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팡이가 몸을 타면

요즘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멍하다. 몸의 한 곳이 풀린 것처럼 멍하다. 쓰고 싶은 글은 많은데 글쓰기를 눌렀다가도 그냥 접는 경우가 많다. 쓰고 싶은 말은 많은데 그냥 몸에서만 놀다가 문자로 표현하기도 전에 소멸한다. 아니 마냥 소멸하지는 않고 글을 쓰겠다고 자리에 앉기 직전까진 활발하다가 글을 쓰겠다고 앉으면 소멸하고 다시 접으면 몇 시간 지나 몸을 타고 논다.

[Run To 루인]에도 여러 번 적었지만, 여름을 특히 싫어한다. 여름에 태어나서 여름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어릴 땐, 딱히 여름을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딱히 좋아하는 계절도 없었고 싫어하는 계절도 없었다. 하지만 몇 해 전, 또 다시 우울증에 시달리다, 벽에 핀 곰팡이 꽃에 무너지며, 온 몸에 곰팡이 꽃이 피는 환각에 시달리며 여름은 악몽이었다. 락스로 청소하면 간단한 일이었지만, 그럴 힘이 없었다. 마냥 무력하게 무너지기만 했다. 그 전 여름엔 냉장고에 들어가는 상상으로 종일을 보내기도 했다. 전기밥솥의 밥은 곰팡이로 가득했지만 그걸 방치하면서도 어쩌지 못했던 시절이기도 했다. 모두 여름에 있었던 일이다. 여름이 온다는 건 곰팡이 꽃이 핀다는 의미다.

그나마 작년은 무난하게/무사하게 지나간 것 같다. 하지만 올해 다시 무력하게 보내고 있다. 이번 여름엔 아침을 해먹지 않겠다고, 8월까지는 모든 식사를 (김밥을 중심으로) 사먹겠다고 다짐한 순간부터 이미 예감한 일인지도 모른다.

헛된 환상 혹은 망상이 우울을 부른다. 아직도 몸에서 곰팡이 꽃이 피는 환각에 시달리곤 한다. 때로 강박적으로 손을 씻는 것도 그렇다. 곰팡이 꽃이 만개한 곳에 불을 붙이면 ‘확’ 하고 일순간에 타오른다. 그렇게 몸에 불을 붙이면 모든 것이 사라질까? 석유 없이도 온 몸에 불을 붙일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여름이다. 장마가 지나간 여름.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순간이 있다는 것에 안도한다. 앞으로도 종종 글을 쓰지 않고 지나가는 날들이 있겠지만, 쓸 수 있을 때 쓰고 싶다. 이 자락마저 놓으면, 상상하기 싫다. 그저, 우물 저 아래 앉아, 우울해, 라고 외치는 기분이다. 모든 소리는 우울 안에서 맴돌 뿐 어디에도 닿지 않는 걸 알지만 그래도 외치는 기분이다.

하긴. 이러고 나면 좀 괜찮아 진다는 걸 안다.

이젠 당신과 상관없는 일이겠지….

노트북에서 외장형 저장장치로

지난 주말 학교에서 노트북을 빌려 玄牝에서 잠시 사용했다. 하지만 잠깐 사용하다가 관뒀는데 불편함 때문이다. 그냥 좀 더 피곤한 느낌이랄까. 뭐 요즘 농담처럼, CD 드라이버 필요 없으니 50만 원대 100기가 용량의 노트북이면 딱 좋겠다고 말하곤 있지만 그다지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다. 어차피 논문을 쓸 때까지, 아니 논문 초고도 볼펜으로 쓸 상황에서 노트북이 얼마나 필요한지도 의문.

여기서 남은 선택은 두 가지 정도인데, 하나는 나스타샤를 고치는 것. 다행히 두 개의 드라이브로 나눈 상태라 파일 손실은 적을 것 같다. 얼마간의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긴 하지만.

다른 선택은 외장형 HDD와 외장형 RW. RW는 노트북을 사도 어차피 사야하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외장형 HDD는 300G의 가격이 루인이 상상했던 것보다 싸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 셈이다. 만약 둘 다를 구매한다면 노트북이 필요 없는 셈.

그러니까 문제는, 외장형 HDD와 RW가 쓸만한가 이다. 당장 살 예정은 아니지만(몇 달 걸릴지 모른다는 얘기다 ㅡ_ㅡ;;;) 몇 해 전엔 비추였던 흔적이 몸에 있어서 쉽게 결정을 못하고 있다. 어떡할까나. 역시나 병원에 가는 것이 최고일까.

여름, 더위, 우울

더위가 밀려오면 몸이 느슨해진다. 여름에 태어난 사람은 더위를 잘 견디고 겨울에 태어난 사람은 추위를 잘 견딘다는 말을 들은 흔적이 몸에 있다. 하지만 루인은, 루인의 주변 사람들은 그 반대다. 겨울에 태어난 사람들은 추위에 약하고 여름에 태어난 사람들은 더위에 약하고. 더위에도 약하지만 루인이 경험하는 우울증의 상당 시간은 여름이었다. 지금에야 그 시절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구나, 했던 중학생 시절의 첫 우울증도 여름이었고 대체로 여름이 겨울보다 더 심했던 것 같다.

지난 주 들은 “처음 만나는 정신분석2” 강의 내용 몇 가지를 떠올린다. 연애는 부모와의 관계를 반복하는 것이라는 말, 우울증은 대상을 충분히 애도하지 못하고 대상과 자신을 동일시한, 그 대상을 상실해서 대상이 누구인지도 잊어버린 자기 학대에 가깝다는 말.

그렇다면, 루인은 왜 루인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에겐 루인도 관심이 없고 연애란 감정을 감지할 수 있는 관심을 보이는 사람에게도 관심이 없는 걸까. 이른바 우정이라고 말하는 정도의 감정, 물론 친구들마다 나누는 감정의 정도는 조금씩 다르지만, 언제나 그 어느 선을 아슬 하게 타고 노는 경향이 있다. 루인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에겐 괜히 감정을 줬다가 거절당할까 두려워서 무관심한 걸까. 아니면 루인도 그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걸까. 어릴 때 부모와는 어떤 관계를 가진 걸까. 어떤 관계가 이런 식으로 일정 이상의 감정에서 도망치도록 하는 걸까. (하지만 꼭 부모 탓일까. 프로이트는 중산층’이성애'”정상”가족의 모델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이런 설명에 따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설명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틀 중의 하나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재밌기는 하다.)

혹은, 재미있게도, 각별히 좋아하는 사람들의 이름은 닮아 있다. 한글 자음이니셜은 순서만 조금씩 다를 뿐 완전히 똑같다. 예전에 읽은 한 책에선 유전자의 60% 정도가 개인을 결정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런 것도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는 걸까. 유전자 모양이 이런 자음처럼 생긴 걸까. 혹은 상실한 후 충분히 애도하지 않아서 루인과 동일시한 그 이름이 아직도 예민한 촉수로 감각하는 걸까.

며칠 전부터 별다른 이유도 없이 감정이 떨어지면서 우울해하고 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정도인 걸 봐선 아직은 무난하게 견딜 만 한가보다. 하지만 요즘 듣고 있는 여이연 강좌는 “안티고네와 주이상스”고 주디스 버틀러를 하다보니 우울증이 자주 등장한다. 우울증은 대상의 상실로 인해 왜 우울한지 조차 알 수 없는 것. 괜찮은 의사를 소개 받아 약물치료라도 받을까 하는 갈등을 살짝 했다. 하지만 우울증 치료제라는 것은 사실 상 감정을 느낄 수 없게 하는 것. 우울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우울도 기쁨도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게 하는 것. 그렇다면 무엇을 치료하는 것일까? 하긴, 약물로 치료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웃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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