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대한민국 트랜스젠더 오동구에 관한 보고서: 한겨레21 제626호

이번 한겨레21 특집은 트랜스젠더.
인터넷판은 2006.09.08.(금) 제626호
가판은 2006.09.12. 제626호(즉, 2006.09.05부터 길에서 살 수 있는 것.)



“민주적 이성애자를 위하여”
“시련은 중학교부터 시작된다” (네이버 링크)
“수술 없이도 호적 정정 가능” (네이버 링크)
‘의학적 조치’는 명시해야 했다 (네이버 링크)
주민증 내미는 게 지옥이다 (네이버 링크)
나를 증명할 길은 수술뿐인가 (네이버 링크)

네이버에 뜬 기사를 같이 링크하는 이유는 그 기사에 달린 리플도 참고하시라고. 푸훗.

이 기사를 링크하는 이유는, [성전환자 인권실태조사 보고서]가 나왔지만 파일을 링크하기 힘든 상황이라 개략적이나마 참조하시라고.

[영화]천하장사 마돈나: 트랜스젠더 혹은 성전환자

[천하장사 마돈나] 2006.09.03.일. 1회 오전 09:00, 2관 3층 F열 7번.

※스포일러 없는 리뷰는 불가능하지요.

#0
한참을 울고 나왔지만 개운하지는 않다. 루인이 접하는 영화관련 매체에서 이 영화에 왜 이렇게 호의적인지를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일테면 씨네21은 몇 주 전부터 이 영화를 소개하는 기사를 실었고 꽤나 호의적이었다. 필름2.0은 CRITIC’S CHOICE에서 모두가 엄지손가락을 올리는 평을 하며 대체로 긍정적으로 리뷰를 한 듯 하다. (사실, 아직 관련 기사들을 하나도 안 읽고 있는 상태다. 영화와 놀고 나서 읽으려고.)

극장을 나서면서 타이밍이 참 절묘하다는 느낌을 품었다. 얼마 전에 “성전환자 성별변경 등에 관한 특별법(안)” 공청회가 있었고 내일이면 국회에서 보고서 발표대회가 있을 예정이고. 지난 6월엔 대법원 판결이 있었고 지금, 트랜스젠더 혹은 성전환자가 주인공인 영화가 극장에서 상영 중에 있다. 이런 절묘한 타이밍들. 혹시나 오해를 한다면, 법제화 작업과 실태조사는 대법원 판례가 나온 이후에 진행한 것이 아니라 작년 말부터 기획했던 일. 대법원 판례가 탄력을 주긴 했지만 그것이 이번 일련의 작업에 동인은 아니다.

#1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한 부분은, 친선대회에서 첫 시합을 한 날, 지고 돌아온 이후의 장면들. 동구는 립스틱을 바르고 지우길 반복하는 와중에 동구의 아버지가 방문을 연다. 그 순간의 정적. 영화를 본 사람은 알겠지만 동구의 아버지는 회사 사장을 패는 싸움꾼에 술주정을 하며 집안에서 술병을 던지는 인물. 폭력적이고 억압적일 거란 이미지를 풍기는 아버지와 립스틱을 칠하고 있는 동구의 대면. 무슨 짓이냐고 화를 낼 법하다고 상상하기 쉽지만, 아버지는 딴청을 피운다. 동생 어디 갔느냐고.

이 장면이 좋았다. 너무 완고하고 보수적이기 때문에 이런 순간에 그냥 넘어갈 수 있음. 루인이 트랜스젠더임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알지만 루인을 모르는 사람, 즉 주민등록상의 이름으로만 알거나 아예 모르는 사람들은 루인이 트랜스젠더임을 모른다. 그러니 이성애혈연가족들이 모르는 건 당연지사.

종종 이성애혈연가족들에게 커밍아웃을 할 것인가를 고민할 때면, 두 가지 감정을 품는다. 하나는 절대 그럴 수 없어, 이고 다른 하나는 의외로 쉬울 지도 몰라, 이다.

나름대로 열려있다고 생각하는 “엄마”라 불리는 분은 너무 많은 지점에서 부딪힌다. 동거는 절대 안 된다거나, 그건 텔레비전에서나 나오는 일일 뿐이라거나. 모든 걸 다 이해할 것처럼 얘길 하지만, 너무 많은 부분에서 부딪힌다. 스스로가 용납할 수 있는 정도에 한해서만 열려있음. 이런 경험이 자신은 열려있다고 믿거나 진보라고 말하는 사람을 별로 안 믿는 경향에 영향을 끼쳤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부딪힘은 상대적으로 마주칠 기회가 많다는 의미기도 하고 생각이 너무 많고 그런 생각들을 모두 말하는 성격 때문인지도 모른다.

완고하고 보수적인 “아빠”라 불리는 분은, 수식어 그대로 독재자 기질이 있다. 자신의 말에 반대하는 걸 못 견디고 권위에 민감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귀엽게” 변하는 모습을 접한다. 완고함과 세상의 변화 속에서 자신의 날을 꺽은 것인지 알 순 없지만.

이런 경험 속에서 부모님에게 커밍아웃을 하면 의외로 잘 받아들일 것 같기도 하다. 충격은 받겠지만 그럼에도 종종, 의외로 쉽게 받아들일지도 모른다는 느낌(물론 몇 달 정도는 괴롭겠지만). 이런 느낌을 품고 있기 때문에 영화에서의 그 장면이 좋았다. 너무 완고하기 때문에 쉽게 무너지는 순간.

동구가 씨름대회 나가는 날, 치마를 입고 “아빠” 앞에 섰을 때 “아빠”의 행동은 그 완고함이 무너지는 순간-자신의 존재 근거라고 믿는 토대가 무너지는 순간의 저항이라고 느꼈다. 동구가 성전환 할 것을 알지만 애써 외면하고 있었는데 외면하며 지내온 방식이 한계에 부딪혔을 때, 폭력을 통한 최후의 저항 혹은 발악. 그래서 순간적이나마 “아빠”의 행동이 안타깝고 그런 행동에 ‘공감’했다. 커밍아웃의 정치학을 고민하면서도, 스스로 트랜스젠더라고 받아들이기까지 봉인하고 끊임없이 부인하고 외면하고 스스로 트랜스젠더임을 두려워했던 기억들이 몰려왔다. 커밍아웃을 하고 나서도 그런 커밍아웃이 두려웠던 기억도 한 켠에 있다. 동구와 싸운 후 동구의 엄마인 수정을 찾아간 건 그런 흔들림을 인정하고 스스로에게 해명하기 위한 행동이라고 느꼈다. “네 엄마가 그렇게 하자고 하니까 나도 지지할 뿐이야”란 식으로 그렇게 반대하는 행동을 했는데 한 순간에 바뀐 모습을 보여주기 부끄러워하는/수줍어하는 모습.

#2
영화관을 나서며 중얼거린 말은, 영화매체들(그리고/혹은 이 영화를 본 상당수의 사람들)이 왜 그렇게 이 영화에 호의적인지 알 것 같아, 였다. 이 영화는 트랜스젠더를 아주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었다. 동구가 거울을 보며 하는 행동들은 그냥 ‘별스럽게’ 받아들이면 되고(루인과 같은 시간과 장소에서 영화를 봤던 사람들의 반응이 이랬다) 경우에 따라선 코미디로 받아들일 수 있게 그렸다. 수술비를 모으고 있는 과정을 그리는 이 영화는 수술비는 모았지만 그래서 호르몬투여 과정에서 어땠는지 수술 과정은 어땠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즉, 정신과 의사를 비롯한 의사와의 상담 과정은 어땠는지, 호르몬 투여 과정에서 어떤 식으로 변해가고 감정 변화를 겪는지, 수술 과정 중에서 어떤 몸적 변화를 겪는지는 조금도 말하지 않는다. 성전환자 혹은 트랜스젠더들에게 이 과정이 가지는 중요성에 반해 이 영화는 단 한 차례도 이 과정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주변 사람들에게 커밍아웃하고 지지 받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다. 그건 여러 과정 중의 하나일 뿐이다. 바로 이 장면-사람들에게 커밍아웃하고 그 과정에서 어떻게 관계를 새로 정립하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보고 싶어 할 법한 모습만 보여주고 있다는 혐의 또한 지울 수는 없다.

언제나 그렇듯, 또 한 번 과잉해석하자면, 매체들의 호의적인 반응은 바로 이것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영화를 통해 “나는 이 영화가 좋아” “성전환자를 지지해”라고 말하는 것으로 너무 쉽게 자신의 정치성을 보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쉽게 말하는 건, 자신의 위치를 조금도 이동하지 않는 태도이며, 이 영화가 말하는 이상을 고민하지 않으려는 태도로 읽을 수도 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서 또 하나의 몸에 드는 장면은, 동구에게 춤을 배우는 덩치1(문세윤 분)과 동구가 씨름 연습을 하는 장면. 겨드랑이 간지럼을 못 참는 덩치3(윤원석 분)이 눈을 가리고 손을 묶은 상태에서 간지럼을 참는 훈련을 하는 그 장면 후에 나오는 연습장면. 이 장면에서 덩치1은 동구에게 요즘 너 때문에 헷갈린다는 말을 한다. 이 말과 함께 사랑과 어색함이 가득한 그 장면이 좋았다. 적어도 자신의 위치가 이동하는 경험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3
이 영화 홍보 팜플렛의 첫 페이지를 읽다가 경악. 동구를 설명하며 “女子가 되고 싶은 少年”이라고 적었다. 미안하지만 “여자가 되고 싶은 소년”이 아니라 “소년이라고 간주 되는(!) 여자”가 더 정확할 법하다. 혹은 그냥 “여자”라고만 적거나. 어릴 때의 경험들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동구에게도 일반화하는데 얼마간의 무리가 있겠지만 상당수의 성전환자/트랜스젠더들은 “되고 싶은”이 아니라 처음부터 “여자” 혹은 “남자”로 자신을 설명한다. 그렇다면 이 홍보문안을 쓴 사람은 별다른 고민 없이 자신의 ‘편견’ 혹은 ‘상상’으로 이 글을 썼을 거라고도 추측이 가능. 물론 아닐 수도 있다. 영화홍보이고 “사람들의 평균적인 지식”에 맞추는 글을 쓰는 것이 좋다는 협상으로 이 문구를 사용했을 지도 모르지만, 조금만 더 고민했어도 이런 식의 문구는 쓰지 않았을 테니까.

#4
마지막 장면 역시 이 영화의 매력이다. 밴드와 함께 춤을 추며 마돈나의 “Like A Virgin”을 부르는 장면. 요즘 고민하고 있는 지점 중 하나는 mtf/트랜스여성의 “남성성”과 ftm/트랜스남성의 “여성성”이다. 아, 물론 살짝 고민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남성임” 혹은 “여성임”을 시험받지 않고 증명할 필요가 없는 공간에선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곤 한다.

영화에서 이 장면은 그런 자신의 다양한 모습-일테면 트랜스여성의 “여성성”과 “남성성” 모두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5
[트랜스아메리카]와 비교해서 읽어도 재미있는 영화. [트랜스아메리카]가 성전환을 여행서사, 즉 젠더 경계를 넘는 여행담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천하장사 마돈나]와 비교할 만하다. [메종 드 히미코]까지 함께 한다면 더더욱 좋고.

#6
눈치 챈 사람도 있겠지만, 동구가 아버지를 뒤집기 한 판으로 넘어뜨린 후, 거리에서 누군가를 좇아가는 장면에서 거리의 사람들이 동구를 다시 돌아보는 모습이 나온다. 일어교사는 동구의 고백에 끔찍해하며 폭력을 행사하려고 한다. 웃을 수 없는 장면이다.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동구가 씨름부에 입부하고 회식 다음날 덩치1, 덩치2, 덩치3이 동구를 찾아와 춤을 배우는데, 이 지점에서부터 #2의 마지막에 설명한 장면, “너 때문에 요즘 헷갈려”라고 말할 때의 애정과 어색함이 넘치는 장면(이하 고백 장면)까지.

이런 장면들에서 감독들이 게이커플이 아닐까 했다. 덩치1이 동구에게 고백하는 그 장면은 퀴어/이반 감수성이 아니고선 포착하기도 어렵고 찍기도 어렵다고 느꼈다. 그 만큼 순간의 감정들을 잘 포착하고 있다. 그래서 퀴어가 거리에 지나갈 때 어떤 식으로 사람들이 반응하는지를 카메라에 담은 것이라고 느꼈다. (의심하기 시작하면 모든 게 의심스럽다. 크크+)

물론 김비씨가 시나리오감수를 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이것만으론 그런 장면을 잡기 힘들다는 느낌 때문. 후후.

[영화] 소년은 울지 않는다 Boys Don’t Cry

제목: 소년은 울지 않는다 (Boys Don’t Cry)
감독: 킴벌리 페어스
년도: 1999

좀 더 많은 정보는 여기로.

#루인의 설명
1. 이 영화를 얼마 만에 다시 본 걸까. 3년 혹은 4년 전에 이 영화를 비디오로 읽은 흔적이 몸에 있지만 그땐 어떻게 읽었을까. 지인이 이 영화와 관련해서 얘기를 나눠보자고 해서 다시 읽었지만, 다시 읽고 싶은 욕망과 그러고 싶지 않음 사이의 갈팡질팡은 꽤나 오랜 감정이다.

2. 영화 중반부까지 계속 불안했다. 공포영화보다 더 무서울 정도로 불안으로 안절부절 못했다. 자신의 정체성이 언제 들킬지 모르는 상황에서-단순히 들키는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죽음을 부를 수도 있는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지내는 행동이 주는 불안.
그래서 후반부에, 차라리 이젠 편하다고 한 말이 와 닿았다. 사실 그때, 영화를 보고 있는 루인이지만, 루인 역시 차라리 지금이 ‘편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아웃팅과 공포에 따른 폭력을 경험한 이후, 차라리 편하다는 말, 너무도 절실하게 와 닿았다. 들키지 않기 위해 끝없이 숨겨야 했던 불안함,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하기 위한 긴장감.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을 때, 차라리 편하다.

3. 이 영화를 어떻게 분류할 것인가는 어려운 문제다. 트랜스일까 퀴어일까.
루인 식으로 환원하자면, 트랜스섹슈얼이나 레즈비언/다이크가 아닌 넓은 의미의 트랜스젠더라고 읽었다. 영화 초반에 스스로 다이크(레즈비언)가 아니라고 말하는 상황에서 브랜든 티나/티나 브랜든을 레즈비언으로 환원하는 건 위험한 일이다. 그렇다고 성전환 수술을 준비하곤 있었다 해도 스스로 트랜스라고 명명한 적이 없는 상황에서 브랜든을 트랜스라고 환원하는 것도 문제다. (채운조 선생님은 영화의 시작 장면-경찰차를 따돌리는 장면이, 어떤 특정 정체성으로 브랜든을 환원하려는 명명을 따돌리는 것으로 해석했다.) 트랜스젠더가 젠더/성별의 범주와 역할을 위반하는 사람들 모두를 아우르는 의미일 땐, 브랜든을 트랜스젠더로 부를 수도 있겠지만 이 역시 탐탁치 않다. 잠깐 구금되었을 때, 라나와 얘기를 나누며, 자신은 “남성”도 “여성”도 아니지만 그 모두라고 말했다. (케이트 본슈타인에겐 이것이 트랜스젠더 범주이긴 하다.)
그래서 이 영화의 분류를 퀴어(이반)로 했다. 트랜스만큼이나 퀴어 역시 광범위한 범주를 지닌다는 점에서, 트랜스로 가두진 않겠다는 점에서. 하지만 이 역시 탐탁치는 않다.

4. 성폭력 장면이 고통스러운 건, 몸과 정체성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자기 해석과 타인의 해석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과 갈등이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이성애’-젠더를 전제하는 기존의 페미니즘에서 성폭력 해석은 피해경험자를 성적 대상의 몸뚱어리로 환원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브랜든의 경우는 이렇게 ‘단순’하게 말하기 힘들다. 브랜든에게 성폭력은 “남성” 젠더정체성을 짓밟는, 그리하여 끊임없이 부인하는 “여성”젠더정체성으로 환원하는 폭력이다(얼핏 비슷하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너무도 다른 맥락이다). 브랜든의 정체성을 완전히 무시한다는 점에서, 성폭력 경험을 “진술”하기는 더욱더 어렵다. 성폭력/강간의 피해자는 “여성” 뿐이라는 식의 언설이 지배적인 문화에서 성폭력피해를 경험했다는 말은, 끊임없이 자신을 “여성”이 아니라고 말하며 “남성”으로 통하길 바라고 “남성”으로 정체화하기도 하는 브랜든에게 자신의 존재 자체를 흔드는 고통이다.

5. 그렇다면 이 사건은 트랜스혐오 범죄일까 ‘레즈비언’혐오 범죄일까.
브랜든 티나/티나 브랜든의 사건 공판이 있던 날, 많은 트랜스들이 법정 앞에서 시위를 했다. 그리고 한 레즈비언은 브랜든을 레즈비언이라고 이름 붙임으로서 트랜스/젠더와 레즈비언 사이엔 경계분쟁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논쟁은 브랜든이 백인이라는 측면에서 가능하다. 유색인, 이주민 트랜스들이 유사한 범죄로 죽었을 때 이런 시위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브랜든은 자신이 다이크가 아니라고 했고 “남성”도 “여성”도 아니란 식으로 협상했으며, 라나는 브랜든을 “남성”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톰과 존은 브랜든을 죽이러 가며, 레즈비언을 처단하러 간다고 했다. 당사자의 정체성과는 상관없이 톰과 존이 브랜든을 레즈비언으로 인식했기에 레즈비언 혐오일까.
톰과 존은 브랜든이 성전환 수술을 준비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며 역겨워서 못 봐주겠다고 했다. 적어도 브랜든이 트랜스일 가능성은 인지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화장실로 끌고 가 브랜든의 젠더 정체성을 “여성”으로 강제할 때, 그러고 나서 레즈비언이라고 부를 때, 톰과 존은 트랜스젠더 자체가 있을 수 없다고 간주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역설적으로 ‘동성애’가 좀더 가시적이라 쉽게 인식할 수 있지만 트랜스/젠더는 낯설어서 뭐라고 이름 붙이기 힘들어함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트랜스의 존재 자체, 그 가능성 자체를 무시한다는 점에서 트랜스 혐오라고 부를 수도 있다(루인은 이런 행위를 혐오라고 부르는 편이다).
하지만 만약 브랜든과 사귄 사람이 라나가 아니라 같이 어울렸던 캔디스였다면 어땠을까. 라나가 아니었어도 톰과 존이 브랜든을 죽였을까. 아니라고 느낀다. 존이 라나와 브랜든의 관계에 간섭하는 것은 순전히 존이 라나를 좋아하기 때문이며(존의 입장에서) 브랜든에게 폭력을 가하고 죽이려고 하는 것도 브랜든을 없애면 라나가 자신에게 돌아올 거란 착각 때문이다. 만약 레즈비언 혐오였다면 톰이 라나를 죽이려고 했을 때 존이 악착같이 막을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브랜든을 둘러싼 이 논쟁-트랜스혐오범죄냐 레즈비언혐오범죄냐와 같은 논쟁, 정체성의 경계분쟁은 모호한 위치로 이동한다. 읽기에 따라선 치정에 따른 살인으로도 읽을 수 있다. 아니, 영화가 재현하는 식으로 읽는다면 존의 살인 의도는 치정으로 다가온다. 브랜든은 이 살인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레즈비언이 아니라고 했음에도 레즈비언으로 환원하는 존과 톰의 말에서 트랜스혐오로 느꼈을까? 알 수 없다. 브랜든은 죽었고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밝힌 적이 없다고 하니 모두가 사후에 나온 논쟁일 따름이다. 더구나 이 논쟁엔 인종과 계급이 겹친다는 점에서, 이런 논쟁이 불편한 지점도 있다.

6. 이 영화를 읽다가 몸 아팠던 지점 중 하나는, 감옥에 구금되었을 때, 라나가 찾아오자 자신을 트랜스로 설명하기 보다는 “양성구유”로 말하다가 “남성”도 “여성”도 아니지만 그 모두란 식으로 설명하는 지점이었다.
종종 떠올리는 몸앓이. 만약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그 사람은 루인의 정체성을 모른다면, 더구나 퀴어나 트랜스를 향한 공포와 혐오가 있는 사람이라면 루인은 어떻게 반응할까. 처음부터 밝히는 것이 가장 좋다고 “순진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말하지 않고 상대가 원하는 방식으로 인식하도록 두며, 그것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건, 퀴어와 트랜스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협상하는 방식이다.
사랑하는 감정과 자신의 정체성이 충돌할 때, 그것이 엄청난 갈등을 일으킬 때, 그럼에도 사랑하는 사람을 놓치고 싶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말할 여건이 아닐 때, 루인도 침묵을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고 느낀다. 구금되었을 당시 브랜든의 그 말은 이런 맥락으로도 다가왔다. 브랜든 자신도 성전환수술에 어느 정도 두려움이 있고 수술은커녕 호르몬투여도 아직 결정하지 않은 상황에서, “성전환 수술 할 거야” 혹은 “나 트랜스섹슈얼이야”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브랜든이 정말 간성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라나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음이 협상으로서 그렇게 표현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느꼈다. 정말 간성일 수도 있고 어느 쪽도 아니지만 그 모두라고 자신을 부르고 있는 상황이었을 수도 있다.

7.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가면서 Thanks To에 익숙한 트랜스젠더들의 이름이 보인다. 트랜스남성과 부치들의 조언에 특히 고맙다는 말은 지금까지 쓴 맥락에서 좀더 재밌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