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땜…일지도 모르지만

고등학생이던 시절이었나, 매일같이 들고 다니던 작은 돌이 하나 있었다. 수정처럼 생긴 그 돌을 호주머니에 넣어 다니며 수호석守護石처럼 여겼다. 그렇게 아끼던 돌을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잃어버렸다. 찾아도 없었고 바쁜 길이었기에 놓칠 수밖에 없었다. 인연이 다 한 것인가 하면서도 못내 아쉬움이 남았다. 아님, 잃어버림으로써 다른 일에 대한 액땜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껏 살면서 무언가를 잃어버린 적이 거의 없다. 기억 속에 잃어버린 것이라면 우산 한 번 정도랄까. 물론 정신은 잘 놓고 다니고 몸은 항상 따로 놀고 있긴 하지만-_-;;

쓸 일이 있어, 조교파일 속에 은행카드(겸 학생증)를 넣고 강의실로 갔다. 출석체크 하러 나가는 김에 은행일도 같이 처리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강의실에 도착해서 파일을 열어보는 순간, 학생증이 안 보였다. 순간, 식은땀이 흐르며 막막해졌다. 걱정은 은행카드에 있는 돈이 아니라(그렇다고 적은 액수는 아니다. 두 달 치 조교 알바비가 들어 있었다.) 개인정보 노출이었다. 학생증에 적혀 있는 학번과 주민등록번호 그리고 이름까지. 이 정도면 개인정보가 완전히 노출된 것이다. 돈이야 써버렸다고 치면 되지만 개인 정보는 그렇지 않으니 너무 불안하고 학생증을 찾고 싶어 속이 탔다.

출석 체크를 다 하고 지갑을 챙겨 은행에 가서 카드는 변경했다(학생증이 두 개 있었다, 옛 디자인과 새 디자인으로). 하지만 잃어버린 옛 디자인의 학생증이 자꾸만 불안하게 눈앞에서 왔다갔다… 흑흑흑. 심지어 카드 변경 처리하는 내내 히스테리와 불안증세를 나타냈다.

어쩌면 잃어버린 옛 카드는 이제 인연이 다 한 것인지도 모르고 앞으로 있을 지도 모를 액땜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누군가가 학생증을 주워서 루인이 찾을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을 놓치지 않고 있다. 인터넷 시대에 들어서면서 생긴 새로운 불안증이다. 개인정보 노출이라는 무시무시한 공포.

#후유증이 얼마나 심했느냐면, 15분에 수업을 마치는데 5분에 마치는 줄 알고 마이크를 챙기러 갔고(5분에 마치는 날/수업이 없다), 방금 전 한 약속을 잊어서 우연히 만났을 때 왜 만났는지 잊어버리고…

이히히..청강 중단

아침, 샤워를 하려고 화장실에 갔다가, 결심했다. 지금 듣고 있는 대학원 수업 청강을 그만하기로.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이다. 수업을 통해 뭔가 자극을 받고 있는 것도 아니고 소통이 잘 되어 신나는 공간인 것도 아닌, 때로 답답함과 약간의 분노로 우울해지는 곳이라면 더 이상 들어 무엇 할까 하는 결론. 더군다나 청강생인데 몸의 거부반응을 억누르고서 까지 들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결정하고 나자 너무도 시원해졌다. 우후후.

그러고 나서 신나게 읽겠다고 꺼내든 책은? 냐하하, [813]이다. 뤼팽시리즈. 흐흐흐. 그냥 소설을 통해 비워내고 싶다는 몸부림의 반응이랄까. 그렇다고 뤼팽시리즈가 가벼운 추리소설이라곤 보지 않는다. 이 책, 의외로 흥미로운 텍스트인데, 1900년대 초반, 여권운동이 한창이고 ‘여성’들에게 재산권과 참정권이 ‘부여’되면서 이에 대한 주류 ‘남성’들이 어떤 식으로 반응했는지를 잘 드러낸다.

암튼, 이런저런 부담감이 사라지자 동영상들도 평소 보다 더 신나게 보게 된다. 후후후. (그나저나 지금 보는 동영상, 상당히 흥미롭다. 언젠가 분석하고 싶을 정도로. 채식주의를 섹스-젠더-섹슈얼리티와 연결시켜 이렇게 흥미롭게 재현한 작품이 있을까 싶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