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젠더화, 외모.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면서…

이번 달에 다 읽기로 한 영어 책이 이제 4쪽 가량 남았다. 낮엔 해야 할 일들이 있어, 저녁에 한 시간 정도 읽으면 다 읽을 거 같다. 다 못 읽을 거 같아 걱정이었는데, 요 며칠 힘껏 달렸더니 간신히 다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읽은(?) 혹은 읽고 있는 책은 Reclaiming Genders: Transsexual Grammars at the Fin de Siecle로, 1990년대 후반, 트랜스젠더와 관련 있는 책들이 한창 출판되기 시작하던 무렵 나온 책이다. 특징이라면 영국에서 활동하는 트랜스젠더 이론가/활동가들이 편집했고, 영국과 미국에서 활동하는 이들의 글들이 실려 있다는 점이다. 1990년대 중후반 즈음 트랜스젠더/트랜스섹슈얼과 관련해서 중요한 논문모음집이 많이 나왔는데, 이 책은 그 중에서도 두드러진 편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내가 좋아하는 필자들의 글이 많이 실려 있어 반갑다는 게 더 정확한 평일까?

이 책엔 편집자 중 한 명인 케이트 모어(Kate More)가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를 인터뷰한 글도 실려 있다. 이 글도 꽤나 괜찮다. 무엇보다도 내가 읽은 글에서 나타난 버틀러는 글을 쓸 때 어느 정도 감정을 자제하는 경향이 있는데 반해, 인터뷰에선 직접 표현하는 부분들이 상당하다. 일례로 “나는 ~~을 혐오한다.” “그건 정말 아니다.”란 식이다. 이게 인터뷰를 읽는 매력이기도 하다.

인터뷰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Judy”와 관련해서다. 버틀러의 경우 워낙 유명하고 인기 가 있어서, 팬진이 있을 정도인데, 팬진의 이름이 “Judy”다. 내가 팬진의 이름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건, ‘역시 버틀러야!’였다. 팬진이 있을 만하다고 느꼈고, 팬진을 구해서 읽고 싶어 종종 구글링을 하기도 했다. 물론 구할 수 없었지만.

하지만 버틀러는 Judy란 이름에 느끼는 불편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것은 Judy란 이름이 상당히 여성적인 뉘앙스이며, 사람들이 종종 “Ju~~~dy”라고 부를 때 나타나는 여성화 때문이다. 즉, Judy라는 이름은, 버틀러가 실천/수행하고 있는 규범적이지 않는 어떤 젠더를 규범적 ‘여성’의 틀로 환원하는 역할을 한다. 사람들이 버틀러에게 느끼는 불안을 Judy란 이름을 통해, “결국 여성”으로 만들려는 욕망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버틀러는 자신에게 유머감각이 없다고 비판한다 해도, Judy란 별칭이 내키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나는 이 표현이 나의 어떤 경험과 닿았기에 내 몸에 울림을 줬다. 나 역시 어떤 특강에 가고 나면 비슷한 얘길 듣는다. 처음엔 ‘이성애 남성’처럼 여겨지는 이가 단상에 올랐는데, 그 자리에서 말하길 자신이 ‘레즈비언 트랜스’란다. 어떤 이들은 나의 일시적인 범주화를 부인하며 계속해서 ‘이성애 남성’으로 이해하려 든다. 또 다른 이들은 내가 ‘트랜스’란 부분에만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또 여러 반응이 있지만, 그 외의 무수한 반응을 직접 얘기해 주는 이들이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 아무튼, 나를 ‘트랜스’로 이해하기 시작한 이들은 강의가 끝난 후, 내게 다가와 “가까이서 보니 눈이 예쁘다.” “예쁘게 생겼다.”는 식의 말을 한다. 오프라인으로 날 아는 이들이라면 이 말이 사실이 아니란 걸 알 테다. 트랜스여성은 “여자보다 예쁜” 존재란 이해가 만연하단 점에서 “예쁘다”는 식의 수식어는 “트랜스여서다움”을 지시한다. 나의, 소위 남자같은 부분은 “예쁘다”는 말 속에서 부정되거나 은폐된다. 버틀러가 Judy에 느꼈을 불편함이 나의 불편함과 비슷한 것만 같아, 공감하면서 읽었다. 그래서 부끄럽기도 했다. Judy란 이름의 의미를 고민하지 않고 너무 간단하게 고민했다는 점이.

누군가의 외모를 특정 젠더 혹은 특정 범주로 수렴하는 언어들은 만연하다. “결국 여성” 혹은 “결국 남성”이란 표현은 ‘나’의 다른 가능성들을 모두 지워버린다는 점에서 개인들의 삶을 상당히 불편하게 만든다. 조금 다른 상상력은 어떻게 가능할까?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여성’에 대한 차별이 굳건한 현재 사회의 이분법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다른 상상력이 가능할까?

5월 중순에 긴장감 백배인 발표자리가 있는데, 그 자리에서 이 고민을 공유하고 싶다. 얼마나 잘 할 수 있을까? 자신은 없지만, 일단 해보는 거다. 뭐, 어떻게 되겠지.

“Your life, take two.”: 성형수술, 체중감량수술, 성전환수술의 모호한 ‘경계’

“Your life, take two.”

위의 구절은 어느 광고의 카피라고 한다. 그것도 무척 유명한!(난 얼마 전에 알았다.) 이 카피를 이해하는 핵심은 “take two”다. 음악인들이 곡을 녹음할 때면 한 번에 끝내지 않고 여러 번 녹음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 처음 녹음한 버전을 take one, 두 번째 녹음한 버전을 take two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런 표현은 ㅅㅌㅈ를 통해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럼 위의 광고 카피, “Your life, take two”를 어떻게 번역할 수 있을까? 당신의 삶, 두 번째? 당신의 삶, 다시 시작하기? 당신의 삶, 부활? 어느 번역도 충분하지 않다. 이 모든 의미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당신의 삶을, 마치 처음처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의미일 테니까. ‘리셋’으로 이해해도 괜찮을 거 같다.

그럼 이 광고 카피는 어디에서 사용했을까? 이게 중요하다. 이 카피는 체중감량수술 지면광고에 등장했다고 한다. 위(胃)의 크기를 줄이는 것과 같은 방식의 체중감량수술을 통해 ‘다시 태어날 기회’를 잡으라며, “Your life, take two”를 사용했다고 한다. 의미를 파악한 순간, 난 곤혹스러웠다. 광고카피로서 이보다 절묘할 수 있을까 싶으면서도 유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분이 무척 복잡했다. 과연 성형수술과 체중감량수술, 그리고 성전환수술을 구분하는 경계는 어디일까? 트랜스젠더들에겐 성형수술이 성전환수술의 일부란 점에서 둘을 구분하기 힘들다는 의미만이 아니다. 많은 경우, 비트랜스들의 성형수술이나 체중감량수술 역시 ‘여성’되기, 다시 태어남과 같은 수사를 사용하고 있다. 동일한 수식어를 사용한다고 같은 의미일 수는 없다. 비트랜스여성이 성형수술을 통해 ‘여성되기’를 경험하는 것과 mtf/트랜스여성이 (성형과)성전환수술을 통해 ‘여성되기’를 경험하는 것을 동일한 경험으로 수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전자는 형에서 언니로 전환하는 과정은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면 후자는 ‘하리수’ 같아도 여전히 형으로 남는 경우가 많다. 성을 바꾼다는 것에 상당히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사회에서, 성전환은 성형보다 좀 더 부담스럽고, 널리 시행되기 어렵다.

그렇다고 성형수술이나 체중감량수술이 성전환수술보다 덜 중요하거나, 덜 심각한 것도 아니다. 어느 쪽이건 어떤 규범적인 몸/젠더 되기란 점에서 유사한 위치를 점한다. 성형수술, 체중감량수술, 성전환수술은 모두 사회에서 말하는 ‘여성’과 ‘남성’이라는 것이 실재 존재할 수 없는 허구라는 걸 폭로한다는 점에서 각자가 그리는 지형도는 유사하다. 외과수술을 통하지 않고, 소위 ‘자연미인’이 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을 감안하면, ‘소위 말하는 여성’, ‘소위 말하는 남성’이라는 식의 표현 방법, ‘소위 말하는’이란 수식어를 은폐한 ‘여성’과 ‘남성’은 모두 굉장히 협소한 범주이자 실재하기 힘든 기이한 범주다. 그런데도 이 셋은 동일하다고 말하자니, 껄끄럽다. 그래서 상당 부분 겹치고 어느 정도만 겹치지 않는다는 식의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 셋을 간단하게 구분하기 꺼리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성형수술이나 체중감량수술은 성(섹스, 젠더)이 바뀌는 경험이 아니라고 단언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영화 『미녀는 괴로워』에서도 잘 나타나듯, 성형수술과 체중감량수술 역시 젠더 경험의 변화를 겪는다. 이 변화 경험을 성전환수술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단언할 근거는 무엇일까? ‘어쨌거나 성형수술이나 체중감량수술은 성전환수술과는 달라!’라고 말하는 건, 자칫 비트랜스의 젠더를 고정된 것으로 여길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마치 트랜스젠더의 젠더만 특별하고 비트랜스젠더의 젠더는 단일하고 동일하다고 가정하는 것처럼. 주민등록상의 성별을 바꾸고자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 외에, 이들 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수 있을까? “Your life, take two”란 구절은 성전환수술 광고에 사용해도 큰 문제가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또 얼마나 복잡한 고민을 해야 할까? 아, 아직도 부족한 나를 책할 뿐이다. ㅠ_ㅠ

남성성, 성형수술, 몸 변형 실천의 의미

성형수술하면 떠오르는 텍스트는 영화, [미녀는 괴로워]네요. 무척 좋아하는 영화죠. 성형수술이 젠더 변형/성전환수술과 매우 밀접하다는 걸 알 수 있는 작품이에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한나/제니(김아중 분)를 놀리는 이들이, 그의 차에 “인조인간”이라고 쓴 낙서는 의미심장하죠. 다른 여러 텍스트들을 상기시켜요. 트랜스젠더의 이미지, 소설 『프랑켄슈타인』 등등. 수술을 비롯한 의료기술을 통한 몸 변형은 개인의 존재를 기이하고 낯설게 만드는 효과를 낳죠. 이 효과는 매우 특수한 이들만이 의료기술에 관련 있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의료기술에 무관한 존재로 여기도록 하고요.

성형수술을 하는 이들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이미지도 강한 것 같네요. 그리고 이럴 때 성형수술의 이미지는, “할 수도 있지”라면서도 여전히 부정적인 거 같아요. ‘타고난 몸의 아름다움을 부정하고 가부장제가 요구하는 몸 규범에 맞추는 실천’이라고 비난하기도 하죠. 성형수술을 선택하는 건 ‘주체적인 실천’이라는 주장을 허위의식이라 매도하면서요. 다른 한 편, 성형수술을 비롯한 몸 변형 실천을 아름다움의 의미를 스스로 재구성하는 실천이라고 주장하는 입장도 있어요. 성형수술이 반드시 규범적 미를 지향하는 실천이 아닐뿐더러, 규범적인 미를 지향한다고 해서 사회적으로 완전하게 용인되는 건 아니니까요. ‘허위의식’과 관련한 주장은, 몸 변형 실천자들을 수동적이고 무력한 타자로만 여긴다고 비판받고 있고요.

이런 고민들의 연장선상에서 어제 읽는 논문은 흥미로워요. 캐나다 ‘남성’들의 성형수술 경험을 연구한 논문이거든요(Michael Atkinson. “Exploring Male Femininity in the ‘Crisis’: Men and Cosmetic Surgery.” Body and Society. 14.1 (2008): 67-87.). 성형수술과 관련한 많은 논문들이 ‘여성’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남성’을 대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부터 흥미롭기도 하죠.

캐나다는 현재 ‘남성성의 위기’ 시대라고 하네요. 페미니즘 운동이 활발해지고, 사회가 ‘여/남’ 평등을 지향하면서 ‘남성성의 위기’가 도래했다는 거죠. 물론 저자는 ‘위기’ 담론에 동의하지 않아요. 사실 세계 어디에서도 ‘남성성’이 ‘위기’였던 적은 없어요. ‘남성성이 위기에 처했다’라는 말들만 넘칠 뿐이죠. 한국에서 1997년 IMF가 터지면서 ‘고개 숙인 아버지’란 말과 함께 ‘아버지/남편 기 살리기’ 운동이 전개된 적이 있습니다. (지난 2월, KSCRC에서 주최한 “남성성” 강좌에 권김현영 선생님도 지적했듯) 문제는 아버지들이 고개를 든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거죠. 역사책을 봐도 알 수 있고, 매 시대 등장한 소설들을 읽어도 알 수 있죠. 모든 시대의 아버지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거나 부재해요. ‘고개 숙인 아버지’란 언설이 IMF 이전의 아버지들은 고개를 들고 살았다는 허상을 (재)생산한 거죠.

암튼, 이 논문은 ‘남성성 위기’라는 언설이 만연한 상황에서 캐나다 남성들이 성형수술을 고려하고 이해하는 방식을 분석하고 있어요. 총 4가지로 분석하는데 제가 흥미로웠던 점은 성형수술을 남성성과 연결시킨 점이었습니다. 앳킨슨(Atkinson)이 인터뷰한 남성들 중엔, 성형수술은 무척 고통스러운 과정이기에 이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친다는 것은 ‘여성적인 행동’이 아니라 ‘남성다움’의 표현이라고 말합니다. 수술을 고통으로 치환하고, 고통을 견디는 행위를 ‘남성성,’ ‘남성다움’으로 이해하는 거죠. 전 이런 해석이 가능하단 점이 무척 흥미로웠어요. 이렇게 말하는 이들이 ‘여성의 성형수술’은 어떻게 이해하는지는 알 수 없지요. 앳킨슨이 질문 했지만 이 논문에선 언급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질문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요. 널리 알려진 언설들에 따르면 ‘여성의 성형수술은 가부장적 의료기술에의 종속’이라고 이해되죠. ‘여성성의 수동적/종속적 속성을 표현’한다는 거죠. 하지만 성형수술을 ‘남성성/남성다움’의 표현으로 이해하는 이들의 입장에 따르자면, ‘여성의 성형수술’은 좀 더 흥미로워져요. ‘규범적인 여성성’을 표현하기 위해 ‘남성다움’을 실천한다고도 이해할 수 있을까요? 🙂

이 논문이 수술의 위험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은 아쉬운 대목이에요. 몸 변형 실천과 관련해서 수술이 건강을 해치는 위험한 행동이라고 주장하는 입장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건강이란 개념 자체를 재구성할 것을 요구하는 실천이라고 주장하는 입장도 있지요. 이 두 가지 외에도 상당히 다양한 논의들이 진행 중이에요. 앳킨슨은 수술과 건강이란 주제와 관련해서 “자신에게 가하는 폭력”이라는 다른 이의 주장을 언급하며 지나가네요. 이 주장에 동의하는 뉘앙스고요. ‘수술과 건강’이란 이슈를 좀 더 폭넓게 다뤘다면 훨씬 흥미로웠을 텐데요. 수술을 고통과 위험으로 이해할 때에만 성형수술이 ‘남성성’ 실천일 수 있긴 해요. 그래도 아쉬워요. 좀 더 다층적인 논의가 가능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죠.

암튼 몸 변형, 신체기술과 관련한 논의들은 너무 흥미로워요. 언제 읽어도 즐겁죠. 비록 충분히 만족스러운 내용이 아니라 해도. 이런 저런 논문을 네댓 편 더 읽고 나면 글을 하나 써야 하는데, 귀차니즘이 발동하려 해요. 이번에도 ‘아, 저 글만 더 읽으면 좀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텐데’라고 회피할까요? 흐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