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가는 길, 혹은 미술관에서 걷는 동안(일종의 메모)

햇살이 창백하다. 서늘하다. 태양을 바라봐도 눈이 시리지 않다. 지금은 3월 초, 해가 기우는 오후 4시를 지날 즈음. 침엽수만 푸르다. 녹색은 날카롭고 동공을 자극한다. 눈이 시리다. 바람이 차다. 머리카락이 헝클어진다.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누르고 시선을 돌린다. 태양 아래 새싹이 돋을 나무들은 위태롭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흔들린다. 하늘에 금이 간다. 창백한 햇살에 금이 간다. 금간 몸들이 온 힘을 다해 서로에게 부대낀다.

몸에 이고 있는 가방이 무거워 숨이 막힌다. 셔틀버스는 운행을 중단했고 내리 1시간이 넘는 시간을 서있거나 걷고 있다. 사진을 찍고,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 사이에 숨어, 나는 묵묵히 걷는다. 간이 유료 버스가 지나갈 때마다 탈 걸 그랬다고 구시렁거리면서도 걷길 잘했다고 중얼거린다. 걷길 잘했다. 숨은 막히지만, 바람이 부는 풍경을 몸이 느낄 수 있어서 괜찮다.

왼 팔이 두 개인 그이는 제 자리에 면도칼을 살며시 두고 산다. 면도칼은 반짝이는 미소를 종이 아래 숨기고 있다. 면도칼의 용도를 고민한다.

면도칼:
-바느질을 할 때 실을 끊는 역할을 한다.
-면도칼이 칼(혹은 외과 수술용 메스)의 상징이라면, 신체의 잘못된 부분을 ‘교정’하는 역할을 한다.
-때때로 삶을 영위하는 힘을 주기도 한다.

면도칼을 품고 사는, 왼 팔이 두 개인 그이. 그이의 삶을 상상한다.

고등어란 작가를 기억한다. 몇 번이고 되뇌면서, 몸에 익길 바란다.

책과 책장

며칠 전 학교 근처의 어느 동네를 지나는 중이었다. 예전에도 몇 번 지나다닌 적이 있는 길이었다. 그 동네에선 얼추 2년 정도를 살았으니 아주 낯선 곳은 아니다. 나로선 놀랍지 않게, 그곳에 잡화를 파는 가게가 있다는 걸 그날 처음 깨달았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그 가게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 이렇게 빨리 깨닫다니… 랄까. -_-;; (내가 이사한 이후 그 가게가 생겼다기엔 얼추 10년은 그곳에 있었을 법한 분위기였다. 글고, 기억을 더듬으니 예전에도 그 가게를 본 거 같다. 확실하진 않지만-_-;;)

그 가게를 발견(무려 발견!)할 수 있었던 건, 내가 찾던 크기의 책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폭이 넓지 않고 6단으로 나뉜 구조. 玄牝에 책장을 새로 하나 들인다면 딱 좋을 크기였다. 그러니 내가 인식한 건 책장이었지 가게가 아니었다. 책장으로 인해 가게가 덩달아 인식되었을 뿐. ㅡ_ㅡ;; 저 책장을 사면 좋겠다고 중얼거렸을 때, 사도 괜찮을 핑계 거리는 많았다. 바닥에 쌓아둔 책을 깔끔하게 보관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니까… 바닥에 쌓아둔 책 중에 일부를 깔끔하게 보관할 수 있다. -_-;; 사면 안 될 이유는 별로 없었다. 책을 더 살 수 있고, 책장을 둘 자리가 있긴 하지만 그럴 경우 방문을 여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당장의 생활비야 부족해도, 간사비가 입금되면 그걸로 대충 수습할 수 있을 듯 하니 무시하자. 사면 안 될 이유로 당장 떠오르는 건 고작 세 개 뿐이었다. … 구차한 거 나도 안다. 말을 더할 수록 더 구차해질 뿐이란 것도 안다. 하지만…. 흑.

두어 달 전에 학교 도서관을 통해 주문한 책이 입수되었다는 메일을 몇 주 전에 받았다. 입수되어도 정리하고 여러 행정 절차를 거치다보니 열람하는데 시간이 꽤나 걸렸다. (개인주문도서의 경우, 대출예약을 하면 일찍 처리해주는데, 현재의 나는 책을 빌릴 수 없는 처지다. 그래서인지 열람하는데 시간이 오래걸렸다.) 책 내용을 확인하고선 제본하기로 결심했다. 속으로 몇 번이고 ‘미쳤다’고 욕했다. (출판본을 사기엔 하드커버의 백과사전이라 금액이 무시무시할 뿐만 아니라 현재 환율은 외국어 서적의 출판본 구매를 불가능한 상황으로 만들었다.) 책 제본이, 홀수로 제본할 때보다 짝수로 제본하면 단가가 떨어지는 경향이 있어 아는 선생님께 같이 하자고 찌르는 메일을 보냈는데 선생님도 하겠다는 답장을 줘서 기분이 좋았다. 같이 한다는 내용도 기분이 좋았지만, 그 선생님 역시 당장 필요하지 않아도 관심 영역의 책은 일단 소장하는 편이고, 그렇게 소장해서 종종 넘겨 보다가 도움을 받는 경우가 있기에 제본을 한다고 해서 더 좋았다. 나의 상황이 위로 받는 느낌이랄까. 아하하. ㅠ_ㅠ

‘나 왜 이렇게 사나’ 싶으면서도 읽고 싶은 책은 사고 있다. 과장 안 하고, 지금 玄牝에 있는 책을 모두 저축했다면 玄牝을 계약하며 지불한 보증금의 두 배는 모았을 거 같다. 과장하면 세 배. CD와 테이프를 안 사고 저축했으면 보증금과 비슷하거나 보증금보다 조금 더 많거나. 올 초, 통장에 잔고가 없어 생활이 완전 위태로웠을 때 이런 거 계산하고 있었다. 크크크. 그렇다고 후회하느냐면 그렇진 않다. 내 팔자려니 해야지. 이렇게 구시렁거릴 수 있는 것도 애정의 표현이잖아. 후훗.

암튼, 지금 내 안에 책장 하나 커다랗게 자리잡았다. 실제 구매하지 않고, 이렇게 자리 잡았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

+
누구나 알지만 아주 드물게 오해받는 것 하나. 책이 많다는 것과 책을 많이 읽는다는 건 완전 별개다. 내게 책은 장식일 뿐… ㅡ_ㅡV

그 가게

지하철역에서 8번 출구로 나와 직진으로 100여 미터 정도를 걸어간다. 아마도 ‘설마 저 곳이야?’ 라는 의심이 먼저 들 것이다. 그런 곳이다. 그곳은 유명세도 없을뿐더러 그저 그런 인테리어로 지나치기 쉬운 외양을 갖추고 있다. 상호는 전국에 백여 개는 될 법해서 체인점으로 오해받지만, 체인점은 아니다. 죽을 전문으로 하는 곳이지만, 요즘 추세가 그렇듯 죽만 파는 건 아니다. 이것저것 각종 영양음식을 갖추고 있다. 각종 음식을 갖추고 있는 곳이 그러하듯 사람은 별로 없고, 식사시간에도 주인과 점원을 합한 수보다 손님이 많은 경우는 드물다. 주인 겸 조리사, 점원, 주인의 가족들이 모두 가게에 나와 식탁을 하나씩 차지하고 있는 날도 있다. 그래도 손님이 앉을 자리가 없어 누군가가 자리를 내어줘야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런 진부한 풍경에도 불구하고 그곳의 죽은 맛있다는 사소한 문제가 있다. 음식점의 음식이 맛있는 게 무엇이 문제겠느냐만, 어느 전문가가 진단하길 이 음식점의 유일한 문제는 지나치게 맛있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는 풍문이 있으니 그러려니 하자.

그곳을 찾는 손님들은 대체로 몇 달에서 몇 년 간 일주일에도 몇 차례 들락거리는 단골들이다. 어떤 손님은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곳에 살지만 죽을 먹으러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찾는다. 이쯤 되면 맛으로 소문이 날 법도 하다. 어지간한 음식점은 모두 소개가 되고 있는 이 시대에 이 정도 음식점이 소개가 안 되었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단골들이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는 이들이라거나, 블로그를 운영하지만 방문자가 일주일에 한두 명인 곳이라서가 아니다. 놀랍지 않은 사실 중 하나는 단골 중엔 맛있는 음식과 식당을 소개하는 기자도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가게가 한산한 이유는 누구도 소문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이것이다. 가게에서 음식을 먹어 본 이들은 그 누구도 그곳과 관련한 정보를 누설하지 않는다. 서로 합의를 한 적도 없고, 누가 단골인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모두 그 가게와 관련해선 침묵한다. 누구도 없을 법한 시간에 음식을 먹고 조용히 나간다. 행여 아는 사람들이 우연히 마주친다 해도 서로에게 말을 거는 경우는 없다. 그곳에서 식사를 하는 이들은 음식을 주문할 때가 아니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는 사람이 와도 인사조차 하지 않는다. 일종의 불문율이다.

특히 유명한 메뉴는 팥죽이다. 가장 기본적인 음식이 가장 만들기 힘든 음식이란 건 상식. 그곳의 팥죽은 달지 않으나 음미할수록 단맛이 우러나고, 약간 텁텁하면서도 개운한 느낌이다. 설탕이나 다른 조미료를 일절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팥 특유의 단맛을 느낄 수 있다는 건 그 가게만의 자랑이다. 허나 자랑이면 뭐하나. 아는 사람만 아는데. 아는 사람들끼리도 모른 척 하는데.

그곳이 들키지 않고 숨어있을 수 있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근처에 유사한 이름의 가게들이 몇 더 있어, 그 가게를 찾다가 좀 더 근사한 인터리어의 엉뚱한 곳으로 가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동네 정보지를 제외하면 어디서도 그곳과 관련한 정보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 달에 방문자 한 명 뿐인 블로그라도 인터넷에 소개하면 어느 정도 지명도가 생기기 마련. 하지만 그곳과 관련한 기록은 오직 단골들, 그곳에서 음식을 먹은 적 있는 이들의 기억에만 남아 있다. 단골들은 조심성이 강해, 자신들만 보는 수첩에도 그곳과 관련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 가게의 또 다른 문제는 이거였다. 단골들은 이곳이 유명해져서 서비스 질이 떨어지거나 음식의 질이 떨어질 것을 염려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곳의 서비스 질은 더 이상 떨어질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그 가게 앞을 지나다니던 사람들은 손님이 없고, 서비스가 형편없고 가게가 너무 지저분해서 망했으려니 했다. 하지만 단골들의 지나친 조심성이 현상유지조차 힘들게 했다는 게 정설이다. 그러니 앞서 언급한 전문가의 진단은 정확했다. 가게의 음식이 너무 맛있다는 것이 그 가게의 핵심적인 문제였다. 그 뿐이다. 그 가게다운 결말이었다. 마지막까지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면, 단골들 누구도 드러내어 애도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들리는 풍문에 따르면 그 음식을 못 잊어 주인을 찾아 몇 년째 수소문을 하고 있는 단골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풍문일 뿐, 실체를 접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주인을 수소문하는 행위조차도 조용히, 비밀리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단골들은 가게 이름이나 가게와 관련한 어떤 정보도 누설하지 않으면서 가게의 주인을 수소문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 역시 그 가게의 이름을 쓸 수가 없다. 뭐, 그런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