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공부/연구를 하는가 (혹은 어떻게 공부를 하는가)

며칠 전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서 던진 질문이다. 왜 공부 혹은 연구를 하는가.

수업시간에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그럴 상황도 아니었다) 루인에겐 어느 정도 선명한 편이다. 왜 공부를 하느냐면 루인의 경험/삶을 읽고 싶기 때문이다. 그 외의 별다른 ‘욕심’은 없는 편이다.

어릴 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루인의 관심은 루인이고 그래서 루인의 경험을 읽는데 우선적인 관심이 있었다. 고리타분하고 말장난 같은 이론 따위 루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아무리 그 이론이 전 세계적인 유행이라고 해도 그것이 루인의 삶을 설명할 수 없다면 하나의 자극제는 될 수 있다고 해도 그렇게 까지 대단하게 보이지도 않았고 애써 배워야겠다는 몸앓이도 들지 않았다.

항상 이 몸앓이가 우선시 되고 그 이후 어떤 텍스트들을 찾는 순서로 이루어 졌다, 루인이 공부하는 방식은. 그러니까, (텍스트와 관련한) 루인의 경험을 앓고 루인의 위치positioning를 어느 정도 읽은 후에야 논문 등의 글들을 읽었다. 그러길 선호하는 건, 과거, 이런 글들에 의해 루인의 경험을 읽는데 실패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시절, 앎과 삶을 같이 읽기 보다는(요즘은 앎과 삶이 분리될 수 없다고, 이론과 경험을 분리해서 몸앓을 수 없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그건 이론에서나 가능하지”라는 언설이 불편하고 감정 없는 이론을 위험스럽게 받아들인다) 지식 자랑에 급급했기에 루인의 경험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지식으로 루인의 경험이 설명되지 않으면 루인의 삶이 이상한 것이지 그 이론이 문제라고 여기지 않았다.

아직도 이런 경험에 대한 걱정이 남아서 인지, 어떤 텍스트를 읽으려고 작정을 하면 그 전에 그 텍스트와 관련된 경험을 먼저 읽을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가지려고 하는 편이다. 그럴 때 텍스트와 루인의 경합, 이동mapping 등이 더 즐겁게 발생했다. 텍스트 내용을 파악하려고 급급할 땐 지루하거나 재미가 없었다.

이랑 세미나의 다음 커리를 정해야 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주제는 이반queer. 하지만 루인 역시 관련 커리를 읽은 것이 별로 없다. 현재 루인의 작업은 텍스트 읽기가 아니라 루인의 삶을 읽는 작업 중이기 때문이다. 물론 몇 개의 텍스트를 읽고 있긴 한데, 세미나로 같이 쓰기엔 좀 애매한 구석이 있는 텍스트들이다. 이래저래 고민이다.

우주인/외계인

우주인이나 외계인이나 거의 비슷한 의미로 쓰이는데, 만약 우주인이나 외계인이 스필버그식으로 E.T.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 두 단어는 서구 근대적 이상을 정확하게 재현한다.

우주인이란 말은 지구는 우주의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의미이고 외계인이란 말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이 범세계적인 공간이라는 의미를 전제한다.

즉, 통상 우주인에 지구인은 포함되지 않기에 지구는 우주 밖, 어딘가에 위치한다는 의미이고(가장 탈육화된disembodiment 사유로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와 같다) 외계인이 우주인과 같이 지구 밖에서 온 사람을 의미하기 위해선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이 세계의 기준이라는 인식(제국주의적 시각에서의 바로 그 인식)에서 가능하다.

질문을 되묻기

루인이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중에 하나는 “수학과이면서 어떻게 여성학을?”과 “언제부터 채식을?”이다.

오늘 수업 커리 중에 “어떻게 해서 (한국 사람인 당신이) 북아프리카를 공부하게 되었느냐?”란 구절이 있다. 이 커리의 핵심이자 시작이 되는 질문이다. 루인에게 이 질문은 불편했는데, 저자가 이 질문 자체를 문제시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같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중산층 백인 남성들이 아프리카 지역이나 남태평양의 어떤 섬을 연구할 때는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반면 그렇지 않은 위치에 있는 사람, 아프리칸-아메리칸이 흑인문화에 대해 연구 하지 않고 백인 중산층 문화에 대해 연구를 한다거나 비이성애자가 비이성애에 대해 연구를 하지 않는다거나 한국인이 브라질을 연구한다던가 하면 늘 상 이런 질문이 따라 붙는다.

이런 질문 자체가 제국주의적이고 식민주의적인데 이런 질문 자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면 그로인해 쓰여 지는 글은 어떤 면에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고 본다.

질문을 되묻기, 루인이 받았던 질문에 답을 궁리하며 몸앓았던 부분들이다. “어떻게 수학과면서 여성학을 하게 되었”느냐는 질문 자체가 사실, 루인에겐 상당히 낯선데, 루인에겐 수학과 여성학을 같이 공부하는 것이 별 다른 갈등을 일으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어떻게 대답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질문 자체를 되물으면서-“왜 수학과 여성학을 함께 공부하는 것이 낯설게 느껴지죠?”-전혀 다른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질문자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을 읽는다는 것은 단지 ‘그들’의 위치를 읽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서 있는 위치를 다시 보게끔 하는 방법이다. 질문을 바꾸지 않았다면 수학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질문자들의 편견, 근대에 생성된 분과학문, 한국의 교육제도, 수학/여성학과 성별(여기선 성별gender이다) 등등에 대해 몸앓을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있었다 해도 현재와는 달랐을 듯 하다.)

오늘 수업 커리의 저자가 글을 못 썼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질문 자체를 다시 되물었다면 완전히 다른 글이 되지 않았을까, 그것이 아쉬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