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이사 가는 곳에 인터넷을 설치할 것인가, 말 것인가…
설치를 하면 급하게 인터넷을 사용해야 할 때, 카페에 가야 하는 불편함과 불필요한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전 이미 카페 사용에 적응했다는…;;;
설치하지 않으면, 玄牝에 머물 때 인터넷을 할 수 없으니 책을 읽는 것 외에 달리 할 일이 없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책 읽을 시간을 확실하게 확보할 수 있는거죠. 전 인터넷만 안 하면 책 읽을 시간이 무지무지 늘어난다는… 하하. ;;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이래저래 갈등입니다.
참… 인터넷을 설치하면 하고 싶은 게 있긴 합니다. 현재 나스타샤(데크스탑)에 주분투를 설치해서 사용하고 있는데요. 리눅스 민트란 걸 한번 설치해서 사용해보고 싶달까요. 나스타샤의 장점은, 아무 OS나 재미로 설치할 수 있다는 거니까요. 워낙 오래된 컴퓨터라 확실히 부담이 없네요. 흐흐. 이왕이면 리눅스의 다양한 버전을 한번씩 설치해서 사용하며, 제가 가장 편하게 사용할 수 있고 제게 가장 적합한 OS를 찾고 싶은 욕심도 있고요. 하하.
[카테고리:] 몸에 핀 달의 흔적
[f]달팽이 아이스크림
#비위가 약하신 분들은 읽지 마세요. 이건 일종의 경고입니다. 🙂
어제 저녁엔 ㄹ제과에서 마련한 신제품 평가회에 갔다 왔습니다.
프로젝트S란 이름으로 연구개발을 진행한 신제품을 선보이고, 맛을 평가 받는 자리였습니다. 음식이나 요리와는 상관 없는 제가 직접
초대 받은 건 아니고요. 아는 분이 같이 가자고 해서 그냥 따라갔습니다. 참가하지 않았으면 무척 아쉬울 자리였습니다. 참,
제품의 또 다른 명칭은 달팽이 아이스크림.
꽤 오래 전, 멜론바(?)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하고(저는 알 수
없으니;;), 요즘은 바나나를 냉동실에 얼려 먹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죠. 이번에 선보인 신제품은 이 두 가지에 힌트를 얻어
만들었다고 합니다. 아울러 요즘 추세가 맛있으면서도 건강에도 좋은 제품이어야 한다면서 유기농이란 점을 여러 번 강조하더군요.
유기농 건강 아이스크림이란 기묘한 조합의 목표와 함께, 지구온난화로 올 여름은 유난히 더울 것이라는 기상예측에 따른 대비,
기상이변에 따른 최적의 환경 등을 조합해서 기획했다고 합니다. 이것저것 갖다 붙인 설명인 티가 팍팍 나죠? 넵. 저도 처음
설명을 듣는 자리에선 잔뜩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아이스크림을 직접 먹어 보고 제조과정 설명을 듣고 나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만큼 획기적이랄까요.
달팽이 아이스크림이라고도 불리는 이 제품은 정말 신선하고 새로웠습니다. 제조과정을 직접 확인할 수도 있었는데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자연산 제품을 그대로 사용했다는 점, 기존의 빙과류에 많이 사용하는 화학제품을 일절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유통과 보관에 따른 어려움으로, ㄹ제과에서 운영하는 N** 지정업체에서만 판매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반응이 좋으면 마트 등으로
판매처를 확대할 예정이라고 하고요. 아마 경쟁 마트에서도 상품을 입고하지 않을까 싶어요. 암튼 이 제품은 소위 말하는
웰빙 빙과류, 유기농 빙과류입니다. 물론 어제 시식회 자리에서 담당자가 웰빙이란 말을 제품 홍보에 사용하려고 한다고 말하자,
참가자들은 극구 말렸습니다. 빙과류는 그냥 즐기는 제품인데 무슨 웰빙이냐고.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고. 이구동성으로 웰빙이니
유기농이니 하면 오히려 역효과만 날 거라고 말하는 걸 들으며 저는 웃었습니다. 웰빙이나 유기농이 트렌드면서도 거부감이 많구나 싶어서요. 하하. 달팽이란 명칭을 사용한 건, 달팽이가 깨끗한 환경에서만 살아가는데 착안한 것이기도 합니다. 제품명으로
썩 좋은 네이밍은 아니죠. 뭐, 회사의 홍보부에서 알아서 정리하겠죠?
수박바하면 수박 모양, 죠스바하면 어쨌거나 죠스 모양이듯 달팽이 아이스크림은 달팽이 모양일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집을 등에
달고 다니는 달팽이 모양은 아니고 차라리 민달팽이 모양에 가깝습니다. ‘가깝다’고 표현하면 개발진에서 섭섭하게 생각하려나요?
민달팽이 모양에 가까운 게 아닙니다. 민달팽이 모양 그 자체입니다. 아니, 집을 등에 달고 다니는 달팽이에서 집만 제거한 모양
그 자체입니다.
어제 선보인 제품은 세 가지 정도지만 제품 특성상 무한확장 가능합니다. 꽤나 다양한 제품이 나오지 않을까 싶어요.
첫
번째 제품은 달팽이바. 제조 과정은 간단합니다. 식용달팽이를 깨끗이 씻고 집을 제거한 후, 소금 간을 한 뜨거운 물에 살짝
익힙니다. 그후 급속 냉동시켜 냉동보관합니다. 그걸 그냥 먹는 겁니다. 뜨거운 물에 삶은 걸 급속 냉동했기에 사각거림과 달팽이
특유의 쫄깃함이 살아 있습니다. 식감을 중시하는 분들을 타겟으로 삼고 있는데, 맛이 일품입니다. 첨엔 몇몇 분들이 시식을
망설였지만, 한입 먹고 나더니 그 자리에서 두세 개를 더 먹을 정도였죠. 기대하셔도 좋을 듯합니다.
두 번째 제품은
달팽이 샤베트입니다. 급속 냉동한 달팽이를 몇 가지 과일(역시 급속냉동한 것)과 믹서기로 갈아서 살짝 녹인 다음 다시 얼린
제품입니다. 달팽이 특유의 쫄깃함과 과일 특유의 상쾌함이 의외로 잘 어울립니다. 상당히 맛있고요. 후식으로 먹기에 좋은
제품이라고 주최측은 설명했지만, 그냥 먹기에도 좋습니다. 가격은 미정이라고 하는데, 가격만 적당하면 식사 대용으로도 그만이고요.
세
번째 제품은 달팽이바와 달팽이 샤베트의 중간 정도에 위치하는 제품입니다. 제조하는데 가장 손이 많이 가는 제품입니다. 달팽이가 음식을 먹는 걸 본 적이 있으면 아실 텐데요. 음식을 잘게 갉아 먹는 달팽이는 그 음식이 몸에 고스란히 저장되는
편입니다. 그래서 당근을 먹으면 달팽이는 붉은색으로, 상추를 먹으면 초록색으로 변하는 걸 볼 수 있지요. 여기에 착안한
제품입니다. 우선 달팽이들에게 과일을 먹인 후, 소화시키기 전에 달팽이바와 같은 제조과정을 거칩니다. 이 타이밍이
중요하더군요. 조금만 늦어도 과일을 소화시키거든요. 그래서 소화되기 직전에 조리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이렇게 해서 먹으면, 겉은
달팽이바지만 속은 과일샤베트입니다. 놀라운 건, 달팽이가 먹은 과일이 고스란히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과일의 식감입니다.
믹서기로 과일을 오래 갈다보면 물이 되기 쉽고, 너무 적게 갈면 덩어리가 생기죠. 그런데 달팽이의 잔 입으로 먹은 과일은 매우
미세하게 갈렸으면서도 물이 아닌 상태더군요. 과일샤베트를 좋아하는 저로서는 만족스런 제품을 찾기가 어려웠는데, 이 제품은 정말
최고였습니다. 요리만화에 자주 등장하는 과장법을 빌리면 꿈의 맛이랄까요? 하하.
제조과정이 아무리 다양하다고 해도
관건은 달팽이 양육과 관리인데요. 제조과정이 아무리 신선해도 기본은 달팽이죠. 달팽이를 어떻게 기르느냐가 맛을 좌우하죠. 이런
점에서 이번 달팽이들은 매우 훌륭했습니다. 시중에서 팔거나 일등급 호텔에서 내놓는 달팽이와는 비교도 안 되게 살이 올랐고,
맛있더라고요. 달팽이 맛을 유지하는 데 핵심은 바로 기상이변과 자연재혀였습니다.
아는 분은 아시겠지만 달팽이를 처음
먹기 시작한 곳은 지중해와 대서양이 닿아있는 지역의 카라콜(Caracol)이란 어촌이라고 합니다. 그 마을은 옛날부터 기상변화가
심하고 해안에 암초가 많아 조난당하는 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매일 아침 파도에 실려온 선원들의 시체를 치우거나
간신히 살아 남은 이들을 돌보는 게 일상이었죠. 뱃사람들이 조심해서 조난 당하지 않는 날도 있었지만, 여름 태풍이 발생하는
시기엔 거의 매일 시체 여럿 치우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번거로운 일이라고 그냥 방치하자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종교적
신념도 있거니와 해안에 시체가 버려져 있는 건 아무래도 미관상 안 좋으니까요. 한 가지 흥미로운 일은 이 시체들 주변엔 커다란
달팽이들이 모여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달팽이를 죽음의 신으로 여겼죠. 죽음을 부르진 않지만 죽은 사람을
인도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신. 고대 그리스에선 달팽이를 decadência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건 우연이 아니었던 거죠. 아무튼 달팽이는
시체 위를 돌아다니면서 죽은 사람을 위로하는 듯했습니다.
문제는 1600년대 어느 해, 어촌의 우두머리가 바뀌고, 얼마간의 혼란이 생겨 며칠 동안 해안으로 밀려온 시체를 못 치웠는데요. 며칠 지나 시체를 치우러 가니, 놀랍게도 그
모든 시체들이 깨끗하게 백골만 남아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첨엔 자신들의 게으름에 신이 벌을 내린 것으로 해석하고 공포에
떨었습니다. 그래서 마을의 신부와 노파, 학자 등에게 의뢰를 했지요. 며칠 관찰한 결과 덩치 큰 달팽이들이 시체를 먹는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달팽이들은 죽은 이를 위로한 것이 아니라 돌아다닐 때 발생하는 끈적한 액체로 살을 녹여선 갉아 먹었던 거죠.
식성이 대단해서 몇 십 마리의 달팽이가 한 사람을 먹는데 하루면 충분했습니다. 네. decadência에 담긴 여러 의미는
달팽이의 이런 행동을 지칭하기에 적합했죠.
마을의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에 상당히 놀랐습니다. 해변의 달팽이들이 식인달팽이였다는 사실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공포를 자아냈죠. 행여라도 자신들이 자고 있을 때 달팽이가 집으로 들어와 자신들을 갉아 먹으면 어쩌나 하는 공포였죠. 근거
없는 공포였습니다. 이제까지 그런 적이 단 한번도 없었으니까요. 그때 마을의 식당 요리사가 그 달팽이를 잡아서 요리를 할 생각을
했습니다. 성체를 먹는 의식처럼, 식인달팽이를 먹는다면 달팽이들이 자신을 공격하지 않을 거란 막연한 환상때문이었죠. 그렇게
요리한 달팽이를 마을 사람들과 서로 나눠먹었는데요. 처음엔 일종의 공포와 부적 효과를 노리며 적의에 가득찬 마음으로 먹기
시작했지만, 종국엔 행복한 마음이었습니다. 별다른 간을 하지 않았음에도 요리가 너무 맛있었던거죠. 누군가는 맛의 이유를
깨닫고 흠칫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맛의 원인을 발설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내 입을 닫았죠. 그 맛을 차마 잊을 수
없었으니까요. 자신의 깨달음을 말하는 순간, 더 이상 먹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그리고 사람들을 둘러보았을 때, 또 다른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같은 사실을 깨달았지만 어느 누구도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서로 모른척 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그 일이 있은 후, 사람들은 해안에 밀려온 시체를 다음날 바로 치우지 않았습니다. 뼈만 수습할 뿐이었습니다. 대신 달팽이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달팽이가 없어질 것을 우려하여, 알을 낳은 다음에만 달팽이를 잡아야 한다는 조약도
만들었고요. 이것이 달팽이 요리의 기원입니다. (또 다른 설에 따르면, decadência란 용어의 기원으로 유추할 때, 카라콜이 아니라 고대 아테네 귀족들이 달팽이 요리를 즐겼지만 이 사실을 비밀에 붙였다고 하네요.)
ㄹ제과에서 생산을 앞두고 있는 달팽이 아이스크림 시리즈는, 달팽이 요리의 기원에 충실한 제품이기도 하더군요. 최근의 기상이변과
자연재해는 달팽이 양육에 최적의 조건이라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죠. 태풍이나 지진 등 자연재해가 많은 곳에 이번 신제품의
생산시설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달팽이 양육과 제품 생산을 거의 동시에 해야 하기 때문이죠. 자연재해가 빈번할 수록 제품 생산도 원할할 듯하니, 다른 무엇보다도 자연재해가 얼마나 자주 발생하느냐가 관건이라고 합니다.
급속 냉동 후 지속적인 냉동보관, 그리고 독자적인 유통망을 통해 제품 생산 후 24시간 이내에 매장 진열. 모든 설비는 다
갖추었다고 합니다.
암튼 이번 여름 선보일 신제품 달팽이아이스크림은 정말 기대하셔도 좋을 듯합니다. 🙂
또 다른 나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야마모토 후미오의 소설 [블루 혹은 블루]를 읽었다. 기대 이상. 도플갱어가 소재다. 갈등이 심한 상황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나와 다른 내가 생긴다는 아이디어.
도저히 어느 쪽으로도 선택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로운 선택을 해야 할 때, 정말 또 다른 내가 생겨나 내가 선택하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그때 나와 헤어진 나는 내가 하지 않는 선택 상황에서 잘 살고 있을까? 궁금하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내가 하지 않은 선택을 살고 있는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내가 도망쳤던 또 다른 상황에서 도망치지 않은 나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내가 ‘본체’고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내가 ‘도플갱어’란 보장은 없다. 그렇다면 도저히 내가
기억하지 못 하는 과거의, 내가 모르는 선택을 한 나는, 나의 ‘본체’는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우리들이 서로 만날
가능성은 있는 걸까? 만약 우리가 만나, 서로의 삶을 서로 바꿔가며 살 수 있다면 그때 나는 내가 모르는 나의 삶을 어떻게 살 수
있을까? 하지만 내가 선택하지 않는 삶을 사는 나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서로 만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겠지. 서로의
생활을 질투하겠지. 서로 상대방의 삶이 부러워서 생활을 바꾸고 싶어 하겠지. 그러다 때때로 바꾼 삶이 너무 낯설고 괴로워서 또
다른 나를 찾아 삶을 바꾸려고 하겠지. … 나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지금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