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

2013년 12월 즈음이었나, 러빙헛에서 김치를 구매했다. 러빙헛 자체(라고 추정하는) 김치는 맛있는 편이 아닌데, 다른 곳에서 담은 김치를 판매대행한다고 해서 구매했다. 그 김치가 상당히 맛있었다. 채식김치가 이렇게 맛있을 수 있음을 알았고, 러빙헛 신촌점의 김치가 별로란 걸 깨달았다. 그래서 그 김치를 몇 번 더 사먹었다. 그리고 지금은 국물만 남았는데 그 국물도 맛나서 라면 끓일 때 같이 넣고 끓이면 맛이 일품이다. 츄릎…(김치 국물로 끓인 라면 먹고 싶다.)
몇 번을 더 사먹었지만 양이 많지 않아서 상당히 아껴 먹었고, 얼마전 결국 다 먹었다. 그러면서 가장 아쉬웠던 게 맛난 김치로 만드는 음식이었다. 김치전, 김치찌개 같은 것들. 김치의 양이 넉넉해야 만들어 먹을 수 있고 김치가 맛있어야 제대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인데, 양이 부족해서 아쉬웠다. 뭐, 이거야 그러려니 하는데 문제는 요즘 김치찌개가 상당히 끌린달까. 어쩐지 따끈하게 맛난 김치찌개를 먹으면 좋겠는데 그걸 파는 곳이 없다. 러빙헛 계의 김밥천국인 신촌점에도 김치찌개는 안 팔고, 러빙헛 계의 전문식당인 티엔당점에도 김치찌개는 없다. 신촌점에서 제공하는 김치로는 맛난 김치찌개를 만들기 힘들 테니 그럴 수 있고, 티엔당점은 밑반찬으로도 김치를 제공하지 않는 곳이라 어쩔 수 없긴 하다. 아무려나 몇 년 만에 다시 김치찌개를 먹고 싶어서 아쉬워하고 있다.
그나저나 어째서 나는 어떤 시기엔 김치찌개가 유난히 끌리는 걸까. 김치찌개와 관련해서 기억할 만한 사건도 없는데, 어느 순간 김치찌개가 유난히 끌릴 때가 있다. 그래서 열심히 검색하지만 검색으로는 비건 김치찌개를 파는 곳을 찾을 수가 없다. 비건 김치찌개를 파는 곳이 있다면 매일은 아니어도 상당히 자주 갈 텐데, 아쉽네.

Man vs. Wild 베어그릴스

약간의 심리적 여유가 생겨서, E가 관심이 많은 베어그릴스(Man vs. Wild)를 몇 편 봤다. 경기버스를 타면 단편적 모습만 볼 수 있어서 어떤 내용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서 국내 방영분 몇 편을 머리 식히고 싶을 때 조금씩 봤는데… 아아, 나는 결코 저런 삶을 살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언젠가 한 번 정도는 저런 경험을 해봐도 재밌지 않을까라는 다소 진부한 감상.
그러니까 이를 테면 물뱀을 잡아서 이빨로 머리를 떼어 낸 후 꿈틀거리는 몸을 날로 야금야금 먹고 난 다음, 아침을 먹었으니 걷겠다고 한다거나. 고목을 해체하며 벌레를 찾다가 안 나오니까 밥을 먹는데 실패했다고 말한다거나. 죽은 동물의 몸에서 기어다니는 구더기를 보며 좋은 단백질이라고 먹는다거나. 이미 아는 사람은 알고 있는 그런 내용을 아무렇지 않게 하지만 떠들고 싶은 감정으로 봤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특징은 카메라촬영인을 가장 많이 의식하도록 한다는 점이다. 어떤 의미에선 그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주인공과 동일한 환경을 다닌다는 점에서 더 대단하기도 하다. 때론 더 고생이기도 하고. 그래서 베어그릴스보다 카메라촬영인이 더 대단하고 카메라를 가장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다.
카메라촬영인을 가장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주인공은 베어그릴스일 수밖에 없다는 느낌도 든다. 이유는 단 하나. 이 프로그램은 방송이고, 어떤 상황에서도 마구마구 떠들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속사포처럼 얘기하는 노홍철처럼. 흐흐흐. 베어그릴스 역시 밤에 자다 말고 일어나 셀프 카멜라를 켜고 떠드는 식으로 현재 상황을 적절히 설명하고 긴장감을 줄 말을 끊임없이 한다. 방송이란 측면에선 이것이 중요하다. 베어그릴스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생존할 수 있는 사람이 왜 없겠는가. 많지는 않아도 분명 여럿일 테다. 하지만 그 모든 상황에서도 방송을 위해 적절한 대화를 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것이 카메라촬영인과 베어그릴스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그리하여 베어그릴스는 생존 방식을 알려주는 프로그램이기도 하겠지만, 방송의 역할이나 방송 구조를 알려주는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아무려나 꽤나 재밌다. 어릴 땐 늘 집을 나가서 떠도는 상상을 하며 살았기에, 그 시절의 상상을 자극하기도 해서 흥미롭기도 하고. 물론 집을 나가 떠돌아다니는 삶이 결코 편하지 않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에 더 이상 그런 꿈을 꾸진 않는다. 그럼에도 언젠가 한 번 정도는 너무 위험하지 않은 상황에서 베어그릴스의 가벼운 판본으로 비슷한 경험을 해보고 싶기는 하다. 물론 몇 시간 안 지나 후회하겠지만. 흐흐흐.

나비와 햇살과

나비가 하늘하늘 나는 계절이면 그 나비를 따라 어디든 걸어가고 싶던 날이 있었다. 어느 무더운 날이었을 것이고, 그때 나비는 철로 근처를 날고 있었다. 하늘하늘 가볍고 또 최선을 다해 나는 나비를 따라가다보면 나 역시 어느 순간 가볍게 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것이 그 시절, 20대 초반의 내가 삶을 견디던 힘이었다. 나비가 날아가는 모습이 그때 내가 매달린, 매달릴 수 있던 유일한 힘이기도 했다. 그 당시엔 어쩐지 훌쩍 날 수만 있을 것 같던 그런 이미지였다.
날이 덥고 오후 세 시 즈음이면 불현듯 마음이 차분해진다. 이제는 그런 감정을 별로 안 느끼지만, 오후 세 시 즈음의 햇살에 증발하고 싶을 때도 많았다. 굳이 오후 세시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그냥 햇살에 증발하고 싶었다. 죽고 싶은 욕망이 아니라 그냥 아지랑이처럼 증발하고 싶은 욕망. 그래, 그 어떤 시기엔 또 이 욕망이 내 삶을 지탱했다. 눈을 감고 태양을 응시하다보면 내가 증발할 것이라는 강렬한 욕망이 하루 하루를 버티는 힘이었다.
어쨌거나 지금은 전혀 다른 감정 구조에서 살아가고 있다. 더이상 상처를 염수에 담그는 일을 하지 않는다. 붉은 꽃을 피우지도 않는다. 붉은 꽃을 마시지도 않는다. 하지만 어느 순간, 주변이 무척 차분해질 때면 그 시기의 어떤 감정이 불쑥 튀어나온다. 실체는 없고 이미지만 남아 있는 어떤 기억, 그래서 사실상 그 당시의 감정만 불쑥 떠오른다. 그래도 이미지는 없고 실체만 존재하는 것보다는 실체 없이 이미지만 존재하는 게 더 좋은 걸까? 무엇이 더 좋고, 덜 좋고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흩어지지도 않았고 자정작용하지도 않은 듯하다. 그냥 저 아래 침전해 있어서 평소엔 확인할 수 없지만 모든 게 차분해지면 침전물을 볼 수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어쩐 일인지 요즘은 늘 울 준비가 되어 있다. 사소한 일에도 울기부터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