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가 하늘하늘 나는 계절이면 그 나비를 따라 어디든 걸어가고 싶던 날이 있었다. 어느 무더운 날이었을 것이고, 그때 나비는 철로 근처를 날고 있었다. 하늘하늘 가볍고 또 최선을 다해 나는 나비를 따라가다보면 나 역시 어느 순간 가볍게 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것이 그 시절, 20대 초반의 내가 삶을 견디던 힘이었다. 나비가 날아가는 모습이 그때 내가 매달린, 매달릴 수 있던 유일한 힘이기도 했다. 그 당시엔 어쩐지 훌쩍 날 수만 있을 것 같던 그런 이미지였다.
날이 덥고 오후 세 시 즈음이면 불현듯 마음이 차분해진다. 이제는 그런 감정을 별로 안 느끼지만, 오후 세 시 즈음의 햇살에 증발하고 싶을 때도 많았다. 굳이 오후 세시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그냥 햇살에 증발하고 싶었다. 죽고 싶은 욕망이 아니라 그냥 아지랑이처럼 증발하고 싶은 욕망. 그래, 그 어떤 시기엔 또 이 욕망이 내 삶을 지탱했다. 눈을 감고 태양을 응시하다보면 내가 증발할 것이라는 강렬한 욕망이 하루 하루를 버티는 힘이었다.
어쨌거나 지금은 전혀 다른 감정 구조에서 살아가고 있다. 더이상 상처를 염수에 담그는 일을 하지 않는다. 붉은 꽃을 피우지도 않는다. 붉은 꽃을 마시지도 않는다. 하지만 어느 순간, 주변이 무척 차분해질 때면 그 시기의 어떤 감정이 불쑥 튀어나온다. 실체는 없고 이미지만 남아 있는 어떤 기억, 그래서 사실상 그 당시의 감정만 불쑥 떠오른다. 그래도 이미지는 없고 실체만 존재하는 것보다는 실체 없이 이미지만 존재하는 게 더 좋은 걸까? 무엇이 더 좋고, 덜 좋고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흩어지지도 않았고 자정작용하지도 않은 듯하다. 그냥 저 아래 침전해 있어서 평소엔 확인할 수 없지만 모든 게 차분해지면 침전물을 볼 수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어쩐 일인지 요즘은 늘 울 준비가 되어 있다. 사소한 일에도 울기부터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