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성 관련 책 작업, 글쓰기

성문화연구모임 도란스의 두 번째 기획으로 남성성 관련 책을 준비하고 있다. 몇몇은 아예 새로 글을 썼고, 몇몇은 [남성성과 젠더]에 실린 글을 대대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개고하는 수준으로 쓰고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점, 글을 쓰는 사람에게만 흥미로운 점이 발생했다. 예전에 낼 때는 문제가 안 되거나, 그냥 넘어간 많은 문장이 지금은 문제가 되고 있다. 정치적 올바름 같은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설명이 충분하지 않고 문장이 모호하다는 방식의 문제다. 그때는 충분히 설명했다고 인지되어서인지 출판된 글인데, 지금은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거나 모호하다는 식으로 수정을 요청받고 있다. 필자들이 서로 이렇게 논평을 하기도 하고, 출판사 편집자느님께서(!) 요청하기도 한다.

어떻게 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있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아무도 안 묻겠지만), 좋은 편집자를 만나야한다고 답하고 싶다. 정말이다. 편집자가 어떤 의지로 어느 수준까지 개입하느냐에 따라 글의 질이 달라짐을 깨닫고 있다. 물론 편집자의 모든 논평을 받아들이지는 않겠지만, 95% 이상은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나머지 5%는 내가 미묘하게 표현을 잘못해서 발생한 것이고. 그러니까 모든 잘못은 저자의 잘못이다.
그나저나 토요일에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북토크 행사가 있는데, 어째 사고를 칠 것 같다. 호호호. ;ㅅ;

자료를 수집할 때 마주치는 표정

인권포럼 아카이브와 역사 세션 질의응답 때, 한 분이 퀴어락 발표에서 온라인 중심으로 말했는데 오프라인 수집과 관련해선 어떤 대응책이 있냐는 말로 요약할 수도 있을 질문을 주셨다. 그 외 다른 질문과 함께 무척 좋은 질문을 해줬다.

그런데 답변 과정에서 결코 하지 못 한 내용이 있다. 시간이 차고 넘쳤어도 못 했을 것이다.
부스 같은 곳에 퀴어락에 기념품 등 자료를 기증해달라고 부탁을 하러 가면, ‘이걸 팔아서 우리 단체/모임 재정을 마련할 건데 어떻게 공짜로 달라고 할 수 있니?’라는 표정이나, ‘우리가 이걸 모두 팔아서 다른 좋은 단체에 기부할 건데 어떻게 그렇게 염치없게 그냥 달라고 할 수 있냐, 그냥 돈 주고 사라’라는 표정을 마주할 때가 있다. 그런 표정을 이해한다. 나 역시 돈이 없어 단체를 해소시킨 경험이 있다. 그러나 퀴어문화축제 부스행사에 참가한 140여곳의 단체 중에서 70여곳이 그런 표정을 짓는다. 나머지는 엄청 잘 챙겨주거나 그냥 무관심하거나.
그런 표정을 하루 동안 70번 넘게 마주한 이후로, 부스행사가 있는 어떤 자리에 가도 더 이상 기증 요청을 하지 않는다. 아예 부스를 둘러보지 않기도 한다.
2015년부터 퀴어문화축제 부스행사에 참여한 단체의 기념품을 기증받으려 하고 있지만 올해는 하지 말까란 고민을 하고 있다. 어떻게 할지 모르겠지만 현재의 상태로는 하지 않는 방향에 조금 더 마음이 기울어 있다.
좀 더 현실적인 다른 이유로, 올해는 아예 퀴어문화축제에 참가 자체를 안 할 수도 있다. 물론 그때 가봐서 결정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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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좋은 단체에 기증한다고 할 때 그 단체가 비온뒤무지개재단일 때가 한 번 있었다. 그때 나는 정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문재인의 나중에, 성적소수자는 연대하고 있는 집단인가.

‘문재인의 나중에’란 언설이나 인식론의 문제점과는 별개로 이 사건과 성적소수자 운동의 법제화 운동 과정에서 의제를 선별하고 법조항에서 누군가를 나중으로 미루는 작업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문재인의 나중에’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성적소수자 운동 내부의 어떤 배제, 정책제정과 법제화 운동 과정에서 발생하는 의제의 우선순위 선정 과정의 문제는 지워지는 것 아닌가? ‘문재인의 나중에’가 성적소수자 운동을 동질화시키는 알레고리로, 면피용으로 쓰이는 것은 아닌가? 마치 성적소수자 운동 자체에선 문제가 없다는 착오를 야기시키는 것은 아닌가? 그러니까 성적소수자라는 집단은 혹은 LGBT/퀴어라는 집단은 그 자체로 연대를 하고 있을까? 그래서 타 단위(?)와 연대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말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