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kki Sullivan – Queer Material(ities): Lyotard, Language and the Libidinal Body

Title: Queer Material(ities): Lyotard, Language and the Libidinal Body. 여기 (pdf파일임)
Authors: Sullivan, Nikki
Source: Australian Feminist Studies; Mar2002, Vol. 17 Issue 37, p43-54, 12p

오랜 만에 이 카테고리에 글을 쓰면서 왠지 만행을 저지르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착각이 아니겠지요;;;

저자인 설리반(셜리반? 슐리반? 슐리번? 셜리번? 설리번? ;;;)은 이 글을 통해, 현재로선 별로 새롭지 않은-혹은 너무도 진부한, 이분법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어요. 이 글에서 저자가 주로 논하고 있는 사람은 세 명, Jean-Francois Lyotard와 Teresa L. Ebert, Donald Morton인데요, Ebert와 Morton은 역사 유물론주의/마르크시즘과 포스트모더니즘/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을 비교하고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이 초월적이고 “현실”을 모르거나 무시하는 이론이라고 비난하죠. 셜리반은 이런 저자의 논점을 비판하면서 료따르(Lyotard, 료타르? 리오타르? 리오따르? ;;)의 논의를 빌려 이렇게 이분법으로 나눌 수 없다는 것, 언제나 이런 이분법의 논의 구조로는 설명할 수 없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 구조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붕괴시킬 균열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 등을 얘기하고 이렇게 겹치면서도 균열을 일으키는 것을 퀴어물질(성)이라고 불러요. (대충 그렇다는 거지 정확한 설명은 아니에요;;;)

루인이 초점을 맞춘 지점은 몸을 설명하는 부분인데, 단일하고 통합적인 몸이라는 가정은 자본주의라는 특정한 맥락 안에서 발생하는 의미이며, 몸/육체라는 건 여러 요소들을 땜질 하듯이 덕지덕지 붙여 놓은 거라는 구절이죠.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좋아서 많은 망설임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기로 했어요.

셜리번의 자료를 찾으면서, 처음엔 이 글은 안 읽고 이후에 쓴 글들만 읽으려고 했는데, 읽길 잘 한 것 같아요. 이후 셜리반이 논하는 주요 아이디어들의 징후를 찾을 수 있거든요. 그 아이디어는 단어 하나로 적을 수는 있지만 루인도 잘 모르는 단어를 쓴다는 것이 께름칙해서… 뭐, 그렇다고 유물론이니 마르크시즘이니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페미니즘을 아느냐면 그런 것도 아니지만요;;;

아아, 이런 글을 올릴 때마다 공부 못 하는 애들이 꼭 가방은 제일 무겁다고(루인이 정말 그랬어요-_-;;) 꼭 평소에 공부도 안 하고 무식한데 어쩌다가 글 한 편 읽고는 제일 열심히 하는 것처럼 동네방네 떠들고 자랑하는 것만 같아 부끄러워요.. 흑흑.

[영화]미녀는 괴로워: 자기 통합 과정

[미녀는 괴로워] 2006.12.27.20:35, 아트레온 2관 3층 H-7
[미녀는 괴로워] 2006.12.29.19:40, 아트레온 2관 3층 J-15

1.
12.27. : 처음부터 집중하기 어려웠다. 계속해서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러다 나중엔 고통스러웠고 펑펑 울었다.
12.29. : 너무도 다시 보고 싶은 바람이 강했기에 망설임 없이 극장을 찾았다. 하지만 정작 표를 끊었을 땐 두려웠다. 다시 볼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2.
조금 무식한 표현을 빌리자면, 영화를 평가하는 방법 중에 별점으로 표시하는 방법이 있는데, 루인이라면 5개 중 4개 반을 주겠다.

올 초, [청연]이 나왔을 때, 이보다 괜찮은 한국 영화가 더 나올까 했다. 그런 예상을 깨고 [달콤, 살벌한 연인]이 나왔다. 그러니 이제 더 욕심을 내는 건 만행이라고 여겼다. 오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미치도록 좋을 수밖에 없는 영화가 나왔다. ([천하장사 마돈나]가 아니라) 이 영화, [미녀는 괴로워]. 올해 나온 한국 영화의 베스트 3.

올해엔 퀴어queer영화도 참 많이 나왔다. [브로큰백 마운틴]부터([왕의 남자]가 아니라) [메종 드 히미코], [나나], [불량공주 모모코], [그녀의 비밀], [폭풍우 치는 밤에], [다세포 소녀], [음란서생], [라디오 스타], [천하장사 마돈나], [거룩한 계보], [트랜스아메리카].. 대충 훑어도 이 정도(루인이 읽은 영화로만). 하지만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해야 한다. [미녀는 괴로워]. (이 글의 분류를 보세요.) 그리고 올해 나온 퀴어영화 중 베스트 3는 [메종 드 히미코], [폭풍우 치는 밤에] 그리고 [미녀는 괴로워].

물론 한 달 뒤, 아니 일주일만 지나도 이런 평가는 달라질 수 있다. (일테면 루인인 이 영화를 처음 본 후 3일간 김아중 팬이 되기로 했지만, 오늘 완전 무관심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감정으론 너무도 정직한 평가이기도 하다.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있었다면 매일 이 영화를 봤을 테고, 나중에 DVD가 나오면 꼭 소장할 영화이기도 하다.

※이제부터 스포일러 가득!!!
[#M_ 예의상 가림 | 사실은 길어서;; |
3.
처음 이 영화를 본 날, 너무 울었다. 이 영화가 너무도 고통스러우면서도 괴로웠던 건, 바로 수술 전의 자신과 수술 후의 자신을 통합하는 그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루인은 “성형”수술이라고 적지 않고 그냥 수술이라고만 적었다. 맞다. 루인은 이 영화를 트랜스에 대한 은유로 읽었고, 강한나(김아중 분)의 성형수술을 성전한수술로 읽었다. 이건 여러 맥락에서 이런 겹침이 가능하도록 했다.

누군가 이마에 실리콘을 넣어 둥그스름하게 하고 얼굴을 조금 깎거나 콧대를 높이는 수술을 한다면 그건 무슨 수술일까? 대체로 성형수술이라고 분류하지만 만약 이 수술을 루인이 한다면 곧바로 성전환수술이 된다. 성형수술과 성전환수술의 간극은 이 정도이다. 자신을 트랜스젠더라고 여기는 사람이 가슴이나 외부성기가 아닌 몸의 형태나 얼굴 형태를 변형하려고 하는 수술을 하면 그건 성전환수술의 일부라고 분류한다. 물론 자신을 트랜스젠더라고 여기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건 그냥 성형수술이다. 그리고 “이성애여성”의 상[image]이 너무도 제한적인 한국사회에서 한나의 수술은 성형수술이기도 한 동시에 “여성”이 되고자 하는 성전환수술이기도 하다.

4.
“성형”수술을 담당한 이공학은 강한나에게 과거의 모든 흔적을 지우라고 얘기한다. 또한 한나는 바뀐 자신의 몸을 통해 새로운 행동과 관습을 배워야 한다. 사실 이런 지점들은 모두 성전환 수술 과정에서 요구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리고 많은 트랜스젠더들이 실제 그렇게 하고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의사들은, 과거의 경우겠지만, 트랜스젠더들에게 과거의 기록들은 모두 지우고 새로운 과거를 만들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즉, mtf/트랜스여성이라면 “남성”으로 산 경험을 모두 지우고 처음부터 “여성”으로 살았다고 역사를 새로 쓸 것을 요구하며 트랜스젠더가 아니라고 얘기할 것을 요구한다. 물론 상당수의 트랜스젠더들이 자신은 단 한 번도 “남성”/”여성”이었던 적은 없으며 원래 “여성”/”남성”이었다고 얘기를 하지만, 이런 과정 중에 경험하는 내용까지 부정하길 요구하며 처음부터 주민등록번호가 수술 후의 모습이었던 것처럼 행동하고 그런 역사를 가질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영화 중, 한나가 자신의 사진을 태우는 모습을 보며, 아팠다. 바로 이 지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현재의 모습을 자신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 과거의 흔적을 모두 지워야 하는 행위들. 어떤 트랜스젠더는 지금은 트랜스젠더 카페 등에서 활동하지만 법적 성별 변경이 된다면 곧 바로 잠적하고 ‘새로운’/’전혀 다른’ 사람으로 살겠다고 얘기한다. 아니, 남의 얘기할 필요가 없다.

눈치 챈 분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난 9월, 한겨레21에 실은 글을 이곳에 링크하기 전까지 루인은 이곳에서 “성별”이 드러나는 언어를 사용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것이 드러날 법한 모든 언어는 드러나지 않는 언어로 바꾸거나 전혀 다른 식으로 표현하거나. 트랜스라고 커밍아웃을 한 후, 오랫동안 그 이전의 삶을 드러내길 꺼려했고, 더구나 온라인으로만 아는 이들에게까지 루인의 모습이나 외모를 통해 추정하는 “성별”을 밝히기 두려웠다. 그건 루인이 “남성” 아니면 “여성”이라는 성별이분법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 어느 쪽도 아니라고 얘기하는 트랜스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주민등록번호나 그 어떤 외형적인 모습을 통해 추정하는 “성별” 역시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냉정하게 말해서, 인정하고 싶지 않았거나 부정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커밍아웃 이전의 역사를 드러내는 것이 두려웠다. 영화 중간에, “성형 수술을 한 여성은 괴물”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랬다. 루인은 또한 괴물이지만 “괴물”일 수 있다는 사실에 두려워했다.

강한나가 사진을 태우는 모습은 이런 경험을 통째로 불러들였다.

5.
자기부인과 자기 통합.

프로듀서인 상준(주진모 분)이, 제니가 사실은 강한나임을 깨닫고 거리를 두며 가까이 가길 꺼려하는 모습은, 사람들에게 트랜스젠더라고 밝혔을 때의 반응을 떠올리게 했다. 특히나 인터넷 리플을 통해 더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오프라인이라고 해서 별로 다르지 않은, 성전환 수술에 대한 사람들의 끔찍해 하는 반응들이 루인의 몸으로 몰려왔다. 다 좋은데 왜 하필 수술이냐, 성기 수술까지 해야 하냐, 등 수술을 향한 무수한 혐오들. 제니/한나의 깨달음은 이런 사실을 새삼 깨닫게 했다.

제니의 고통은 껴안고 싶은 자신을 껴안을 수 없고 끊임없이 부정해야만 비로소 자신을 ‘승인’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자신의 과거를 지워야 하고 수술 사실을 부정해야 하고 아버지를 부정해야 하고 사랑하는 강아지를 부정해야 하고. 모든 과거를 부정해야만 비로소 현재를 승인 받을 수 있고, 현재의 모습을 ‘인정’받기 위해선 과거를 전부 부정해야만 가능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간극을 매우기 위한 작업이 이 영화의 초점이라고 읽었다. 자신이 사진을 찢는 과정, 콘서트를 열지만 결국 자신의 과거를 말하는 모습, 과거의 영상이 나왔을 때야 비로소 ‘편안’함을 느끼는 모습은 모두 과거의 자신과 화해하고 현재와 과거를 연결하고 이어주는 작업이다.

물론 개인의 경험과 삶이 단선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분열되어 있는 역사를 분열로서 통합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다른 모든 걸 부정했지만 단 하나, 친구와 함께 한 타투(파

이것이 파쿠나마타타 문양
쿠나마타타)를 남겨둔 것은 인상적이었다. 분절한 과거와 연결하는 열쇠이자 문이며 지속하는 삶의 연속선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이 작업,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며 자신의 삶을 말해가는 과정에서 가장 많이 울기도 했다. 그 과정이 얼마나 지난하면서도 고통스럽고 그런 고통을 통해 쾌락을 얻고,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임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럽기도 했다.

6.
두 번째 보면서 깨달은 사실. 이 영화는 점을 보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점성술사는 한나에게 결코 상준과 이어질 수 없다고, 관상에 나와 있다고 얘기한다. 그런데, 영화의 결론에 가면 그것이 ‘사실’임이 드러난다. 자기통합과정을 거치면서 한나는 과거와 같은 그런 감정이나 행동으로 상준을 대하지 않는다. 그리고 상준과 이어져도 “단짝”으로 나오는 정민(김현숙 분)과 이어져도 모두 퀴어관계가 된다.

영화 말미에, 안티팬이 생겼다면서 나오는 장면은 안티팬들이 한나의 차에 낙서하는 모습. 그 낙서의 하나는 “인조인간”이다. 알다시피 “인조인간”이라는 말은 트랜스젠더들에게 많이도 하는 말이다._M#]

※스포일러 끝

7.
이 영화를 본 후, 김아중이 불렀고 영화 속에 나오는 “마리아”를 무한반복해서 듣고 있다(변태고냥 J의 나비날다에 올라와 있어요^^). 또 읽고 싶어ㅠ_ㅠ

Transgender? Transgender!

어제 공동연대 문화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하는 과정에서(비록 루인은 문화제기획단은 아니었지만) 예전에 사용했던 리플렛을 볼 기회가 생겼다. 그곳엔 “Transgender? Transgender!”란 제목의 설명글이 있었는데, 그 내용이 루인이 가장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일테면 트랜스젠더/성전환자는 “정신적인 성과 육체적인 성이 불일치하는 사람”이란 식으로 설명한다거나, 취직, 학교 등에서 얼마나 고통 받고 있는지를 얘기한다거나.

당장 시간이 바쁘다고 하더라고 이건 고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며 두어 번의 수정을 거친 내용이 지금 이 글. “시비조다”, “공격적이다”란 평을 들어서 나름대로 “착하고 순하게” 바꾸는 작업까지 거친 내용이다. 믿거나 말거나. 흐흐.

Transgender? Transgender!

트랜스젠더는 “정신적인 성과 육체적인 성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너무도 ‘쉽게’ 그리고 너무도 자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트랜스젠더/성전환자들이 겪는 ‘고통’과 ‘긴장’은 자신이 인식하는 성별과 다른 사람들 및 사회 제도가 요구하는 성별 사이에서, 바라는 몸의 형태와 호르몬 등으로 변하는 몸의 형태 사이에서 발생합니다. “정신적인 성과 육체적인 성이 일치하지 않는”과 같은 표현은 이러한 긴장과 고통을 성전환자/트랜스젠더 개인의 문제로 돌리고, 그것이 사회 문화적인 맥락에서 발생한다는 걸 은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이 사회에 살며 고통과 긴장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흔히 트랜스젠더/성전환자는 “성별위화감”, “수술 자체의 위험과 부담”, “직업 찾기의 어려움” 등을 겪기에 법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너무도 자주 이런 식으로 우리를 재현했고,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의 고통을 증명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꼭 이렇게 고통을 전시하고, 얼마나 고통 받고 있는지를 호소해야만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꼭 고통을 받아야만, 그래서 피해자나 희생자가 존재해야지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고통을 전시하지 않고, 고통을 얘기하지 않으면서도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운동을 지향합니다. 그리하여 동정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하고, 이러한 소통 과정에서 변화할 수 있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