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

“구체성, 움직임, 위치의 정치성에 기반한 그의 언어에는 당위적이거나 선언적인 논리가 없다.”
-정희진 <정박하지 않는 사상가의 삶과 언어>(2005)

선생님의 이번 글을 읽으며 (최근의 또 다른 글과 함께) 한 문장, 한 문장의 빼어남과 통찰에 아팠다. 특히 위에 쓴 문장을 읽고 잠시 숨이 멎었다.

(다른 사람이 쓴) 당위적이거나 선언적인 글을 볼 때 마다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정작 루인 자신이 때때로 그런 문장을 쓰고 있거나 쓰려고 하는 모습을 접하곤 한다. 그럴 때 마다 문장을 바꾸고 몸을 바꾸려고 하지만 아직도 그리고 지금도 당위적이거나 선언적인 글을 쓰고 있는 자신을 만난다.

그래서 위의 글을 읽으며 아팠다. 당위적이고 선언적인 글을 쓸 수 있고 그것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 자체가 권력과시이며 폭력이라고 믿는다. 자신의 경험/언어만이 절대적인 객관이며 다른 사람의 경험/언어는 예외일 뿐이라는 태도, 그것이 권력과시 혹은 폭력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계속해서 움직이며 과정 중에 있음을 인식하는 것, 고정되지 않는 관계를 인식하고 그런 몸 속에서 소통하는 것.
글을 쓸 때 마다, 욕망을 바란다.

대학원 수업 청강

학점 등록으로 학교를 다니다 보니 듣는 수업이라곤 수학 과목 하나 뿐이다. 그래서 청강으로 듣는 대학원 여성학 과목 하나가 소중하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과목, 다른 과목과 연계된 과목이라, 다른 학과의 사람들이 더 많다. (그럴 수 밖에 없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지난 주는 수업 소개 정도였고 오늘에야 비로소 수업을 시작했는데, 좋으면서도 실망스러운 부분도 있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선생님 수업이야 좋았다. 이 “좋았다”의 의미는 마냥 좋았다가 아니라 루인과 의견이 달랐던 부분도 있었기에 자극이 되었다는 의미에서의 좋았음이다. 소심한 루인, 수업 시간에 곧 바로 루인의 의견을 제시하고 싶어 하면서도 그러지 못한다. 다음부터는 그래볼까 하는 몸의 준비를 하고 있다.

실망스러운 부분은 같이 듣는 사람들. 대학원생이 되고 학기가 지나면 다들 그렇게 거만해지고 아는 척 하고 싶어서 안달하게 되는 것일까? 두렵다. 루인도 나중에 대학원에 들어가면 그렇게 될까봐. 자신감이 있는 것과 아는 척 하며 거만한 것은 다르다. 몇몇 사람들이 보여준 태도는 거만함이었다.

사실 그런 사람들의 태도를 보며, 불안함을 읽는다. 자신의 빈약함-가방끈은 길어져 가는데 그것을 바쳐 줄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할 때 나타낼 수 있는 그런 거만함이 읽힌다. 정말 실망스러운 부분은 이런 부분이었다. 대학원생에 대한 어떤 환상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수업 중 간혹 말하는 의견 혹은 ‘토론’은 다소 실망스러운 수준이다. 이렇다 보니 그 거만한 태도가 더욱더 불안으로 다가온다.

수업을 듣다 잠시 정말 대학원을 가야하나, 하는 의문이 몸을 타고 돌았다. 그랬다. 이렇게 위계서열화 되어 있는 풍토에서 공부를 해야 하나. 위계서열만 있고 지적 성장은 부족하게만 보이는 풍토에서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루인이 원하는 만큼 얻어 낼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이제 시작이니 이런 걱정이 너무 앞선 것이길 바라지만, 낯선 경험으로의 느낌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학부생의 어설픈 소리라고 해도, 이런 느낌 지속해야 할 것이다.

#수업시간에 보여준 선생님의 이성애주의gender는 나중에 반드시 문제제기해야 할 부분!

전공의 “이상한” 조합

가끔씩 루인의 전공을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다. 답을 하면 그 반응이 재미있는데, 너무 한결같다는 것이다.

수학과 여성학을 전공하고 있는 루인이기에, 사람들은 물어본다, “수학을 하면서 어떻게 여성학을 하게 되었어요?” (열에 아홉이 이렇게 묻는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이런 질문을 받은 지가 꽤나 되지만 여전히 어렵다. 특히나 그 자리가 아주 간단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는 그런 자리라면 더더욱.

수학과 여성학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느냐는 질문은 많은 걸 의미하지만 간단하게 되물으면 “어째서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세요?” 정도 되겠다. 어떻게 만났느냐는 질문은 답하기가 너무 어려운데 그건 기본적으로 루인의 고1때부터의 삶을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당시엔 여성학을 몰랐던 시절이었고 철학과 수학을 갈등하던 시기였다. 문과냐 이과냐 로 갈등하던 당시, 루인에게 수학이 어떻게 이과이고 철학이 어째서 문과인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둘은 너무도 닮아 있었고 칼로 자르듯 쉬 구분될 수 없었다. 결국 수학’의’ 이과를 택했고 그 후로 수학과 놀면서 깨달은 건, 수학은 차라리 인문학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근대 분과학문의 분류방식에 따르면).

물론 이것을 수학언어 속에서 체득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수학과 인문학은 너무도 잘 만난다고 믿으면서도 “어떻게?”라는 질문에 답할 수는 없었다. 그 질문에 답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고 지금에 와서야 그 상상력의 놀이가 너무도 닮아 있고 서로를 같이 상상할 때 더 깊이 있는 ‘이해’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잘 안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한 자세한 건 여기선 생략.-_-;;)

그렇기에 수학과 여성학이 만나는 것은 조금도 모순이 아닌 것이다. 결국 “수학을 하면서 어떻게 해서 여성학을 하게 되었어요?”란 질문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을 모순으로 보려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만나는 계기가 된다. 루인 자신에겐 너무도 ‘자연스러운’ 만남이 루인이 아닌 사람들에겐 상상 ‘불능’의 영역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 수학을 둘러싼 ‘오해’에서 비롯하지 않을까 싶다. 어려운 계산을 하는 것이거나 살면서 아무 필요도 없는 증명 같은 걸 배우는 학문이랄까, 뭐 그런 선입견 같은 거.

앞으로 어떻게 대답할 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얼버무리면서 적당히 넘어갈 수도 있고, 너무도 닮아 있다고 말할 수도 있고, 때론 어째서 그 둘의 만남을 낯설게 여기냐고 되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 되었든 부담스러운 것만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