는 시간의 길을 걸어가고 있어.

한동안 너의 이름이 옆 자리에 놓여 있다고 믿고 살았어. 그 옆자리는 어디일까 묻지도 않고 그냥 옆 자리에서 함께 한숨쉬고 있다고 믿었지. 그러나 옆으로 고개를 돌리면 너는 어디에도 없고 고개를 돌리고도 한참을 헤매서야 비로소 너는 내가 있는 곳과는 너무도 다른, 반대편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하지만 그 반대편이란 건, 어디가 출발점이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단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는 말이기도 해.

꼬인 시간을 따라 한 바퀴 돌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지도 모르지만 그렇다면 어디서 시작하는 걸까. 어디서 새로 시작하고 싶은 걸까, 혼자 중얼거리다가, 두 달 차이가 나는 너와 나의 생일, 그 두 달 차이가 엄청난 경험의 차이를 만든다고 말한 너의 말이 떠올랐어. 12월생과 2월생의 경험, 4월생과 6월생의 경험은 어떻게 얼마나 다른 걸까.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너의 말을 중얼거리다가 다시 꼬여버린 시간을 타고 이 자리에 섰는데 이 자리가 아까와 같은 자리인지 다른 자리인지는 모르겠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그냥 너의 이름을 옆에 두는 것만으로도 이별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걸까. 휘어진 기억의 선로를 따라가다 보면 매번, 같은 곳에서도 다른 순간들을 만나게 된다는 말이 하고 싶은 걸까. 가을이어서 울고 싶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너가 보고 싶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걸까.

[#M_ 참고.. | 정말?.. | 미분기하에서의 뫼비우스 띠 해석을 토대로 한 상상력이에요, 한 점에서의 방향성이 띠를 따라 돌다보면 반대 방향으로 바뀐다는._M#]

11월이 오나보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긴 오나보다. 아침마다 몸이 아프도록 찬 공기에 잠이 깨고 그 찬 공기에 다시 잠이 든다. 그렇게 목이 아프고 잠들기 전엔, 전에 없이 기침을 하곤 한다. 아침과 잠들기 직전에만 기침을 하고 목이 아프고 다른 시간엔 멀쩡하거나 그냥 그런 상태로 지내는 날씨, 예전과는 다른 식으로 만나는 겨울인가 보다.

내일이면 11월이고 루인이 좋아하는 계절이다. 11월처럼 서서히 추워져 가지만 그렇다고 너무 춥지도 않은 날씨, 온도, 그런 느낌들. 11월 아침의 쌀쌀한 느낌이 좋다. 유일하게 좋아하는 계절이 11월이다.

일주일가량 그냥 칼칼한 느낌의 목을 과일의 기운으로 잘 지냈지만 오늘 새벽, 잠에서 깨어났을 정도로 찬 기운 속에서 기침을 했다. 새벽 4시 30분. 잘 깨지 않는 시간에 깨어났고 11월부터 켜야지 했던 보일러를 가동했다. 다시 잠이 들었고 알람 소리에 눈을 떴을 땐, 그래도 조금은 따뜻한 상태. 학교에 갔다 돌아와도 바닥에 온기가 남아 있는 걸 보면 얼마나 찬 바닥에서 지내온 것일까. 스스로 놀라면서 이젠 따뜻한 바닥에서 몸을 녹일 수 있는 계절이 돌아왔고 외출하면 찬 바람에 머리가 맑아질 것 같은 계절이 돌아왔음을 실감한다.

오늘 라디오 디제이들은 유난히도 10월의 마지막 날임을 강조한다. 왜일까? 루인에겐 이제 11월이라는 사실이 기쁘고 겨울이 온다는 사실이 설레지만 또 다른 의미론 그렇잖아도 외출을 좋아하지 않는 루인으로선 더더욱 玄牝에서 뒹구는 삶이 되겠지.

당신, 찬 가시야

당신을 기억해요. 기억하면 무엇 하겠느냐고 중얼거리면서도 떠오르지 않는 당신을 기억해요. 그러니 기억을 헤집어 본들 무엇 하겠어요. 실체는 없고 막연한 그리움만 그리고 있는 걸요.

토요일답지 않게 잠시 외출을 했어요. 이렇게 나갔다 왔다고 해서 별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 예요. 그냥, 바람이 많이 차서 헝클어지는 머리카락에 짜증이 조금 났었나 봐요. 그러니 무심결에라도 당신을 떠올릴 시간은 없었어요.

요즘 쓰고 있는 글을 보며, 조금씩 두려워하고 있어요. 왜 이렇게 위험한 날을 세우고 있는 것일까, 하고. 신랄함은 비판 받기 두려운 이의 행동이라고 했던가요. 어쩌면 그런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이렇게 날이 잔뜩 서 있는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자신의 몸이 말하는 언어를 듣고 쓰는 글이라지만 종종 그런 몸앓이들이 지나치게 날을 세우고 있다면, 스스로도 치치기 마련이죠. 소통을 막고 싶어 하는 몸이 지금을 채우고 있어서 일까요? 아니면 소통을 바라면서도 그 ‘피곤함’이 자기방어를 하고 있는 걸까요? 알 수 없지만, 이런 알 수 없음은 알고 싶지 않음과 얼마나 차이가 날런지.

당신이 있는 곳엔 바람이 부는지 궁금했어요. 이런 궁금함도 일시적인 스침이지 별다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랍니다. 그러고 보면 루인 역시 무관심 속에 둘러 쌓여있다는 몸앓이가 외출 중에 들었어요. 이 “무관심”은 흔히 말하는 그런 무관심과는 의미와 맥락에서 차이가 있긴 하지요. 그럼에도 루인이란 사람이 참, 무관심 속에서 살고 있구나, 하는 몸의 반응을 느꼈어요. 스스로 만든 일이니 그 누구에게 말 하겠어요. 그저 이렇게 중얼거리며 제 삶의 한 단면을 다시 한 번 확인할 따름이죠.

따지고 보면, 소통이라는 일도, 참 피곤한 일이예요. 자신을 돌볼 여력마저 없을 땐, 다른 사람과 소통하기가 참 힘들어요. 그래서 자기애는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일이예요. 스스로를 사랑할 때 에야만 비로소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으니까요. 일방적인/강제적인 희생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 마련이죠.

요즘 쓰고 있는 글들에 날이 가득한 모습을 보며, 무엇이 이토록 스스로들 지치게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무엇이 두려웠기에 이토록 신랄하게 말하고 싶어 한 걸까…

그래서 당신을 가만히 불렀어요. 당신, 하고. 이렇게라도 당신을 다시 불러들이지 않으면 스스로를 다독일 수 없겠구나, 했거든요. 그러니 화내지는 말아주세요. 아직도 이렇게 살고 있다고 혹은 당신을 이용했다고… 그저, 당신이란 이름이 너무 좋은 걸요.

죄송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