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아침에 학교 가기 전, 사전투표를 했다. 어영부영하면 못 할 수도 있고, 빨리 하는 것이 속편하겠다 싶어 고민하다가 그냥 아침 일찍 투표부터 했다. 나 주변의 많은 사람이 그렇겠지만 비례정당에서 세 곳을 두고 고민했다. 어떤 사람은 네 곳일 수도 있겠다 싶지만 상당히 인기 있는 정당보다는 나라도 한 표 보태야지 싶은 정당을 두고 고민이 좀 많았다. 어휴… 비례투표 용지는 왜 이렇게 긴가…

이번 선거를 앞두고 데이터센트럴을 들으며 좀 충격적이었다.

ㄱ. 민주당 국회의원은 상상 이상으로 성실하게 일한다. 상임위나 본회의 출석율 95%는 중간 정도의 성실성었고 대표 발의한 법안도 100개가 넘는 경우도 빈번했다. 나의 직장에서 동료들과 시끄럽다고 욕하는 한 국회의원의 경우, 입법노동자로서의 역할은 상당히 성실해서(출석율이 거의 99%, 100%였다) 좀 충격받았다. 반면 국민의힘은 이런 사람이?? 싶은 후보가 많아 편견이나 이미지를 재생산했다.

ㄴ. 진보 계열 정당의 지역구 후보는 좀 슬펐다. 호남 지역에 출마한 경우가 아니라면, 많은 경우 중앙당 공약만 있고 지역구 공약이 없었다. 진보 정당의 지역구 출마는 비례를 홍보하기 위해서라지만, 사실 지역구 출마 자체가 상당한 헌신과 비용이 드는 일인데 15% 이상을 득표하지 않는 이상 그 모든 비용은 개인의 빚으로 남기 마련이다. 언제까지 개인의 헌신으로 유지되어야 할까? 이것은 달리 말해 진보정당의 지역구 의원이 왜 이렇게 드문가, 그리고 새로운 지역구 의원이 등장하기가 왜 이렇게 힘든가를 말해주는 장면이기도 했다. 지역구 공약이 없는 후보를 뽑아야 할 이유를 설명해주지 못하는 상황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또 슬프고 아쉬웠다.

ㄷ. 생각보다 괜찮은 입법 노동을 한 현역 후보도 다수였다. 나는 나름 뉴스를 잘 챙겨 읽는 편인데 그럼에도 지난 4년 동안 들어본 적 없는 법안이 다수였다. 그러니까 공중전, 큰 그림 그리는 작업, 혹은 잘못된 행태를 보도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언론에서 괜찮고 가치 있는 입법 활동도 소개해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겼다.

ㄹ. 후보들의 공약을 들으며, 구청장이나 시장 후보의 공약과 국회의원의 공약을 구분하지 못 하는 경우가 많아 아쉬웠다. 동네 공원를 만들겠다는 정책이 국회의원이 낼 공약은 아니지 않은가.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나왔다면 그에 걸맞는 고민이 부족한 후보도 상당해서 아쉬웠는데 이것은 정치인 역시 직업인이자 노동자라는 자각이 필요한 것이지 않나 싶었다. 국힘에서 종종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너희들을 위해 선심쓴다’는 태도로 출마한 후보가 있는데, 이건 너무도 명백하게 정치 혐오이자 무시다. 정치인도 노동자고, 국회의원이 된다는 것은 구직활동이다. 다른 말로 국회의원은 성실해야 하고, 자신의 업에 대해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렇기에 국회의원으로 출마한다면 국회의원의 역할에 맞는 공약을 냈으면 했다. 내가 사는 지역구 국회의원 후보 역시, 지역구 후보로서의 공약도 있지만, 공원 조성 같은 공약도 있어서 당혹스러웠고…

ㅁ. 웃긴 거: 국힘은 재산의 상당수가 후보 본인의 것이었는데, 민주당과 진보정당의 경우 재산의 상당수는 후보가 아니라 파트너의 것이었다. ㅋㅋㅋㅋㅋ 파트너가 관리해야 허튼 정치 활동을 안 하지… 비트코인 등 코인을 100원 1000원 단위로 갖고 있는 후보들… 공부하려고 구매했겠지만 ㅋㅋㅋ

ㅂ. 인권 운동을 하다보니 대외적인 이미지 등으로 좋게 평가하는 정치인이 종종 있는데, 입법 노동자로서의 성실성이라는 측면에서 당혹스러운 경우가 있었다. 혹은 이미지가 좋았음에도 지난 번에 출마를 못해서 아쉬웠던 경우도 있는데, 그 지역에 당선된 다른 국회의원의 입법 활동이 상당히 좋아서 반성한 경우도 있었다. 정당의 정치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한편, 지금 입법 노동자로서의 활동 역시 좀 더 정교하고 중요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겠다는 반성을 했다.

동의/합의의 시차

수업 시간에 잠깐 언급한 내용인데…

폭력은 무엇이고, 동의나 합의는 언제 시작해서 언제 종식되는 것일까를 질문했다. 폭력이 무엇인가도 어려운 문제이지만, 무엇보다 동의나 합의는 언제 시작해서 언제 종식되는 것일까를 둘러싼 고민은 매우 어려운 것이다. 유성애자여서 성적 관계를 맺기로 한 합의는 언제까지 유효한 것일까? 그 합의는 유효한 것일까? 20년 정도 전에 성폭력의 사후 구성과 관련한 논문이 나왔는데, 그 논문의 주요 쟁점은 성폭력 발생의 시차였다. 연애 관계일 당시에는 합의라고 생각했는데, 헤어지고 시간이 지나서 다시 고민해보니 그것은 합의라기보다 강요였고, 강압은 아니라고 해도 마지 못해 동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 논문의 중요한 통찰은, 성폭력은 자명한 사건이 아니라 사후 해석과 시차가 발생하는 사건이라는 점이었다. 이런 시차의 발생은 동의와 합의 개념의 시작에서 종식까지의 시간성을 고민하도록 한다. 어떤 사건이나 행위에 대해, 더이상 왈가왈부하지 않기로 서약하면 동의나 합의는 완결되는 것일까? 아니면 동의나 합의는 계속해서 지연되고 종식될 수 없는 속성인 것일까? 종식될 수 없는 동의나 합의라면 어디서 폭력이 발생하고 어디서 친밀감이 구축되는 것일까?

뭐 이런 식의 질문을 했었다. 물론 여기에 대해 나 역시 충분한 답을 갖고 있지 않다. 그저 동의나 합의에서 시간적 완결성을 만드는 작업은 상당히 어렵기 때문에 더 많은 고민과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이렇게 말하니 최근 발생한 정치권의 ‘사건’이 떠오르는데, 복잡한 논의 지형을 소란으로 만들어버리는 이런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화가 난다. 나는 화가 나지만, 반성폭력 운동과 동의/합의를 둘러싼 논의를 오래 고민한 이들은 얼마나 속이 터질까 싶다.

토론은 어렵다

토론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근래 토론을 할 기회가 좀 더 많아지면서 더더욱 토론을 하는 일이 어려워지고 있다.

수업을 하는 첫째 날이면 이런저런 가이드를 하는데 그 중 하나는 텍스트를 읽는 방법이다. 나의 가장 중요한 원칙: 각 텍스트의 한계를 다루지 말 것. 그러니까 이 텍스트에는 저런 논의가 빠져 있고 저 텍스트에는 이런 논의가 빠져 있다는 식으로 읽지 말라고 요청한다. 이런 태도로 쪽글을 쓰고 수업에서 토론할 것을 요청한다. 이유는 간단한데 모든 텍스트는 한계를 내재하기 때문이다. 모든 주제와 소재를 다루는 완벽한 텍스트는 없고 빠지는 내용 없이 글을 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텍스트는 각자의 목표와 기획이 있고 그래서 그 한계 내에서 논의를 전개한다. 그렇기에 빠진 내용은 무궁무진하고 빠진 부분에 집중하면 텍스트에서 배울 것은 없다. 그러니 한계 내에서도 배울 수 있은 측면에 초점을 맞춰서 텍스트를 읽어주기를 요청하고 매번 이 지점에 집중한다. 학위 논문을 쓸 때면 한계를 적어야 하지만 그건 그때고 일단은 배울 수 있는 부분을 배우고 한계 내에서도 가능성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나는 토론을 준비할 때도 정확하게 이 지점을 중시해야 한다고 믿는다. 논문이나 발표문에서 연구자의 욕망과 기획의도를 찾고, 해당 논문의 한계나 제약 속에서 어떻게 연구자의 욕망과 기획을 더 잘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인가를 찾는 것. 연구자의 욕망과 기획을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논문이 설정한 한계를 초과하지 않고 가급적 그 한계를 존중해줄 것. 이것이 토론의 역할이지 않나 싶은데 사실 나도 잘 하는 편은 아니라, 토론을 할 때마다 걱정하고 두려움을 느낀다. 오랜 연구 고민을 살리지는 못할 지라도 망치지는 않는 것. 이것이 토론의 역할이라고 배웠는데 그게 또 쉬운 일은 아니라 매번 부담스럽고 발표자/연구자에게 괜히 미안하고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