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눈, 유리

#
며칠 전, 세탁기를 주문하고 돈이 남았다. 간신히 맞춘 금액이었는데, 10% 할인쿠폰이 생겨서 그 만큼의 금액이 올앳카드에 남았다. 무얼 할까 한참을 갈등하다가 책을 사기로 했다. 그래서 어제, 바쁜 와중에도 신나는 몸으로 교보에 들렀다. 계획한 책을 사고 계산대로 가는 순간, 아하하, 카드를 안 챙긴 것이다. 바보바보바보. 순간 아찔함에 멍해졌다. 그렇잖아도 현금이 부족한데 안 산다고 할 수도 없어 그냥 샀다. (흑, 찾아야 할 제본 책이 한 권에, 할 예정인 책이 네 권인데ㅠ_ㅠ 아, 루인이 책을 읽는 습관 때문에 출판사 판본과는 별도로 제본할 수밖에 없는 책이 있다.)

이 안타까움은 여이연 강좌를 듣고 玄牝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발생했다. 양말이 11켤레 4,000원에 파는데, 엉엉, 지갑에 4,000원이 없었다. 양말 사고 싶었는데. 잉잉잉. 정말 순간적으로 우울했다.

#
여이연 강좌를 듣고 나오는데, 눈이 내리고 있었다. 주디스 버틀러 강좌라 트랜스젠더/트랜스섹슈얼리티와도 관련 있는 내용으로, 신난 몸으로 듣고 나오는데 눈이라니. 너무 좋아 입을 벌리고 혀를 내미는데, 아콩, 눈이 눈으로 들어가 질끔 눈을 감았다.

같이 있던 분의 표현처럼, 뭐랄까, 크리스마스이브 같은 느낌이었다. 이번 겨울 들어 눈이 이렇게 많이 내리는 날 밖에서 눈을 맞고 있기도 처음이었다. 어디선가 캐롤이라도 들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정말로.

#
헤어지고 혼자 남아, 지하철을 갈아타는 길에 귀에선 [푸른새벽]의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눈을 감고 걸으며 유리遊離했다.

음악을 듣고 있을 때면 그렇지 않을 때보다 더 자주, 세상과 유리하는 상태에 빠진다. 마치 영화에서 차창 밖으로 풍경이 지나가는 장면처럼 루인 밖의 세상은 유리창 너머의 다른 세상인 듯한 느낌. 루인은 길에서 듣는 음악을 O.S.T.라고 부르곤 하는데, 유리창을 통해 세상과 괴리를 느끼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느끼면서 그 장면에 빠져들어 바라보는 관객의 느낌을 동시에 가지기 때문이다. 이럴 때면 이대로 증발하고 싶은 유혹/충동에 빠진다.

여성학과, 꿈과 막재

#
인터넷이 되지 않는 곳에서 며칠을 지냈는데, 그런 생활이 더 좋았다. 블로그도 잊고 온라인으로 연결되는 모든 걸 잊고 지내는 삶의 편안함. 언젠가 인터넷을 아주 끊을 수도 있을까? 불가능하겠지만 그러고 싶다는 바람을 품는다.

설이라고 부산엘 갔다 왔다. 다행인지 친척들을 거의 안 만났다. 후후후. 하지만

#
오랜만에 만나면 별로 할 얘기가 없기에 요즘 어떻게 지내냐, 졸업하면 뭐 할 거냐 라는 질문을 형식적으로 하곤 한다. 좀더 다른 질문을 하면 안 될까 하면서도 딱히 더 물을 얘기도 없다. 그저 가볍게 질문하면서 괜히 관심 있는 척 하려는 내용들이지만 그런 내용이 때론 짜증과 상처가 되기도 한다.

암튼 대학원에 간다고 하니 무슨 과냐고 묻는다. “여성학 협동과정”예요.

지난 10월 즈음 대학원 면접을 본 것 같은데도 여직까지 이성애혈연가족들도 루인의 전공학과가 어딘지 몰랐다. 이번 설에야 비로소 말했다. 반응은 제각각이었지만 ‘평범’했다. “못 가~~!!!”라는 반응이나 상당한 반대를 걱정했는데.

“엄마”는, 학부 성적표들에 여성학 과목들이 많이 있었기에 그르려니 하며, 졸업하면 취직은 할 수 있느냐는 걱정만 하셨다. 졸업하고 제 밥벌이 정도는 할 수 있는지가 걱정이셨다. “여러 가지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요” 라고 얼버무리고 말았다. 학위논문의 내용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고 하자 먹고 살 수 있는 일로 해라는 걱정만 하셨다. 하지만, 루인이 하려는 전공으론, 크흑, 먹고 살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심지어 대학 강사 노릇도 힘들 것 같은 걸요. 그래도 좋은 걸 어떡해요.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어떻게 찾아봐야죠.
“아빠”는 “여성학?” 하시더니 별 말이 없었다. 이런 반응은 일종의 복선이었다.
친척들을 별로 안 만났지만, 일이 있어서 몇 명 만났고 사촌들도 몇 봤다. 사촌들에게 “여성학 협동과정”이라고 말하니, “여성학…, 뭐?” “협동과정” “무슨 과에 갈 건데?” “여성학 협동과정이 과 이름이에요.” 그랬다. 다들 여성학에 대해 잘 모르는 상황이었다. 페미니즘예요, 라고 했으면 더 빨랐을라나. 풋.

이런 반응의 일부는 학부 전공이 수학과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한 사촌은 교수 할 거냐고 물었지만, “과연?”이라고 말하며 웃고 말았다. 교수엔 관심도 없다. 어떻게 해서 하게 된다면 살짝 고민하겠지만 별로 그럴 가능성도 없다. 그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서 그것을 살려서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 딱 좋겠다. 박사인 또 다른 사촌은 교수나 뭔가 출세하겠다는 몸으로 공부하면 과정을 이수할 수 없다며 하고 싶은 걸 하라고 했다. 유행이라고 인기 있다고 뭔가 출세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교수가 되어야겠다고 이것저것하면 결국 아무것도 안 된다고. 좋아서 즐거워서 하고 싶어서 선택했다고 하니 잘했다며 지지해줬다. 고마워.

같은 학교에 가느냐는 질문도 있었다. 그래요. 생긴지도 얼마 안 되고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학교에 간다. 그래서 다행이다 싶다. 한편으론 행정적인 일부터 기타 등등의 여려 가지 이유로 피곤하지만 이런 상황이 자원이 될 수도 있다.

#
친척들을 만난 건, 설날 49재가 있어서 간 절에서였다. 작년 겨울 어느 날, 망자의 소식을 적은 흔적이 이곳에 있다. 설이 49재의 막재였다. 염불소리를 들으며 꿈을 떠올렸다. 높은 산에 뒷짐 지고 있던 모습. 그 산은 북망산이었을까. 뒷모습이 참 외롭다고 느꼈다. 살아서 고생만 하다 돌아가셨지만 죽어서나마 좋은 곳에 갔을 거라고 믿는다. 외롭다고 느꼈지만 그곳은 나쁘지 않은 곳이었으니까.

이런 얘길 사촌들에게 하고 싶었지만 하지 않고 엄마와만 나눴다. 또 꿈 꿨냐며, 루인은 지장보살과 관련이 있단다. 아하하. 심지어 전생엔 스님이었단다. 아하. 그래서 망자의 소식을 미리 접하는 걸까, 했다.

루인은 종교가 없지만 이성애혈연가족과 그 친척들은 대부분이 불교와 관련이 있다. 그래서 전생에 스님이었나 하며, 기독교나 천주교 집안이었거나 유럽이나 미국인이었다면 신부나 목사라고 했겠지, 라며 웃고 말았는데 그게 아님을 깨달았다. 전생엔 사람이었을 수도 있고 동물이나 식물 혹은 돌이었을 수도 있는 일이다. 전생에도 한국이나 불교가 있는 동양에서 태어났다는 보장이 없다. 그러니 현재와는 상관없이 전생엔 스님이었나 보다. 그래서 절이 편하고 한땐 아주 잠깐이나마 스님이 될까 했었나보다. 비단 절뿐만 아니라 종교 건물은 대체로 편하다.

#
많이 걱정했던 전공공개는 의외로 쉽게 끝났다. 그런 거다. 어려울 거라 걱정했는데 의외로 쉽게 풀리고 쉽겠거니 했는데 의외로 꼬이고.

선물, 고마워요 +

예상치 않은 건 아니지만-_-;; 정말 고맙고 멋진 선물을 받았어요. 일명 졸업 겸 입학 선물 🙂

소설 [시모츠마 이야기-살인사건 편],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그리고 콩과 … 죄송해요. 쓰기 전까지 알았는데 쓰려는 순간-_-;;; 정말 예상치도 못한 멋진 선물들로 자꾸자꾸 즐거워요. 헤헤.

[시모츠마 이야기-살인사건 편]을 받았으니 내일은 오랜만에 교보에 가서, [시모츠마 이야기]를 사야겠어요. 영화로 접했지만 그래도 책으로 읽는 건 또 다른 느낌이니까요. 우후후후후. 이렇게 선물을 받은 기억이 참 오랜만이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참, 종이가방에 넣어주신, 푸우 그림의 반창고는 다이어리에 담았답니다. 일년 내내 붙이고 다닐게요.

[#M_ +.. | 홍보;;.. |
글 내용과는 상관없이;;;
여이연에서 콜로키움을 하는데 주제가 상당히 끌려요. 그래서 홍보도 할 겸 큭큭
주제는 [레즈비언 페미니즘과 트랜스젠더리즘의 경계 분쟁: 성전환 제국empire, 성전환 흡혈귀vampire, 성전환 심판umpire]
시간은 2006/2/3 금요일 오후 6시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공개로 한다니까 끌리는 분은 참가하셔도 좋을 듯^^_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