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주장한다는 것: 협상, 행위성 그리고 저항의 가능성

역시나 딱히 새로 쓸 글이 없으면 예전에 쓴 발제문을 올리는 것이 좋다…는 건 아니고, 그냥 언제나 그렇듯 올리는 거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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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주장한다는 것: 협상, 행위성 그리고 저항의 가능성

루인
2006.11.29.

1. 협상하기
TV나 주간지, 일간지 등에서 읽을 수 있는 트랜스젠더 관련 인터뷰나 기사는 거의 대부분 비슷한 내용이어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한 두 개만 읽어도 될 정도이다. 일테면 어릴 때부터 얼마나 힘들었는지(하지만 “어떤 고통을 경험하는가?”와 같은 질문은 소위 “다른” 삶을 살고 있다고 간주하는 모든 이들에게 똑같이 적용하는 질문이며, “다른” 삶을 산다는 건 힘들며 “남들”처럼 사는 것이 무난하다고 가정하는 태도이다), 자신의 몸을 얼마나 혐오하는지와 같은 내용이 주를 이루는데, 직장에서 쫓겨났다거나 몸의 일부를 도려내고 싶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미국의 경우 1960년대, 1970년대 트랜스섹슈얼들을 “진단”한 의사들은 해리 벤자민이 제시한 트랜스섹슈얼의 정의/증세와 일치한다고 학회나 저널에 보고했다. 19세기 후반, 히스테리를 연구한 한 의사는 히스테리는 몇 가지 단계를 거친다는 가설(假說)을 설정했는데, 그 가설을 발표한 이후 그와 상담한 모든 히스테리“여성”들이 이와 같은 단계를 거쳤다. 짐작할 수 있듯, 미국의 트랜스섹슈얼들은 자신이 원하는 의료과정을 거치기 위해 매뉴얼대로 얘기했고(의사에게 가기 전에 예행연습도 했다고 한다), 히스테리“여성”들 역시 의사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았기에 가설대로 ‘무대에서 상연’했다고 한다.
질문자들이 인터뷰 과정에서 범하는 중요한 문제점 중 하나는, 질문자는 질문자로서의 위치에 있고 답변자는 답변자로서의 위치에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질문자가 “연구자”일 경우엔 질문자는 답변자의 ‘경험’을 지식으로 재단할 수 있는 사람이며 답변자는 “데이터”(“객관적인 사실”)를 제공하는 사람이라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인터뷰interview는 말 그대로 inter-view, 즉 상호 응시, 상호 관찰이라는 의미이다. 인터뷰는 질문자와 답변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답변자로 설정한 위치에 있는 사람 역시 질문자로 설정한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질문을 던지는데, 다만 그 형식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란 형식을 통할 뿐이다. 즉, “질문자”가 구성하는 언어에 맞춰서 “답변자”는 대답할 언어를 구성하는데 어떻게 대답을 해야 상대가 수긍하는지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트랜스젠더로 살면서 어떤 차별을 겪고 있나요?”란 질문에 “직장에서 쫓겨난 적이 있어요.”라고 답하는 건 ‘너는 나에게 얼마나 차별을 경험하고 있는지를 묻고 있으니 이렇게 대답하겠다’ 혹은 ‘너는 내가 반드시 차별을 겪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구나’라는 뜻을 내포한다. 트랜스젠더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라는 사회적인 승인이 있을 때, 트랜스젠더들은 거의 모두가 그런 “승인”에 맞춘 대답을 하기 마련이고 그렇게 말하지 않을 때에도 “승인”에 맞춘 내용만 받아들이고 활자화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인터뷰 자리가 아닐 때, 좀 더 ‘친밀한’ 사람들과 있을 때의 내용은 그것과 다른데 이 말은 어느 말은 진실이고 다른 말은 거짓이란 의미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 어떤 언어를 사용할 것인지 협상한다는 의미이다.

루인의 경우, 가급적 커밍아웃을 하며 사람들과 만나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럼에도 커밍아웃을 하지 않고 있고 어쩌면 영영 하지 않을 집단이 있는데 이성애혈연가족들이 그 집단이다. 많은 퀴어들이 그러하듯, 커밍아웃을 한 곳에서의 행동과 하지 않은 곳에서의 행동 사이엔 상당한 “간극”이 있는데 루인은 루인의 젠더정체성을 상대방에게 명확하게 표현하지 않는 방식을 취한다. 루인이 트랜스젠더임을 모르는 공간일 경우, 상대방이 인식하는/요구하는 젠더로 행동하는데, 주민등록상의 성별이 1번이고 “아들”로 인지하는 가족체계에서 “남성”적이라고 간주하는 행동을 좀 더 부각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적이라고 간주하는 행동을 ‘안’/‘덜’ 하는 편이다. 이른바 “남성”적이라고 말하는 행동들을 하는데 그렇다고 이것이 루인이 ‘트랜스젠더임’을 부정하는 건 아니라고 느낀다. 트랜스젠더라는 걸 모르는 가족과 있을 때, 성전환자인권연대 지렁이에서 같이 활동하는 운영위원에게서 전화가 온다면 루인은 트랜스젠더인 동시에 트랜스젠더가 아닌 것일까(한편으론 그렇기도 하다). 혹은 전화기가 닿아 있는 부분은 트랜스젠더이고 나머지는 아닌가? 어떤 사람은 트랜스젠더가 트랜스젠더라고 밝히지 않는 건 기만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트랜스젠더면서 동시에 트랜스젠더가 아닌’ 루인(의 행동)은 기만인가. 루인이 트랜스젠더란 걸 상대방이 알건 모르건 루인의 행동엔 별 차이가 ‘없는’ 경우가 많은데, ‘같은’ 행동도 사람들마다 자신들이 읽고 싶은 방식으로 해석하며 특정 젠더로 간주한다. 이런 “해석” 역시 루인‘의’ 기만인가.

2. 행위성
자신을 주장하는 것―“나는 트랜스젠더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자신을 단일한 정체성으로 고정하는 것은 아니다.
mtf 트랜스여성의 경우 트랜스여성이 아니라고 불리는 여성들보다 더욱더 여성‘스럽고’ “여성성”을 ‘과잉’체화해야만 다른 사람들이 ‘여성임’을 승인하지만 바로 이런 이유로 여성임이 부인되고 트랜스젠더/트랜스여성으로 각인된다. 자신을 주장하는 바로 그 행동이 자신을 부인한다. 예전에 잠깐 얘기를 나눈 한 CD는 크로스드레서들은 자주 ‘업’하지만 트랜스젠더들은 오히려 ‘자연’스럽게 옷을 입는 경향이 있는 거 같다고 말한 반면 미디어나 어떤 누군가들을 통해 전해 듣는 얘기 속의 mtf/트랜스/여성은 이성애를 강화하는 행동과 ‘여성보다 더 여성스럽게’ 행동한다. 하지만 커밍아웃을 하지 않은 상황에서 처음부터 루인을 트랜스젠더라고 여기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고 “강호동”(이라는 사회문화적인 코드)을 “남성”이 아닌 다른 어떤 성으로 여기고 얘기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물론 반드시 루인에게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의사 앞에서 자신의 외부성기를 혐오한다고 말하는 것, 어떤 장소에서 여성성을 ‘과잉’체화하는 것과 같은 행동은 그 상황에 따른 협상이다. 협상한다는 건, 자신이 위치하고 있는 담론 지형 내에서 어떻게 자신을 주장할 것인가, 하는 전략이며 그래서 맥락에 따라 “모순”처럼 여겨지는 행동(의사 앞에선 자신의 외부성기를 혐오한다고 말하고 친밀감을 형성한 관계와 있을 땐 자신의 외부성기가 주는 쾌락을 말하는)을 하기도 한다.
자신임을 주장한다는 건 자신을 본질적인 정체성/주체로 고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 사회의 맥락에서 자신의 위치를 그리는 작업이며 이를 통해 사회의 담론 구조를 드러내는 작업이다. 이것을 행위성이라고 해석하는 데, 헤크만(Hekman 1995)의 지적처럼 행위성은 “긍정”적인 행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협상하는 행위면서 어떤 행동을 어떤 맥락에서 그렇게 했는지를 읽는 작업이다.

3. “Inside/Out”-이분법을 드러내기
나마스테(Namaste 1994)는 푸코와 데리다의 논의를 통해 “내부/바깥”Inside/Out의 관계를 논하며 그것은 구분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구성하는 관계에 있음을 지적한다. 제도 바깥에 있다고 믿는 모든 것은 제도 내부에 있으며 “반대”라는 설정을 통해 “나”를 구성한다. 그렇기에 “내부/바깥”이란 구분은 그 자체로 이분법인 동시에 딱 잘라 구분할 수 없는 걸 구분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설명 구조는 이런 식의 구분 그 어디에도 들어가지 않는 존재들을 원천 배제한다. 이성애와 동성애라는 식의 설명은 양성애, 트랜스젠더, 간성, 퀴어 등을 ‘존재하지만 부재중’으로 간주한다. 그렇기에 나마스테는 이런 이분법을 거부하는 것이 저항의 공간이라고 말한다.
혹자는 푸코를 읽으며, 결국은 허무주의로 빠져서 죽음 외엔 저항이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저항조차 기존의 담론 구조 내에서 발생한다는 말이 저항 불가능성을 얘기한다고 해석한 듯 하다. 하지만 저항이 기존의 담론 구조 내에서 발생한다는 말은, 한편으론 저항 행위 자체가 저항하려는 대상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공고히 하는 행동임을 의미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그 만큼 지배담론이란 것이 취약하고 틈이 많음을 의미한다. 푸코는 그 사회를 지배하는 담론이 있다고 해서 단 하나의 담론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담론들이 경합하고 있다고 말했다. 헤크만이 모색하고, 나마스테가 말하는 저항의 공간은, 담론과는 무관한 바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담론의 틈, 담론들이 경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균열지점들이다.
“여성성”/“남성성”을 과잉체화해야만 비로소 “진짜”라고 승인하지만 그 승인이 역설적으로 부인/부정(“그러니까 넌 트랜스야”)을 의미하고, 자신을 주장하는 바로 그 행동이 자신을 부인하는 행동이기도 하다는 건, 담론의 틈, 균열지점을 체현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사회제도에 “순응”하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을 “저항 아님”, “행위성 없음”으로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가장 순종적으로 보이는 바로 그 행동이 가장 저항적인 행동인지도 모른다.

#참고문헌
루인, “젠더를 둘러싼 경합들(gender dysphoria):트랜스/젠더 정치학을 모색하며” <여/성이론> 15호 (서울: 도서출판 여이연, 2006)
푸코, 미셸, <성의 역사: 앎의 의지> 이규현 옮김, (서울: 나남, 1990)
Bartky, Sandra Lee, “Agency: What’s the Problem?” in Judith Kegan Gardiner ed. Provoking Agents: Gender and Agency in Theory and Practice (Urbana and Chicago: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1995)
Bell, Shannon, “Kate Bornstein: A Transgender Transsexual Postmodern Tiresias”, http://www.ctheory.net/printer.aspx?id=61(1994)
Broad, K. L, “GLB + T?: Gender/Sexuality Movements and Transgender Collective Identity (De)Constructions”, International Journal of Sexuality and Gender Studies, Volume 7, Number 4 (October 2002)
Devor, H., “Female Gender Dysphoria: Personal Problem or Social Problem?” Annual Review of Sex Research 7 (1997)
Gagne, Patricia and Richard Tewksbury, “Conformity Pressures and Gender Resistance among Transgendered Individuals”, Social Problems, Vol. 45, No. 1 (Feb., 1998)
Hekman, Susan, “Subjects and Agents: The Question for Feminism” in Judith Kegan Gardiner ed. Provoking Agents: Gender and Agency in Theory and Practice (Urbana and Chicago: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1995)
Herdt, Gilbert, “Mistaken Gender: 5-Alpha Reductase Hermaphroditism and Biological Reductionism in Sexual Identity Reconsidered”, American Anthropologist, New Series, Vol. 92, No. 2 (Jun., 1990)
Namaste, Ki, “The Politics of Inside/Out: Queer Theory, Poststructuralism, and a Sociological Approach to Sexuality”, Sociological Theory Vol. 12, No. 2 (Jul., 1994)
Nelson-Kuna, Julie and Riger, Stephanie, “Women’s Agency in Psychological Contexts” in Judith Kegan Gardiner ed. Provoking Agents: Gender and Agency in Theory and Practice (Urbana and Chicago: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1995)
Valentine, David & Riki Anne Wilchins, “One Percent on the Burn Chart: Gender, Genitals, and Hermaphrodites with Attitude”, Social Text No.52/53, Nos 3 and 4, Fall/Winter (1997)
Wilchins, Riki Anne, “Out Of The Binary Zoo”, Lambda Book Report 1997 April (1997)_M#]

[논문]Stone, Sandy – The Empire Strikes Back: A Posttranssexual Manifesto

제목: The Empire Strikes Back: A Posttranssexual Manifesto(Electronic version)
저자: Sandy Stone
발행처: http://www.actlab.utexas.edu/~sandy/empire-strikes-back
발행일: 1993

#루인의 설명
1979년 Janice Raymond는 [The Transsexual Empire: The Making Of The She-male]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레즈비언 페미니스트인 레이먼드는 이 책에서 mtf 트랜스섹슈얼을 비난하며 여성의 몸으로 성전환 수술을 하는 것 자체가 강간이라고 단언한다. 레이먼드의 이런 논리는 향후 (레즈비언) 페미니즘에서 트랜스젠더를 비난하는 효시이자 이론적 근거이기도 하다.
Sandy Stone은 바로 이 책에 대한 비판으로 “The Empire Strikes Back: A Posttranssexual Manifesto”을 쓴다. 1987년에 초판이 나온 이 글은,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부흥하기 시작한 트랜스젠더 정치학(트랜스젠더리즘)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이자 고전으로 자리 잡는다(트랜스 관련 논문이나 책에서 스톤의 이 글을 참고문헌으로 올리지 않은 문헌을 찾기가 더 힘들 정도이다). 이 글에서 스톤은 과거의 mtf 트랜스섹슈얼 4명의 자서전을 분석하며 의료담론과 사회 승인 속에서 트랜스임을 부정하고 수술을 기준으로 남성에서 “완벽한 여성”으로 간다는 식의 기술을 비판한다. 이른바 통과[passing]를 비판하는 스톤에게 통과는 사라지는 것, 역사를 지우는 것이다. 통과가 아니라 자신의 역사를 드러내고, 트랜스로서 얘기할 것을 주장한다. 이것이 스톤에게서의 posttranssexual의 의미이다.
이런 스톤의 지적은 이후, 트랜스젠더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데 중요한 지점이었지만(정말 “선언문”으로서의 의미를 가지지만) 통과담론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가져갔다는 점―성전환 남성이 아니라 원래 남성이라고 얘기하는 이들에게 “통과”는 무엇을 의미할까―, 스톤의 논의가 의도하건 않건 수술과 관련을 맺고 있는 트랜스를 중심으로 얘기하고 있다는 점은 문제점이다.
또한 Bornstein의 글에서도 드러나는 문제이듯, 스톤 역시 트랜스를 젠더 바깥에 위치하는 존재로 두는 문제점을 야기한다. 젠더를 트랜스한다는 것이 젠더와 무관하다는 의미가 아님에도 젠더와 무관한 존재로 간주하는 건, 오히려 트랜스젠더를 타자화 할 수 있다.

[논문]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트랜스”젠더 혹은 “to”에 관한 단상

제목: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트랜스”젠더 혹은 “to”에 관한 단상
저자: 루인
발행처: 이대대학원신문 제54호, http://runtoruin.cafe24.com/tt/index.php?pl=616
발행일: 2006.11.15./2006.11.27.

수업의 일환으로 쓰고 청탁받은 신문사에 기고도 한 글이에요. 하지만 현재 이곳에 공개하는 버전이 현재로선 가장 마지막 버전. 즉, 가장 최근에 수정한 내용이란 의미죠.
편집자의 평가에 의하면 “시론”적인 글이기도 해요.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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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트랜스”젠더 혹은 “to”에 관한 단상
루인runtoruin@gmail.com

#영화를 해석할 때, 스포일러가 일부 있습니다.

1. t
근래에 들어, 특히 지난 6월 22일 대법원에서 성전환자의 성별변경 허가 판결을 내린 이후, 트랜스젠더 혹은 성전환자는 최대 유행어/‘히트상품’으로 자리 잡은 것 같다. 2000년대 초반 하리수씨가 등장했을 때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한 것 같지 않은 분위기다. 차이라면 그땐 그저 TV속에서 보는 “대상”이었다면 대법원 판결 이후엔, 생활 자체를 위협하는 “존재”로 다가왔다는 점 정도랄까. 그래서인지 관련 기사의 댓글엔 “이마에 성전환자라고 낙인을 찍어서 알아볼 수 있게 해라. 모르고 결혼했는데 알고 보니 성전환자면 책임질 거냐. 구역질난다.”와 같은 내용의 글들이 많(았)다.
이런 분위기에서, 학계에서의 관심도 증가했는지, 꽤나 많은 수업에서 한 시간 정도는 할애하고 있다. 특히 법과 관련한 수업에선 학부, 대학원을 가리지 않고 다루는 곳이 상당하고, 꽤나 많은 여성학과 수업에서도 다루거나 언급하고 있다.
이렇게 유행의 물결을 타고 있는 트랜스젠더/성전환자이지만, 정작 트랜스젠더/성전환자는 누구인가, 라는 ‘기본적인’ 논쟁조차도 별로 없는 듯 하다. 물론 연구대상으로만 여기거나 지식을 위한 도구로 전유하는 것은 불편하지만 많은 “관심”들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논쟁조차 없는 상황. 이 말이 “여기까지는 트랜스젠더이고 저기서부터는 아니다”라는 식의 범주와 명명, 정의(定義)의 폭력을 행사하자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트랜스젠더를 얘기하지만 그 언어와 의미에 대해선 별다른 고민을 않고 사용한다는 점을 얘기하고 싶다. 한국에서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트랜스젠더는 의료과정을 경험하는 이를 지칭하는 경우가 다반사고 그래서 “진성 트랜스젠더”라는 말까지 사용하고 있지만, 이 의료과정을 경험한다는 것 역시 성기재구성수술로 제한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사실, 트랜스젠더를 어떻게 범주화할 것인가엔 이론가들마다 다르고 그래서 상당히 논쟁적이다. 미국의 경우, 트랜스젠더 이론가인 본슈타인 같은 이는 젠더 규범을 위반하는 모든 이들을, 그래서 레즈비언, 게이까지 트랜스젠더라고 범주화하지만 이론가에 따라 의료과정을 경험하는 이로 제한하기도 한다. 공동체에 따라서도 크로스드레서를 포함하는 트랜스젠더 공동체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트랜스젠더 공동체도 있다. 어떤 단체는 “여성스럽다” 혹은 “남성스럽다”라는 것을 “위반”하는 이들에게 가해지는 폭력까지 의제로 설정하기도 한다. 이처럼, 트랜스젠더 운동과 이론이 활발한 편이라 쉽게 트랜스젠더를 정의하기 어려운 미국과 달리 한국은 또 다른 의미에서 쉽게 정의하기 어렵다.
하리수가 등장하며 “등장”한(것으로 회자하는) 트랜스젠더란 용어는 성기재구성 수술까지 모두 한 경우로 제한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영향에서인지는 불확실하지만 ftm 커뮤니티의 경우, 게이처럼 하고 다니거나 호르몬도 하지 않은 트랜스젠더는 배제하는 분위기가 있기도 하다. 또한 트랜스젠더가 “트랜스젠더 바”와 같은 의미로도 사용하며 성적 대상으로서의 뉘앙스를 더 많이 포함하기도 한다. 그래서 한동안 트랜스젠더나 트랜스섹슈얼은 레즈비언, 게이와 함께 19세 성인인증을 거쳐야만 하는 검색어이기도 했다. 언어사용 논쟁에서도 주로 트랜스젠더와 성전환자라는 두 용어 사이에서 논의 중이지만 성전환자라는 용어를 트랜스젠더와 동일시하기도 힘들고(트랜스섹슈얼과 성전환자를 동일시하기도 힘들다) 트랜스젠더란 용어가 성전환자보다 반드시 더 포괄적이거나 “괜찮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이처럼 용어와 범주의 문제 뿐 아니라 젠더정체성을 표현하는 방법들도 논쟁 적이다. mtf(male-to-female)나 ftm(female-to-male)과 같은 방식에서부터 트랜스남성이나 트랜스여성, 트랜스젠더 , ftu(female-to-unknown) 등의 표현은 누가 어떤 맥락에서 사용하느냐에 따라 미묘한 혹은 상당한 차이를 가진다. 종종 mtf나 ftm은 의료과정 중에 있는 사람을, 트랜스남성이나 트랜스여성은 수술이 끝난 사람을 지칭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럴 경우 to는 명확하게 규정할 순 없지만 어느 과정 중에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호르몬도 안 하고 있지만 자신을 트랜스남성 혹은 트랜스여성이라고 얘기하는 경우도 많고 성기재구성까지 했지만 mtf나 ftm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많다. 사실 이런 용어들이 미국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그대로 “수입”하면서 발생한 문제들이기도 한데, 그냥 “여성”, “남성”이라고 얘기하던 이들이 트랜스남성, 트랜스여성, 트랜스젠더, mtf, ftm과 같은 말을 들으며, 이로 인해 갈등과 경합을 경험하기도 한다. 젠더경합[gender dysphoria]이 자신의 정체성 때문이 ‘아니라’ 이런 용어들과 불/일치하는 간극에서 발생하는 긴장으로 인한 경합인 경우도 상당한데 그렇다고 성전환자란 단어완 간극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현재로선 자주 사용한다고 할 수 있는 mtf나 ftm의 t는 대체로 to의 이니셜이지만 (그래서 문장 속에서 “from male to female” 혹은 “from female to male”이라고 쓰기도 한다) t를 toward의 이니셜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미묘한 차이에도 대체로 t뒤에 오는 명사로 향하거나 그것을 종착점으로 여긴다는 표현이기도 하고 이런 맥락에서 “트랜스”남성이거나 “트랜스”여성은 수술이 끝난 사람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하는 편이다. (즉, 이럴 때의 “트랜스”는 이미 횡단했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렇기에 이 to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는 또 하나의 논쟁지점이다. to는 명확히 구분할 수 없는 지점에 있는데, 언제까지 m 혹은 f였고 그래서 언제부터 f 혹은 m인지 명확하게 잘라 말하기 힘들고 이 과정의 어디까지가 to인지 명확히 말하기 ‘애매하다.’ 이런 ‘모호함’은 트랜스젠더의 “트랜스”로 인해, mtf나 ftm을 단순히 성기재구성수술을 받지 않은 사람이라고 설명할 수 없게 한다.
트랜스젠더란 용어의 “트랜스”란 말 역시 이런 ‘모호한’ 맥락에 있다. 트랜스젠더는 젠더를 횡단한다거나, 젠더경계를 위반한다는 식의 의미로 해석하는 말들에서(특히 사적인 대화나 수업 중에 자주 접할 수 있는 해석이다) “트랜스”란 용어 역시 to와 엇비슷한 맥락에 위치한다. 트랜스남성이나 트랜스여성이란 말은 트랜스젠더인 남성/여성이란 의미이지만 트랜스란 말 자체가 지닌 “여정”, “횡단”이란 의미 때문에, 트랜스젠더, 트랜스여성, 트랜스남성 역시 “to”의 과정 중에 있거나 경험했다는 의미를 내재한다.
그렇다면 호르몬을 “시작”하지 않은 트랜스젠더 혹은 mtf, ftm은 이제 출발점에 서 있는 사람인지, 그렇다면 호르몬도 수술도 안 하겠다는 트랜스젠더는 어디에 위치하는지와 같은 의문이 떠오른다.
최근 개봉한 두 편의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이해영, 이해준, 2006)와 <트랜스아메리카>(던컨 턱커, 2005)는 이와 관련한 질문거리와 논쟁거리를 제기한다. 트랜스젠더가 젠더를 횡단하기는 하는지, 간다면 어디로 가는지, 도착점이라는 데가 있긴 한지와 같은 의문들 속에서, 이 두 영화는 젠더를 횡단한다(trans)는 말이나 어딘가로 간다(to)는 말을 재현하고 있다.

2. to ‘없는’ 한 순간의 변화: <천하장사 마돈나>
지난 9월 개봉한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는 트랜스젠더를 주인공으로 하며, 최초가 아님에도 최초처럼 회자한 영화이다. 이 영화를 읽기 전, 언론 시사회나 미리 본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호의적이었고 괜찮다는 평이 주를 이루었다. 감동적이라는 얘기도 있었고 “이렇게 척박한 퀴어환경에서, 이토록 훌륭한 퀴어영화가!”(황진미), “젠더경계를 유머로 돌파하는 장사급 시도”(유지나) 라는 평도 있었다. 영화를 읽고 영화관을 나서며 중얼거린 말은 “언론에서 왜 그렇게 이 영화에 호의적인지 알겠어”였다. 이 영화는 누구나―“정치적인 올바름” 따위에 관심이 없어도 트랜스젠더에게 호의적일 수 있게끔 그리고 있다. 그래서 너무도 “편하고”, “휴먼드라마”로 받아 들여도 무방한 영화이다. 이 영화를 읽으며 많은 지점에서 울었고, 떠올리고 싶지 않은 몸의 흔적들이 많이도 떠올랐지만 마냥 좋게 읽을 수도 없었다.
주인공이 수술비를 모으고 주변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 영화는 그래서 정신과 의사와의 상담 과정은 어떠한지, 호르몬 과정에서 겪는 몸의 변화는 어떤지, 수술경험은 어떤지 등을 전혀 다루지 않고 있다. 모든 트랜스젠더가 호르몬이나 성전환 수술을 경험하는 건 아니지만, 수술이 중요한 의제이고 자신을 설명하는 방법 중 하나일 때, 이것이 빠져있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호르몬을 시작하고 “남성” 혹은 “여성” 어느 쪽으로도 모호한 모습일 때, 주변 사람들은 혼란과 불안을 겪으며 때로 혐오폭력을 행사한다. 비단 주변 사람들만의 ‘혼란’ 뿐 아니라 그토록 원하는 스스로도 회의를 경험하기도 한다. 이런 경험들이 이 영화에선 고스란히 빠져있다.
많은 영화들이 영화제목을 영화 시작할 때나 끝날 때 보여주는 편이지만 상황전환의 의미로 제목을 보여주기도 한다. <천하장사 마돈나>의 경우, 영화 제목은 상당히 후반부에 나오는데 영화가 거의 끝날 즈음 씨름에서 이기고, 클럽에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 사이에 나온다. 씨름에서 이겨 상금을 받은 후 영화 제목이 나오고 나면 수술한(수술했다는 점은 감독이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 오동구가 노래하는 장면이 나온다.
많은 트랜스젠더들이 자고 일어나면 몸이 변해있었음, 하는 바람을 품는다. 잠에서 깨면 원하는 몸의 형태를 가지길 바라는 욕망. 물론 실현 불가능한 환상이지만 바로 그래서 더 절실한 바람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이 장면(제목이 나오는 장면)은 바로 이런 환상을 포착하고 있다. 트랜스젠더들의 수술 과정을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바람과 의료과정의 지난함을 하루아침에 바꾸고 싶어 하는 욕망이 겹치는 장면이다.
그래서 이 영화엔 “트랜스”과정이나 “to”는 ‘부재’한다. 의료과정을 경험 하는 트랜스젠더들에겐 중요한 지점이지만 그 과정은 사라지고 그래서 트랜스젠더의 삶은 연속적인 어떤 경험이라기보다는 (부재하는)수술과정을 기점으로 한 순간에 변한다. 비약하자면 수술을 통해 과거를 지우고 “새로운” 사람이길 요구하는 담론들을 떠올리게 한다. 수술은 무수한 과정의 하나일 뿐 수술을 했다고 몸의 느낌이 단절적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고 영화 또한 관계 속에 주인공을 위치 짓지만, 제목으로 사라진 “to”의 과정은, “과정이 없었음”하는 환상을 창조한다. 물론 이 영화에 “트랜스”과정이나 “to”의 과정이 “부재”하는 건 아니다. 이 영화에서 그리고 있는 “to”의 과정은 지속적으로 언급하고 있듯 트랜스젠더임을 주장하는 과정이고 그래서 수술비라는 계급/계층의 문제(물론 계급과 계층, 그리고 재산의 정도가 반드시 일치하는 건 아니다)와 주변 사람들과 관계 맺는 방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것만이 전부인가. 의료과정에 있는 몸으로 주변과 관계 맺는 방식을 그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3. 여정에 나선 몸: <트랜스아메리카>
트랜스젠더를 설명하는 말 중엔 “잘못된 몸”―“남성의 몸에 갇힌 여성”, “여성의 몸에 갇힌 남성”과 같은 표현들이 있다. “정신적인 성과 육체적인 성이 다른 사람”도 꽤나 많이 사용하는 표현이다(이런 표현들의 문제점은 루인 2006c 참고). 그리하여 수술이 건, 다른 어떤 과정을 통해서 건, “올바른 몸”으로 가야한다는 논리의 한 근간을 구성한다. 이와 관련해 그것이 고착된 젠더 이분법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불행한 메타포”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이런 표현을 계속해서 사용한다는 건 그것이 트랜스젠더의 경험을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후자의 경우, 트랜스젠더의 변화과정을 이주서사로 설명하며 하나의 몸에서 새로운 몸으로 가는 것, 국경을 넘어가는 것이란 식으로 설명한다.
의사와의 상담 장면으로 시작하는, 영화 <트랜스아메리카>는 호르몬과정에 있으며 성기재구성수술을 앞두고 있는 mtf/트랜스여성의 여정을 그리고 있다. 레즈비언 관계로 만났던 옛 애인에게서 아들이 있음을 알고, 마지못한 상황으로, 뉴욕에서 수술을 받을 지역인 LA로 아들과 함께 여행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이 영화는, 의료과정 중에 있는 몸으로 주변과 관계 맺는 방식을 그리며 젠더횡단과 미국횡단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표현한다.
미국횡단[trans America]과 성전환 수술을 통한 젠더횡단[trans gender]을 동시에 그리는 이 영화에서 여행의 끝은 성기재구성수술이며 그리하여 “여행”은 “진정한 여성”이 되는 과정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 나온 북미 트랜스섹슈얼들의 자서전이나 현재도 나오고 있는 자서전에서 많이 사용하는 이런 여행서사 혹은 이주서사는 남성 혹은 여성이 된다는 것을 하나의 도착지점 혹은 완성지점이란 식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젠더는 그렇게 확실하며 젠더 간의 경계는 그렇게 명확한가(현재의 젠더 의미와 국민국가의 국경발명이 모두 근대의 산물이란 점은 우연이 아니다). “도착”할 몸이란 것이 있으며 “도착”이 완성이기는 한가.
페미니즘에서 특히나 자주 얘기하는 젠더구성주의는, 주로 “남성과 여성은 어떻게 다른가”라는 질문 방식으로 구성하고 있지 젠더 그 자체가 발명일 수 있음은 별로 언급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론으로서 젠더의 수행성은 얘기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남성과 여성이란 이분법에 근거해서 설명하는 경향은, “생물학적 청사진biological blueprint”에 기반을 두고 있고, 결국 젠더본질주의에 바탕을 둔 “수행성”을 얘기하는 격이다. 의학 역시 사회 ․ 문화적인 맥락에서 태아의 “생물학적인” 젠더를 결정하지만, 이런 과정 자체를 별로 언급하지 않는 편이다. 또한 “생물학적인” 남자/여자로 태어남이 곧 “사회 문화적인” 남성/여성이 됨을 의미하지 않음에도, 남자로 태어남이 곧 남성이 됨을, 여자로 태어남이 곧 여성이 됨을 전제하고 이것에 문제제기하지 않는다. 이런 인식체계에서 남성임과 여성임은 하나의 완성지표이며 그래서 젠더를 수행한다는 건 “생물학적 남성임” 혹은 “생물학적 여성임”이 된다는 의미를 함의한다.
이주서사 혹은 “잘못된 몸”의 은유는, 이런 인식에 기반을 두고 있거나 이런 인식을 상당히 공유한다. 하지만 젠더가 둘 뿐이라는 건 토대가 취약한 믿음이다. 트랜스젠더나 간성의 존재는, 그 정치적인 의미에서 젠더이분법체계의 “예외”나 “병리”가 아니라 젠더를 둘로 나누거나 태어날 때 의학(을 매개하는 국민국가)을 통해 결정하는 것 자체가 제도이며 개인을 국가의 기획 속에 얽어매려는 장치임을 말한다. 트랜스젠더와 간성은 “섹스정체성”과 “젠더정체성”이 일치하지 않고 일치할 수 없으며, 하나의 육체에 고정된 하나의 젠더가 있다는 가정에 도전하고, 이런 구분 자체가 문제임을 제기하며, “생물학적 정체성”이란 것 자체가 근대 국민국가(와 의학)의 기획 속에서 등장한 범주임과 오직 둘 뿐인 젠더 해석이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과정임을 드러낸다. 그래서 아이가 “남성”이거나 “여성”으로 태어났는데 태어났을 때 할당한 젠더가 아닌 젠더 정체성을 주장하면 정신병(GID)으로 병리화하지만(젠더를 본질화하지만), “간성”으로 태어나면 수술과 양육과정을 통해 의사와 부모가 원하는 젠더로 키울 수 있다고(젠더는 구성된다고) 얘기한다. 물론 이 글의 서두에서 인용한 댓글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 법적 성별변경과 수술을 통한 몸의 재구성은 젠더 자체를 고정불변의 확고한 것으로 여기던 인식을 흔든다는 점에서 “여전히 이성애제도에 편입하고 강화/지지하는 것 아니냐”란 식으로 단순하게 해석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오직 둘 뿐인 젠더란 토대를 문제제기하는 것은 아니란 점에서 한계는 여전하다.
“남성임” 혹은 “여성임” 자체가 근대적인 믿음에 기반을 두고 있을 때, 트랜스젠더의 이주서사, “잘못된 몸”이란 은유는 단순히 남성과 여성을 당연시할 뿐 아니라 “남성성”, “여성성” 자체도 고정된 것으로 가정한다. 그리하여 시대나 역사적 상황에 따라 젠더 정체성과 그 의미들이 달랐음에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해버릴 위험에 빠질 수 있다.
그렇다면 영화는 어디서 출발하고 어디로 도착한다는 것인가. 도착할 어떤 젠더가 있으며 성기재구성수술을 통해 획득한 젠더(사실 이 지적은 ‘정확’한데, 오직 둘 뿐인 젠더를 가정하는 한국사회에서 젠더는 외부성기 모습에 부착해있다)는 도착점이나 완성점일 수 있는가.

4. 출발점도 종착지도 없는 몸: 해석의 경합들
보통 모든 여성은 임신을 한다고 쉽게 간주하지만, 어떤 여성은 여성이기 때문에 정소와난소를 모두 지니고 있다고 얘기하고 어떤 여성은 여성(이른바 “생물학적 여성”)이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남성호르몬”을 투여한다. 어떤 게이 남성은 자신은 남성이기 때문에 클리토리스가 있다고 얘기하고, 어떤 레즈비언 여성은 자신은 여성이어서 페니스가 있다고 얘기한다. 어떤 ftm은 트랜스남성이기에 질을 제거하고 싶지 않다고 얘기하고, 어떤 트랜스는 자신은 레즈비언 여성이기 때문에 발기하는 클리토리스(펠리토리스)가 있다고 얘기한다.
생물학적인 성이라는 섹스와 사회문화적인 성이라는 젠더의 구분자체도 문제이지만(생물학 역시 문화적인 맥락에 위치하는 과학이다) 구분이 가능하다고 할 때조차 그 의미 해석은 단순하지 않다. 우리는, 젠더는 두 가지 뿐이라고 해석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고 이런 해석에서 마냥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동일한 방식으로 몸을 해석하는 건 아니다. 어떤 트랜스젠더는 주민등록번호 1번이며 그렇게 통하는 몸으로 여성이라고 말하는데, 이럴 때 “트랜스”의 과정, “to”의 과정은 더욱더 모호하고 무엇을 “to”라고 얘기할지 애매하다. 흔히 얘기하는 “to”/“트랜스”의 과정이 ‘없기’ 때문이다.

제목을 붙이며 “우리”에 따음표를 붙일까 말까로 잠깐 고민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트랜스젠더를 따음표에 가둔 특수한 집단으로 가정하고 싶지도 않거니와 트랜스젠더만이 젠더 경합[gender dysphoria]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나 젠더이분법과의 경합을 경험하지만 마치 트랜스젠더만이 젠더와의 경합을 경험한다는 식으로 가정하는 것, 그것 자체에 문제제기하고자 한다. 젠더를 두 가지로만 가정하고 그런 가정에 기반을 두고 있는 설명/인식체계를 비판하는 것이지 젠더 자체를 없애야 한다거나 트랜스는 젠더 바깥에 있다는 식으로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이런 식의 설명은 더욱더 문제적이다). 그렇다고 집단으로서, 균질한 “우리”를 가정하려는 것도 아니다.
두 편의 영화 모두 계급적인 환경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천하장사 마돈나>는 실업상태인 아버지와 살며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으는 고등학생이고, <트랜스아메리카>는 두 세 개의 일을 동시에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이다. 우리는 단 하나의 정체성만으로 환원할 수 없는 존재이고, 그렇기에 젠더만이 나를 설명하는 유일한 변수가 아니다. 한국처럼 태어난 지역과 다니는 학교가 곧 신분이며 ‘인종’으로 작동하는 사회에서 모든 트랜스젠더가 공통의 경험을 가지는 것도 아니다. 트랜스젠더의 보편적인 혹은 공통적인 경향을 기획하고 얘기하려는 그것 자체가 굉장히 끔찍한 상상력이며, “알려고 하는 노력” 그것이 “지식의 틀”로 재단하며 가두려는 시도일 위험성 또한 존재한다. 트랜스젠더가 아니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경험이라는 건 있는가? <천하장사 마돈나>는 씨름을 통해 수술비를 마련하고 <트랜스아메리카>는 여행 도중에 돈을 잃어버리지만, LA에 도착하자 죽었다고 얘기한 부모들이, 그것도 상당한 재력을 지닌 부모들이 나타난다.
다양한 몸들이 경합하는 장으로서의 몸, 그 몸의 한 지점이 젠더-트랜스젠더이다. 트랜스젠더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몸들을 트랜스젠더로 환원하며 여러 폭력적이거나 차별적인 상황이 발생하지만, 문제제기할 지점은 얼마나 차별받고 있느냐라기 보다는 트랜스젠더란 이유로 모든 맥락을 단 하나로 환원하는 이유/구조는 무엇이며 어떤 맥락에서 그렇게 작동하느냐이다. 트랜스젠더임은 경합하는 몸들 중 하나이지 “나”의 유일무이한 몸이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경합하고 있다. “트랜스”나 “to”는 어떤 “전이”[transition] 과정이 아니라 경합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해석하는 과정이고 이것이 이 글에서 말하고 싶은 “트랜스” 혹은 “to”의 의미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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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 2006.10.25. 오전-오후
워드 2006.10.25. 저녁, take-2006.10.31.저녁. take1-2006.11.04. 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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