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이면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비행기를 탄다. 여행 자체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거니와(여행 자체는 좋아하지만 여행 준비에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타입이다) 영어를 매우 못 하기 때문에, 심지어 유나이티드항공을 이용할 예정이기 때문에 얼마간 걱정을 하고 있다. 갑자기 병원에 입원해서 미국에 안 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품고 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행사에서 사용할 발표문을 만들고 있…)
그런데 항공권을 예약하면서 등록한 어느 사이트에서는 끊임없이 한국은 위험한 지역이라는 경고 메일을 보내주고 있다. 요약하자면, 사드 배치에 대한 항의 집회가 있기 때문에 한국은 위험한 지역이라는 내용이다. 정작 한국에 사는 나는 사드와 관련한 다른 지점을 고민하고 화내고 있는데, 여행 사이트에선 한국의 사드 반대 집회가 한국을 위험하게 만든다고 경고한다.
위험은 해석의 대상이란 뜻이리라. 무엇을 위험으로 설명할 것인가. 무엇이 더 위험한 일일까. 이 모든 것은 해석 행위다.
물론 실질적 위협을 체감하는 방식은 다르다(물론 이것 역시 해석 행위의 일부다). 한국에 사는 나는 사드집회로 인한 어떤 위협을 느끼지 않겠지만, 미국인으로 통할 법한 사람이라면 느낌이 다를 것이다. 한국처럼 이상한 오지랖이 있는 나라에서(Do you know Kimchi?) 한국인으로 통하는 몸이 체감하는 위협과 미국인으로 통하는 몸이 체감하는 위협은 다르다. 미국에서 역시 마찬가지다.
유나이트항공에서 베트남계 미국인을 끌어낸 사건이 발생했을 때, 내가 유나이티드항공을 탄다고 말하자 두어 가지 반응이 나왔다. 한 측에선, 버티고 항의해라! 나중에 같이 시위해주겠다. 다른 측에선 티켓 교환해주겠다고 하면 그냥 조용히 그에 따라라. 늦게 도착하더라도 그냥 따라라. 둘 다 좋은 제안이다. 그런데 나의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이 영어로 모든 이야기를 할 텐데 나는 영어를 전혀 못 알아 듣는다는 점이다. 사태는 엉뚱하게 흐를 수도 있다. 나는 그들의 말을 알아 들을 수도 없고 항의할 수도 없고 따를 수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대응은 무엇일까? 이때 내가 체감하는 두려움 혹은 위험은 전혀 다른 성질일 것이다.
이 블로깅을 하면서 깨닫기를, 나의 두려움은 타국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언어에 대한 두려움에 더 가깝다. 나는 말을 제대로 못 쓰는 것에 대한 엄청난 두려움과 스트레스를 느낀다.. 그래서 어떤 자리에 가서 예정에 없던 발언을 하게 되면 늘 후회한다. 내가 직접 발언을 하도록 기획된 자리가 아닌 이상, 그 어느 자리에서도 발언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말을 제대로 못 했을 거라는, 제대로 못 하고 중언부언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나저러나 나는 결국 잘 다녀올 것이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심지어 한동안 방치한 이곳에 샌프란시스코 풍경 사진을 매일 올릴지도 모른다. 크크크. 그러니 설마 이것이 마지막 블로깅이겠어. 크크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