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단상/감상

졸업식장에도 갔다. 사실 졸업식이란 거, 참 번거로운 일이고 별 감흥도 일지 않는 일이라 참석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날짜 지나서 졸업장이나 찾으러 가는 정도로 간단하게 하고 싶었다. 더구나 학부로 학생 신분이 끝나는 것도 아니니까-_-;;;

하지만 부모님은 그렇지 않았다. 반드시 오신다는 말 앞에서 마냥 싫다고만 할 수도 없었다. 그것이 루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지어) 식장에도 갔다. 하지만 모자(학사모?)는 쓰지도 않았다. 날라 온 공문에는 모자를 써야한다고 했지만 루인은 모자를 너무 싫어하니까. 물론 행사를 듣지도 않았다. 이런 날 지지가 능력을 십분 휘했다(부피가 커서 가방에 넣고 다녀야 하는 음악재생기기는 칠칠치 못한 루인의 행동으로 연결 선이나 이어폰이 어딘가 걸려서 자주 상했기에 목걸이형 mp3p는 꿈이었다;;;). 한쪽 귀에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즐겼다. 그러다 지겨워서 나왔다.

졸업식에서의 축사를 듣다 느낀 끔찍한 말은, 학적이라는 인종주의였다. 학적은 결코 바꿀 수 없는 중요한 것이라는 둥, 졸업한 학교를 자랑스럽게 여기라는 둥 대학이 한 개인의 중요한 정체성으로 간주하는 발언들을 들으며, 학벌과 출신지역이 인종으로 여겨지는 한국사회의 현실을 다시금 절감했다.

아, 특이할 사항은, 루인을 오프라인으로 아는 사람은 알듯, 사진 찍는 걸 무지무지 싫어하지만, 오늘은 여러 장 찍었다. 부모님과만 찍은 것이 아니라 같이 졸업하는 친구와도. 그럴 수 있었던 이유 중엔 사진기가 디카가 아니라 필카이고 필름을 루인이 챙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꼭 이런 이유만도 아닌데, 아빠가 카메라를 챙겨오기 전까지 제발 카메라가 없어서 사진을 찍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말에 엄마의 표정이 많이 섭섭한 듯 했다. 이 표정. 그리고 사진기에 삼각대(?)까지 챙겨온 아빠의 즐거운 표정. 이 두 표정 앞에서 사진 안 찍을래요, 할 수가 없었다. 루인과 부모님의 이런 복잡한 관계-서로간의 애증이 교차하는 관계 속에서도 이런 날엔 그냥 가장 무난하다고 여겨지는, 누구나 한다고 말해지는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어쨌거나 루인이 할 수 있는 최선임을 안다. 항상 속만 썩이고 불투명한 미래로 인해 걱정만 안겨드리니 이런 일이라도 하지 않는다면, 루인이 잔인하다고 느꼈다. 루인의 잔인함을 직면하고 싶지가 안아서가 아니라 잔인함을 표현할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루가 지나간다. 달라질 것은 없지만 그냥 재미없는 낯설음을 흘러 보낸다.

세탁기에겐 어떤 이름이 어울릴까

자취를 시작 하면서 사지 않은 것 중엔 세탁기도 포함한다. 물론 일 년도 못 쓰고 고장 난 중고 냉장고 덕분에 이 년 넘는 시간을 냉장고도 없다시피 생활을 했으니 냉장고도 없다고 해야 할까.

지금의 玄牝으로 이사한 후, 부산집에선 냉장고 사라고 성화였다. 심지어 사준다는 말까지 할 정도로. 하지만 냉장고가 필요했던 이유는 생활 방식을 바꾸면서부터였다.

첫 번째 玄牝에 살며 처음엔 자취생 같지 않다는 얘길 들을 만큼 너무도 잘 챙겨먹고 살았다. 학교식당 한 끼 밥값이 1500원 안팎이지만 루인이 먹지 않는 음식이 많기에 그냥 집에서 해먹고 살았다. 한 6개월을 그렇게 지냈을까. 여름이 왔고 별다른 이유도 없이 그간의 끈이 끊어졌다. 반지하의 창문은 어두운 색 포스터로 가렸고 밥이 남아 있는 전기밥솥에선 곰팡이가 만개했지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건 무력함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알면서도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화장실 나무문에 핀 작은 곰팡이 꽃에도 절망하고 무너져선 울기만 했다. 우울증의 시작이었고 한참 후에야 알았는데 그땐 삼재였다. (삼재는 “삼 년간 재수 없다”는 말의 준말인가? 크크크;;;;;;) 몇 달을 그렇게 살다가 빛이 잘 들어오는 곳으로 이사하면 괜찮겠지 해서 계약기간을 절반도 안 채우고 1층집으로 이사했다.

이사는 순탄치 않았다. 애초 정했던 집은 주인집의 사정으로 취소되었고 이사날짜를 정하기 며칠 전에야 즉석해서 정했다. 문간방이었다. 대문을 나서 30초(!)면 지역할인마트가 있고 비슷한 거리에 너무도 맛있는 김밥집이 있고 큰 골목엔 가게가 있어 장보기 좋은 곳이었지만, 루인의 방-두 번째 玄牝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혼자 숨어 살기엔 좋지만 우울증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시도는 허사였다. 곰팡이 핀 밥솥의 악몽으로 밥은 일절 해먹지 않고 사먹기로 결정했고 이미 고장 난 냉장고(여름에 따뜻하고 겨울에 시원한 기능이 최고였다-_-)는 좁은 방 한 곳을 차지하고 있었다. 1층이면 햇빛이 들어오는 곳이라고 믿었는데 그렇지 않았다. 방의 작은 창문은 좁은 골목을 향해 있었고 창문을 열면 밖에서도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이건 최악이었다. 여름에도 창문을 열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곰팡이는 조금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몸을 덮을 상황이었다. 우울증은 더 심해졌고 혹시나 해서 사둔 버너는 가스가 새서 한동안 심한 두통과 구토증을 앓기도 했다.

우울증이 조금씩 괜찮아질 즈음, 두 번째 玄牝의 계약기간이 다되어 가고 있었다. 연장할 의사는 조금도 없었다. 무조건 이사였고 2층 이상의, 여름에도 창문을 열고 살 수 있는 곳을 찾았다. 그곳이 지금의 (세 번째) 玄牝이다. 옥탑.

옥탑은, 그러니까, 자취생으로선 가장 이상적인 공간일 수 있다. 햇빛 잘 들고 빨래를 널 수 있는 ‘마당’이 있으니까. 보는 순간 몸에 든 것은 아니지만 살수록 정이 가는 곳이다. 비록 여름에 따뜻하고 겨울에 추운 고장 난 냉장고 같은 옥탑의 ‘장점’은 있지만.

세탁기 얘기로 시작하더니 ‘딴’ 얘기를 하는 건, 이런 이유가 세탁기를 사고자 하는데 중요한 이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전까진 손빨래를 했다. (루인이 말하는 손빨래는 얇은 소재나 특별한 소재라서 손빨래를 해야 하는 그런 옷가지, 양말 같은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청바지나 여름 이불 같은 것 까지 포함한다. 물먹은 청바지의 무게는 상상 이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탁기와 함께 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 건 아니었다. 그냥, 토요일 아침마다 일상처럼 빨래를 했다. 왕가위의 어느 영화에서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바지를 걷어 올린 발로 마구마구 밟는 그런 ‘낭만적인’ 일은 아니지만, 한동안은 그런 ‘낭만’으로 빨래를 하기도 했다. 손빨래를 그렇게 ‘낭만’적으로 그릴 수 있는 사람은 분명 손빨래라곤 한 번도 안 해 봤을 거라고 궁시렁 거렸다. 그런데도 세탁기와 함께하고 싶다는 바람이 없었다니, 신기한 일이기도 하다.

세탁기와 살고 싶다는 바람을 품기 시작한 건, 다름 아니라 루인이 아침밥을 하고 있는 시간에 주인집이든 다른 세든 사람이든, 아침 일찍 빨래를 널러 ‘마당’에 올라오는 모습을 접하면서부터다. 손빨래를 하면서 싫었던 건, 힘든 것이 아니라 많은 시간을 사용한다는 점이었다.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시간 강박적인 루인에게, 아침 일찍 빨래를 널러 올라오는 모습은 부러움, 그 이상이었다. 루인은 빨라도 낮 시간은 되어서야 ‘마당’에 널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여섯 달 가량을 세탁기를 향한 바람을 품고 살았다. (이런 거 보면, “사고 싶다”에서 “입금완료”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하지만 일시불로만 구매하는 루인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면도 있다.)

달라진 건, 주말에만 가능했던 빨래가 평일에도 가능하다는 것만이 아니다. 놀랍게도 조심성도 떨어졌다. 그전엔, 무슨 행동을 하더라도 옷이 더러워질까봐 조심조심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언제든지 빨래를 할 수 있으니까, 라고 바보처럼 중얼거리면서. 뭔가 묘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어쨌든 이런 이유로 세탁기에도 이름을 붙이기로 했다. 어떤 이름이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며칠 사랑스러운 고민에 빠지겠다.

#세탁기 산 얘기를 쓸까말까 했다. 소비를 전시하는 건 아닐까 해서 꺼리기도 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세탁기가 있는 생활을 했던 사람 혹은 손빨래 기억이 없는 사람은 아마도 경험하지 못하리라 싶은 일이었는데, 실제 ps와 얘기를 나누면서도 이런 경험을 했다. 루인 역시 부산집에 살 땐, 세탁기라는 생활물건과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전혀 몰랐다. 그래서 나중에 다시 찾아 읽으면 재밌겠다 싶었다. 오직 지금 이 순간에만 쓸 수 있는 그런 느낌의 글이 있기 때문이다.

가시야, 예측할 수 찾아온 안녕.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어요. 며칠 전 맡긴 제본한 책이 루인의 몸에 딱 들게 되었거든요. 한 권은 사진이 중심인데, 사진 복사는 별도로 해야 한다는 아저씨의 말처럼 너무도 선명하게 잘 나왔더라고요. 글자들과 함께 있는 사진들은 대체로 흐리거나 희미하게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그 한 권만은 사진이 잘 나와서 너무너무 기분이 좋았죠. 제본 맡기는 곳은 항상 가는 단골이죠. 자주 가는 곳이라 더 신경 써 준건지, 루인의 몸에 들게 해주니 자주 가는 것인지, 이젠 헷갈리지만 루인은 단골을 선호하는 편이에요.

새로운 자극이 없으면 금방 지루해 하기에 항상 새로운 걸 찾아다니는 편이죠. 하지만 가게만큼은 단골을 선호해요. 주인과 루인이 서로의 취향을 알게 되는 순간, 편해지거든요. 루인의 요구를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말할 필요가 없잖아요.

그래요. 아침엔 기분이 좋았어요. 또 다른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글쎄요. 그냥 무덤하게 지낼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그랬어요.

갑자기 당신이 떠오른 건, 그런 순간이었어요. 라디에이터에선 뜨거운 열기가 나오고 밖에선 찬 바람이 불고, 북향인 사무실은 어두웠지요. 즐거운 책을 읽고 있었어요. 그런데 당신이 떠올랐어요. 오랜만이에요.

당신을 떠올린 건 너무 오랜만이죠. 오랫동안 당신을 떠올리지 않았거든요. 항상 몸의 구석 어딘가에 숨어 있었죠. 잊은 줄 알았어요. 몸 한 곳이 비는 순간이 와도, 그때그때의 옅은 우울함으로 지냈으니까요.

잘 지내시나요? 아쉽게도 당신과 공유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루인을 기억하시는지 물을 수도 없네요. 그러니 당신이 사는 세상엔 루인이란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죠.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그런 존재. 하지만 당신이 잘 지내는지 궁금해요. 어떤 식으로 살고 있는지, 이런 날엔 궁금해요. …이런 관습적인 궁금함이 정말인 건 아니에요. 그저 한 번 쯤은 이런 질문도 해야지, 해서 하는 것뿐이죠. 당신을 향한 궁금함 같은 건 없어요. 그저 어디선가 당신의 삶을 살아가겠지 하는 믿음만이 있을 뿐이죠. 혹은 그런 바람인가요. 다시 만날 수 있길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런 순간이 있을 수 없다는 것도 알고, 그런 순간이 온다 해도 피할 걸 알기에 당신의 안부 같은 건 궁금하지 않아요. 그래요. 너무 이기적이지만 그저 당신이 떠올랐다는 것, 그 뿐이죠. 그로 인해 조금은 우울해졌고 보고 싶기도 했지만 볼 수 없음을 알기에 가지는 보고 싶음이지 정말 볼 수 있다면 보고 싶지 않을 거예요. 당신도 알겠지만.

오랜 만에 떠올라서 반가웠어요. 당신의 이름을 적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만큼. 그래서 다이어리에 당신, 이라고 마구마구 적었죠. 당신의 진짜 이름은 적지 않아요. 그건 이제 그다지 의미가 없으니까요. 행여 누군가 루인의 다이어리를 읽게 된다하더라도 당신을 들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죠.

당신과 놀며 장을 봤어요. 주문했던 세탁기가 열하루 만에 도착하더니 주문한 옷이 아직도 오지 않아 궁시렁 거리면서도 당신이 떠오르면, 슬퍼요. 잘 지내세요. 당신이 사는 곳은 이곳보다는 따뜻한 곳이지만 그곳은 또 그곳대로 추우니 감기 조심하시고요. 마지막 인사일지 내일 또 찾을지는 알 수 없지만, 몸이 즐거운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