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ll hooks란 이름

bell hooks란 필명 혹은 가명은 그의 모계 증조할머니의 이름이라고 한다. 태어났을 때의 이름은 Gloria Watkins.

(이 이름을 선택한 여러가지 이유는 [Talking Back]의 “23. to gloria, who is she: on using a pseudonym”을 참조하세요. bell hooks란 이름으로 인한 여러 에피소드도 같이 실려 있는데 일테면 (글로리아로 알고 있는) 누군가와 페미니즘에 대해 토론하다가 상대방이 벨 훅스에게 한 말, “벨 훅스를 읽어 보세요.”)

이 이름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19세기 흑인여성운동가들의 이름 처럼 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테면 Anna Cooper, Mary Church Terrell처럼. (페미니즘 사상사를 배우다 보면 백인여권론자인 Mary Wollstonecraft, Elizabeth Cady Stanton 등은 배우지만 앞서 언급한 흑인여성운동가는 거의 안 배운다. 덧붙이면 [Ms.]란 잡지는 대부분 알지만 [Essence]를 아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 이 역시 인종주의racism와 제국주의의 결과겠지만… 루인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19세기 흑인여성운동가들은 용감했고 목소리를 가졌으며 자신의 경험을 말 할수 있었다. 그렇기에 목소리를 억압할 것을 강요 받던 시절, 벨 훅스란 이름은 발화하려는 몸언어를 듣고, 드러낼 수 있게 하는 용기를 주었다고 한다.

재미있는 건, 벨 훅스의 첫 번째 책의 제목 [Ain’t I A Woman: Black Women And Feminism] 중 “Ain’t I A Woman”은 유명한 페미니스트 Sojourner Truth의 말이다. 결국 벨 훅스란 이름과 이 말은 19세기라는 시점과 만나고 있다.

19세기는, 적어도 아프리칸-아메리칸 ‘여성’들에게 있어선 노예해방운동의 시대였으면서 동시에 여권운동에 참여했던 시기다. 벨 훅스의 첫 번째 책, [Ain’t I A Woman]은 페미니즘 내에서 인종 문제가 부상하던 시기에 나왔고 sex-race를 동시에 사유할 것을 단호하게 말하고 있는 책이다.

뭔가 재밌게 만나고 있다는 몸앓이를 지울 수가 없다. 19세기란 코드와 sex-race란 코드가 교직하는 순간.

어쨌거나 낼이면 [Talking Back]도 마무리구나. 그럼 벨 훅스랑은 10월에나 만나는 거야? 우잉~ 아쉬워

몇 가지 결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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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적은 bell hooks읽기는 한 달 가량 쉬기로 했다.

이번 주말이면 [Talking Back] 읽기가 끝난다. 그러면 9월 달엔 오늘 프린트한 몇 개의 논문들을 읽을까 한다. 당장 루인이 고민하고 있는 부분들이라 알고 싶은 것도 있고(잘은 모르지만 아마 국내에 관련 도서는 거의 없는 듯 싶다. 논문들은 몇 있는데…) 말 그대로 쉬어가려는 것도 있다.

쉬어가려는 것은, 돌이켜 보면 열 달 가량을 계속 bell hooks만 읽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벨 훅스 문법엔 익숙한데 다른 영문을 보면 낯설거나 더듬거리거나 그런다. 그래서 한 달 정도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읽을 필요가 있겠다는 몸앓이가 들었다.

읽을 논문들은 거의 sex/gender/sexuality에 관한 글들이다. 루인식으로 표현하면 항상 안다고 믿지만 사실 전혀 모르는 것이 sex/gender/sexuality가 아닐까.

그러고 나면 이제 루인이 읽고 싶어하던 bell hooks의 [Yearning]을 읽을 예정이다. 어쩌면 이 책을 읽기 위해 이전의 책들을 읽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각각의 책들이 다 좋았지만, 처음 영서를 읽겠다고 시작했을 때 가장 읽고 싶었던 책이 [Yearning]이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다음 책은 정해져 있다. 그런데 그땐 두 권을 동시에 읽을 것만 같은 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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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갈등하던 그 과목 듣지 않기로 했다. 냐하하. 아쉬움이 없을리 없겠지만 그냥 버리기로 했다. 그 시간에 루인이 읽고 싶은 글을 읽어야지.

대화의 ‘조건’

전쟁 혹은 폭력의 반대말은 고요한 상태가 아니라 격렬한 대화라는 말, 루인이 참 좋아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 대화가 모든 발화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루인에게.

대화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우선 말하고 듣기라고 몸앓는다. 물론 이 말하고 듣기란, 몸의 전체적인 활동을 의미한다. 이전에도 말했듯 누구에게나 자신 만의 언어가 없는 것이 아니기에 누구나 ‘말하기’는 하고 있다고 몸앓는다. 그것을 자신과 다른 타인들이 들을 수 있느냐의 문제가 남아 있는 것이다. 대화라면 최소한 말하기 뿐 아니라 듣기 또한 핵심적인 부분이다.

하지만, 단지 듣기만 한다면 그건, “그래, 그러니 우리는 달라.”라는 식의 결과만 초래하거나,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어쨌거나 내 말 들어!!”라는 식의 폭력만 초래할 뿐이다. 말하고 듣는 과정을 통해 변화變化(transforming, becoming, metamorphosis, …)하는 것이 필연적인 과정이라고 몸앓는다. 이러한 자기 변화 과정이 없다면 그건 대화가 아니라 독백일 따름이다.

그렇기에 소위 말하는 마초들의 성폭력 발언/행동들(발언은 행동이 아닌가?)이나 권력자들이 “표현의 자유”를 들먹이는 것은 권력의 과시/폭력이지 그것이 대화라곤 몸앓지 않는다. 그것이 대화이기 위해선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읽고(positioning) 이를 바탕으로 타인과 소통하고 그런 소통을 통해 계속해서 변화해 가는 것이다.

그럼 이제까지의 권력자(혹은 스스로를 주체로 호명하는 이들)들에 의해 생성된 담론들은 틀렸다는 말일까. 물론 아니다. 그런 담론들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담론은 무수한 다른 담론들의 일부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그런 담론이 진리/객관/보편성이었다면 격렬한 대화를 통해 그런 담론은 특정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경험일 뿐, 보편적인 경험이 아니란 것을 깨닫는 것이다.

격렬한 대화는 이런 거라고 몸앓는다. 물론 현재의 몸앓이일 뿐이지만, 대화를 위한 그리고 그것이 대화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있다는 것이 현재의 믿음/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