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여름만 되면 유난히 면역력이 떨어져. 그래서인가봐. 묻어둔 기억들이, 침전물처럼 가라앉아 있던 기억들이, 작은 진동에도 다 일어나는 건.

살아 있었으면 좋겠어. 끊임없이 흔적 찾기 놀이를 하지만 찾으면 사라지고 다시 찾고 사라지는 날들의 반복. 이런 무미건조한 일상을 살아.

그저 살아 있었으면 좋겠어. 시제가 불일치하는 바람을 품고 있어.

집으로 돌아오는 밤

소나무 위에 손톱달이 떴다. 이런 풍경을 볼 때마다, 작은 연못 옆에서 어떤 색깔의 물병 혹은 약병을 들고 있는 마녀가 떠오른다. 저 소나무 아래에 마녀가, 키득거리며 웃고 있을 것만 같아, 슬쩍 놀러가면 신나게 놀 수 있을 것 같다.

어릴 때 읽은 소설들에 따르면, 마녀나 드라큐라는 위험한 존재가 아니라 악동에 너무도 친밀한 이미지들이다. 괜히 장난치면, 킥킥, 웃으면서 신나게 놀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 손톱달이 뜬 날이면 연못에 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도 꺄르르 웃으면서 어딘가로 달려갈 것만 같은 마녀를 만날 것만 같다.

… 따라갈 걸 그랬나?

낮은 그늘을 따라

길은 두 갈래였다. 어느 쪽으로 가도 거리는 비슷했다. 그래도 자주 가는 길은 있기 마련. 왜 그 길로 다녔을까? 다른 길도 있는데 왜 그 길로 다녔을까. 한참 지난 지금에야 묻는다, 왜? 그렇게 항상 다니던 길이 있지만, 태양볕이 뜨거운 여름이면 다른 길로 다녔다. 주택가 낮은 그늘을 따라 걸었다. 낮은 그늘을 따라 무더운 태양볕을 피해 걸었다. 그러니 여름뿐이었다.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를 기다린다는 핑계로 꽤 오랫동안 그곳에 서 있곤 했다. 태양볕을 좋아한다. 그때도, 지금도. 눈을 뜨고 태양을 바라보는 걸 좋아했다/한다. 눈이 아파도, 그래서 눈물이 날 때에도 자꾸만 태양을 바라봤다. 종점이기도 한 정류장에서 버스가 오길 기다렸지만, 정말 기다린 건 버스가 아니었다. 여름이었고 태양볕이 따갑다고 느껴지면, 나무 아래에 서 있기도 했다. 태양을 보면서도 그 길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그러니, 그 몇 번은 모두 요즘처럼 무더운 여름의 일이었다.

10년도 더 지난날들. 몇 해 전부터인가, 태양볕을 맞으며 걷기 좋아하는데도, 이렇게 여름이 오면 낮은 그늘을 따라 걷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넓은 그늘이 아니라 태양볕을 간신히 피할 수 있을 것 같은 낮은 그늘로 걷기 시작했다, 그때, 손으로 태양볕을 가리며 낮은 그늘로 걷던 너처럼. 그리고 몇 년을 기다리며, 그 버스정류장에서 태양과 골목 사이를 어슬렁거리다 나무 아래 숨어 숨막혀하던….

준, 그리고 신애가 코고는 소리를 내는 장면들. 그리고 태양볕의 서늘함 혹은 스산함.

낮은 그늘을 따라 걸으면 나오는 기억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