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살인사건: 젠더폭력

ㄱ.

강남역 살인사건과 관련한 글을 썼다가 그냥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아직은 더 많은 고민을 정리할 시기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몇 가지만 덧붙이면…
ㄴ.
고인을 애도하는 자리에서 얼마나 저열하고 끔찍한 일이 발생할 수 있는지가 다시 확인되었다. 젠더 정치에서 일베는 참 중요하다는 점 또한 다시 확인되었다.

강남살인사건 발생 초기에 오유 같이 자칭 진보연하는 게시판의 저열함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일베가 강남역 추모 현장에 등장하면서 오유와 일베가 여성혐오 혹은 젠더 이슈에서 얼마나 잘 연대하는지, 두 집단이 얼마나 친밀하고 친연한 집단인지 다시 확인되었다. 동시에 여성혐오의 주체 혹은 여성혐오를 강하게 유포하는 사람, 여성혐오 동조자가 마치 일베인 것 같은 착오도 일으켰다. 물론 이것은 국민일보 같은 매체에서 가장 많이 사용한 방식이지만, 여성혐오하는 세력과 여성을 살해하는 가해자가 일부 있긴 하지만 나머지 남성은 부당한 ‘남혐’의 피해자로 구성하려는 발악의 근거로 일베가 자주 활용되었다. 악랄하다. 일베는 오유나 DC, 클리앙 등 다른 많은 여성혐오 사이트 중 하나며, 젠더폭력을 재/생산하고 유지하고 즐기는 사이트 중 하나다.
그런 점에서 박원순 시장이 일베 같은 여성혐오 사이트를 폐쇄할 수 있는 권한이 필요하다는 발언(http://insight.co.kr/newsRead.php?ArtNo=62527)은 정말 위험하고 나쁜 발언이다. 오유부터 시작해서 살인사건 피의자를 조현병으로 인해 일어난 개인적 일탈로 만들기 바빴다. 다들 협심해서 한 명의 예외적 ‘괴물’을 만들기 바빴다. 그 와중에 일베가 추모 현장에 등장했고 마치 일베만이 여성혐오의 최전선이거나 여성혐오 유포지라는 착각을 생산했다. 박원순 시장은 일베 같은 여성혐오 사이트를 폐쇄할 수 있는 권한이 서울시에 필요하다고 말했다(이 권한을 왜 서울시가 갖는가? 이런 권한을 정부 기관이 갖는 것이 정당한가?). 일베를 다시 한 번 괴물로 만들어서 오유와 같은 집단을 보호하는 전형적 방식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박원순 시장의 태도가 강남살인남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위험하고 문제라고 고민한다. 그것은 사실상 다른 많은 여성혐오 혹은 젠더폭력을 은폐하고, ‘그들만’ 없다면 한국 사회는 어느 정도 안전한 사회라는 착각을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이것이야 말로 ‘괴물’을 생산하며 ‘괴물’을 보호하는 장치의 전형이다.
ㄷ.
크리틱-칼(http://www.critic-al.org/)에서 강남역 추모행사와 관련한 글을 공개했다(정강산_페미니즘의 반(反) 페미니즘- 강남역 살인사건을 둘러싼 논쟁에 부쳐  http://ewsngod.nayana.kr/zexe/mainissue/13617).
이 글은 여러 의미에서 가치 있는 글이다.
페미니즘, 소수자, 피해자, 약자란 개념에 대한 이해가 엉망인 상태에서 각 개념어를 사용해서 멋대로 까부는 글이다. 그러면서도 마치 논리적인양, 이성적인양 현학적 수사를 이용해서 글을 쓸 수 있는 패기와 용기가 무척 잘 드러나는 글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문구를 적용하기에 좋은 글이다. 이성애-이원젠더를 밑절미 삼은 ‘남성’ 주체가 얼마나 아무 주제에 아무렇게 까불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지를 생생하게 기록하는 글이다. 강남역 추모 현장과 여성혐오에 대한 강력한 비판의 목소리를 “우리 여성 불쌍하니까 남자들이 보호해줘 찡찡”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글이다. 젠더 정치에서 ‘남성’ 주체에 부여하는 권력을 사유하고 싶지 않다고, 그냥 누리고 싶다고 징징거리는 글이다. 페미니즘 인식론을 세계관이 아니라 여자들만의 소란으로 축소하려는 한국 사회의 전형적 태도를 노골적으로 표출하는 글이다.
그런데 이것저것 다 떠나서 글 자체를 너무 못 썼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 구절, 애도 구절까지 읽고 나면 이 글이 역겹다. 나는 그의 애도 구절이 진심이라는 점은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해자 혹은 폭력의 사회적 구조를 열심히 옹호한 다음 피해자에게 애도를 표하면 그것이 애도인가?
ㄹ.
아니나 다를까 많은 사람이 경계했지만 정부 부처와 이른바 전문가연 하는 사람들이 공용화장실을 문제 삼기 시작했다. 이것은 가장 나쁜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가는 태도다. 공용화장실 혹은 젠더중립화장실(공용화장실과 젠더중립화장실은 그 개념이 좀 다르지만)은 트랜스젠더퀴어에게 중요한 의제 중 하나고 그래서 지속적으로 필요를 주장해왔다. 하지만 여성혐오 사건을 빌미로 공용화장실 혹은 젠더중립화장실을 폐쇄한다면, 이는 여성혐오에 비판하고 분노하는 페미니즘 정치학과 트랜스젠더퀴어 정치학을 갈등하도록 조장하는 태도다. 페미니즘이 아니라 여성혐오에 대응한다는 비-페미니스트 집단이 페미니스트 의제를 반-트랜스젠더퀴어 정치로 만들고, 트랜스젠더퀴어 정치학을 페미니즘과 갈등하는 것처럼 만든다. 악랄한 방법이지만 현재 사회가 가장 많이 이용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또한 공용화장실 폐쇄와 젠더이분법에 따른 화장실 구분 정책은 이미 많은 사람이 지적했듯 여성화장실 자체가 현재 안전하지 않다는 점을 은폐한다. 공용화장실을 문제 삼는 태도는 여러 가지로 위험하고, 강남살인사건 추모에 참가하며 슬픔과 분노를 표출하는 많은 사람이 비판하는 방식임에도 이런 방식으로 논의를 진행하는 태도는 페미니즘 정치학 혹은 젠더 이슈를 이해하는 태도, 이를 정치에서 사용하는 방식을 다시 한 번 표출한다.
ㅁ.
그리고 더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결국 남자랑 결혼할 거잖아” : 바이혐오, 여성혐오, 그리고 트랜스젠더퀴어/인터섹스 혐오

동성애자 혹은 비-바이섹슈얼/양성애자가 바이섹슈얼 여성에게 종종 하는 말이다. “결국 남자랑 결혼할 거잖아.”, “남자랑 결혼하면 되잖아.” 혹은 “남자 만나서 편하게 살면 되잖아.” 실제 남성과 결혼하는 바이여성이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니라, 바이여성을 혐오하는 의도, 그 범주 자체를 폄하/폄훼하려는 의도로 사용하는 발언이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사실이라며 바이섹슈얼 범주와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그렇게 부정해도 정당하다고 큰소리친다.

(나는 ‘혐오’라는 표현을 내켜하지 않지만, 이 글에선 사용하겠다.)

그런데 “결국 남자랑 결혼할 거잖아”라는 언설은 바이혐오일 뿐만 아니라 ‘여성’ 혐오다. 남성과 만날 여지가 있는 사람은 곧 남성과 결혼할 사람이며, 남성과 만나거나 만날 여지가 있는 사람은 남성과 결혼해야 하는 사람으로 등치하는 한국 사회의 지독한 여성혐오와 공명하는 발언이기 때문이다. 아니, 여성이건 남성이건 성인이면 결혼을 해야 하고, 성인 여성과 남성이 연애를 하면 그것은 결혼을 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한국 사회의 인식론이 저 발언에 내포해 있다. 만약 성적 취향이나 지향이 무엇이건, 유성애건 무성애건, 성인 여성이 남성을 만난다는 이유로 결혼을 상기하지 않는다면, 결혼을 해야만 ‘정상적’ 사회 성원권을 얻을 수 있다는 지배 규범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이런 언설이 자동연상처럼, 연관 검색어처럼 등장할 수는 없다.
또한 “남자와 결혼하면 되잖아”와 같은 언설은 한국 사회에서 법적으로 허용되는 형태의 결혼이 ‘여성’에게 어떤 의미인지 조금도 사유하지 않거나 너무 안일하게 사유한다. 결혼을 통해 많은 여성이 경력 단절을 겪고, 고통을 겪으며 괴물로 취급된다. 하지만 저 발언은 결혼 제도의 부당함, 폭력성을 도피나 안식 정도로 이해한다. 이것은 여성혐오일 뿐만 아니라 현실 파악이 안 된 소리다. 무엇보다 현재 한국에서 결혼은 계급이슈로 변하고 있다. 경제적 여건과 결혼이 긴밀하게 연결된다. 취집이란 말이 있는데 취집도 경제적 여건이 되는 여성에게나 좀 더 가능한 일이다. 즉 “남자와 결혼하면 되잖아”는 한국의 경제적 상황, 계급이슈를 무시하는 발언이다.
“결국 남자랑 결혼할 거잖아”와 같은 종류의 발언은 정말 바이여성혐오인데, 바이섹슈얼 범주만 부정하고 삭제하려는 의도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발언은 현상이나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의 기술이 아니라 여성을 남성과 연결해서 사유하는 태도며 여성이란 남성과 관계를 맺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는 인식에 따른 언설이다. 어떤 범주의 남성이건, 남성과 연애를 하기 때문에 결국 남성과 결혼할 것이란 사유의 흐름은 결국 여성을 남성에 귀속된 존재로 이해하는 태도의 반복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2007년 이후 차별금지법 운동에서 강력하게 제기했던 의제인 복합차별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여성이란 젠더 범주, 바이섹슈얼이란 ‘섹슈얼리티’ 범주를 모두 차별하거나 혐오하는 방식의 태도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결국 남자랑 결혼할 거잖아”와 같은 표현은 바이여성이 실제로 남성과 결혼을 하는 경험을 비난하는 언설이 될 수 없다. 그 표현은 그 자체로 비판받아야 하는 언설이며, 이런 발언을 하는 사람이 바이혐오 뿐만 아니라 여성혐오를 내면화했거나 여성혐오에 동의하는 사람은 아닌지 의심할 필요가 있는 언설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남성과 만나거나 만났거나 만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결혼할 것이라고 단정하는 반응을 한다면, 바로 그 반응은 정작 그 자신이 동성애결혼을 욕망하기 때문은 아닌가 의심할 수 있다. 이것은 추측이다. 하지만 의심스럽다. 연애를 결혼의 전단계로 인식하지 않는다면, 연애를 결혼 욕망의 일부로 환원하며 사유하지 않는다면 이런 식으로 발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무리 바이섹슈얼 여성을 비난하거나 삭제하고 싶다고 해도, 이런 연결고리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 표현을 사용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그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그 자신의 연애 역시 결혼의 전단계, 결혼을 위한 욕망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고백이다. 그러니까 바이여성을 향해 “결국 남자랑 결혼할 거잖아”라고 비난하는 동성애자 혹은 이성애자의 태도는 ‘나는 동성애결혼(혹은 이성애결혼)을 하고 싶다’는 항의 발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발언은, 결혼이란 이성애결혼과 동성애결혼 뿐이며 그 외의 결혼 형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분법적이고 배타적 오만함/인식론을 내포한다. 이런 점에서 이런 발언은 바이섹슈얼 여성을 향한 복합혐오일 뿐만 아니라 트랜스젠더퀴어, 인터섹스 등을 향한 복합혐오기도 하다. 연애건 결혼이건 바이섹슈얼을 지우는 동시에 트랜스젠더퀴어/인터섹스를 지우는 발언이다.
그래서, E가 자주 지적하듯 바이섹슈얼 의제는 트랜스젠더퀴어/인터섹스 의제다.

근육통 기록

근육통 장기 경험자의 조언에 따르면 근육통은 2~3년에 한 번씩 재발한다고 한다. 나는 실제 2년 전에 처음 근육통이 생겼고 지금 다시 겪고 있다. 2~3년 뒤에 다시 근육통을 겪지 않길 바라지만 어쨌거나 나중을 위해 남겨두는 기록이다.

5월 6일 처음 아팠는데 얼추 열흘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통증을 겪고 있다. 첫 며칠은 정말 꼼짝도 못 하는 수준으로 아팠다. 그러다 월요일(5/9)에 간신히 병원에 갔고 물리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약간의 차도가 있었고 화요일에도 물리치료를 받고 나니 꽤나 괜찮다고 느꼈다. 그래서 수요일(5/11)에 출근을 감행했다. 돌이켜 곱씹으면 수요일에 출근하지 않고 그냥 쉬는 게 맞았다. 이 날 출근을 하며 세 번의 후회가 있었다. 첫 번째는 출근하기 위해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는 과정에서 ‘그냥 돌아가서 쉴까?’란 고민을 했다. 괜찮겠거니 하고 출근했는데 어쩐지 아파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출근을 하고 싶기도 해서 그냥 갔다. 두 번째는 지하철 안이었다. 출근시간의 경의중앙선은 무척 복잡하다. 사람이 적은 칸을 고른다고 해도 콩나물처럼 서서 가야하는데 근육통인 상황에서 콩나물처럼 가려니 허리에 무리가 심했다. 세 번째는 지하철역에서 하차하고 나서였다. 지하철역에서 사무실가 가는 길에 반드시 계단과 오르막길을 거쳐야 한다. 이곳에서 다시 한 번 허리에 무리가 왔다. 출근을 하고 나서는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출근길이 좀 많이 무리였는지 근육통이 좀 더 심해졌다. 그리고 그날 저녁엔 시간이 애매해서 병원에 가지도 못했다.
다음날 목요일(5/12) 아침 허리가 무척 많이 아팠다. 집에서 쉬어야 할 것 같았는데 오후에 회의가 있어 그냥 출근하기로 했다. 물론 회의를 미룰 수도 있었지만 이미 한 번 미룬 상황이라 그러기가 애매했다. 물론 다시 미루자고 제안했다면 사람들은 기꺼이 미뤘겠지만 그냥 내가 어쩐지 미안햇다. 고작 이 정도 아픈 걸로 회의를 미뤄도 되는 건가란 고민도 있었다. 병원에 들렸다가 가기 위해 집에서 일찍 나와 병원으로 갔는데 가는 속도가 어제보다 더 느렸다. 근육통으로 평소보다 속도가 2배 정도 느려졌는데 그날은 더 느렸다. 정형외과에 갈까하다 한의원에서 약침을 맞으면 좋다고 해서 한의원으로 갔다. 진단을 받고 물리치료를 했고 약침을 맞으면서 ‘오, 차도가 있어! 덜 아파!’라고 느꼈다. 하지만 침대에서 내려오는 순간부터 다시 아팠다. 어떻게 출근은 했고 이런 저런 일을 하다가 회의도 했는데 의자에 앉아있는 것이 좀 버거운 수준이었다. 조퇴를 했고 집에 와서는 계속 누워있었다.
금요일(5/13) 아침. 전 날 이미 집에서 쉬라는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반드시 내가 출근해서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있었기에 그럴 수 없었다. 정말 힘들었다. 금요일 상태는 그냥 집에서 종일 누워 있어야 하는 상태였다.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는데 여러 번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고 힘들어서 주저 앉고 싶었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 것 역시 버거웠다. 지하철역에서 내려 사무실까지 가는 시간은 평소의 두세 배 정도 걸렸다.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닥에 드러눕는 일이었다. 침대나 매트리스가 없어 누워 있는 것도 편하진 않았지만 눕지 않으면 버티기 힘든 상태였다. 어쩐지 통증은 갈 수록 심해졌고 그날 꼭 처리해야 하는 일을 하고 나서는 바로 조퇴를 했다. 조퇴를 하고는 병원에 들렸다가 집에 갈까 했지만 근육통이 너무 심해 집에서 좀 쉬다가 간신히 병원에 갔다. 그냥 집에서 쉴까 고민했지만 물리치료를 받는 게 좋을 듯했다. 물리치료를 받고 집으로 와서 드러누웠고 주말 내내 가급적 누워 지냈다.
주말 내내 집에서 가급적 누워 있었지만 근육통 통증이 완화되지 않았다. 그래서 조제약을 먹기도 했다. 약은 월요일에 병원 갔을 때 처방받았다. 2년 전에 약을 먹고 피를 토한 적이 있어 이번엔 좀 약한 걸로 처방받았는데 두 번째 약봉지를 먹기 시작했을 때부터 현기증과 매스꺼움을 느꼈다. 그래서 약 먹기를 중단했는데 통증이 완화되지 않아 약을 먹기로 했다. 하지만 별 효과는 없었… 끄응.
이렇게 근육통 통증에 차도가 없자, 만약 평생 근육통을 겪으며 살아야 한다면 나는 내 삶을 어떻게 재구축해야 할까란 고민을 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 차도야 있겠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것 아닌가. 차도가 없다면 나는 이 통증을 내 삶의 기본값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그런 상황에서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일을 재조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변할까? 지금까지 7~8년 가량을 장애-퀴어 세미나에 참가했음에도 장애 이슈를 깊이 있게, 폭넓게 다루지 않았다. 만약 근육통이 일상으로 변한다면 나의 퀴어 정치학, 트랜스젠더퀴어 이론은 어떻게 재구축될까란 고민을 했다.
아울러 예전 어느 만화책에서 읽은 구절이 떠올랐다. 조연급 인물 ㄱ은 자신이 정말 아플 땐 회사에서 조퇴하지 않는다고 진짜 아프면 회사에서 앓는다고 말했다. 그렇게 회사에 있으면서 동정 받는 게 낫다고. 대신 아프다고 조퇴를 할 때는 사실 전혀 안 아플 때라고 했다. 조퇴해서 회사를 쉬는데 아파서 집에서 누워 있는 게 얼마나 억울하냐, 회사를 쉴 땐 놀러 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와 비슷한 상황은 아니지만 병가로 집에 누워 있는게 결코 편하지 않다. 아니 누워 있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고 책이나 글을 제대로 읽을 수도 없는 일이다. 누워서 책을 읽으면 제대로 안 읽힌다. 누워 있을 때 등을 받칠 수 있는 기구가 없기 때문에 그냥 누워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회사나 직장을 쉬려면 안 아플 때 쉬어야지 아파서 쉬면 그게 아픈 것과 별개로 괴롭다. 지난 금요일에 퇴근/조퇴하며 사람들에게, ‘다음주에 꼭 출근하고 싶다’고 말했는데 그건 진심이다. 그냥 출근할 수 있으면 출근하는 게 낫다. 아파서 누워있는 일은 편한 일이 아니라 더 힘든 일이다.
아무려나 나는 오늘부터 며칠 다시 병가를 냈다. 병원에 가서 물리치료를 받았고 그나마 어제보단 좀 나은 상태다. 그럼 나는 언제 출근할 수 있을까? 이게 참 어렵다. 지난 수요일, 출근할 수 있겠거니 하며 호기롭게 나섰다가 목금 이틀 간 후유증이 심했던 일을 겪고 나니 어느 정도로 차도가 있을 때 출근하는 게 좋을지 가늠이 안 된다. 이제 좀 괜찮다 싶을 때 출근하는 게 맞는지, 그냥 확실히 괜찮다 싶을 때 출근하는 게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무엇보다 근육통 통증의 차도가 느린 점도 고민이다. 내 삶의 기본값을 바꿔야 하는 순간인지, 그냥 일시적 현상인지 현재로선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려나 출근하고 싶다.
+
요즘 다시 읽고 있는 책의 한 구절
“내 세대의 여성주의자에게는 자기를 희생하는 하위문화가 있다. 훌륭한 여성주의자는 착한 여자들이 어디서나 그러는 것처럼 아플 때까지 일해야 한다. 모두가 진이 다 빠질 정도로 과도하게 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예외가 될 수 있을까? ‘우리들’은 아플 시간이 없고 자기 몸을 귀하게 챙길 시간도 없다.”(수전 웬델, [거부당한 몸: 장애와 질병에 대한 여성주의 철학] 강진영, 김은정, 황지성 옮김. 서울: 그린비, 2013.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