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의 ‘조건’

전쟁 혹은 폭력의 반대말은 고요한 상태가 아니라 격렬한 대화라는 말, 루인이 참 좋아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 대화가 모든 발화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루인에게.

대화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우선 말하고 듣기라고 몸앓는다. 물론 이 말하고 듣기란, 몸의 전체적인 활동을 의미한다. 이전에도 말했듯 누구에게나 자신 만의 언어가 없는 것이 아니기에 누구나 ‘말하기’는 하고 있다고 몸앓는다. 그것을 자신과 다른 타인들이 들을 수 있느냐의 문제가 남아 있는 것이다. 대화라면 최소한 말하기 뿐 아니라 듣기 또한 핵심적인 부분이다.

하지만, 단지 듣기만 한다면 그건, “그래, 그러니 우리는 달라.”라는 식의 결과만 초래하거나,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어쨌거나 내 말 들어!!”라는 식의 폭력만 초래할 뿐이다. 말하고 듣는 과정을 통해 변화變化(transforming, becoming, metamorphosis, …)하는 것이 필연적인 과정이라고 몸앓는다. 이러한 자기 변화 과정이 없다면 그건 대화가 아니라 독백일 따름이다.

그렇기에 소위 말하는 마초들의 성폭력 발언/행동들(발언은 행동이 아닌가?)이나 권력자들이 “표현의 자유”를 들먹이는 것은 권력의 과시/폭력이지 그것이 대화라곤 몸앓지 않는다. 그것이 대화이기 위해선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읽고(positioning) 이를 바탕으로 타인과 소통하고 그런 소통을 통해 계속해서 변화해 가는 것이다.

그럼 이제까지의 권력자(혹은 스스로를 주체로 호명하는 이들)들에 의해 생성된 담론들은 틀렸다는 말일까. 물론 아니다. 그런 담론들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담론은 무수한 다른 담론들의 일부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그런 담론이 진리/객관/보편성이었다면 격렬한 대화를 통해 그런 담론은 특정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경험일 뿐, 보편적인 경험이 아니란 것을 깨닫는 것이다.

격렬한 대화는 이런 거라고 몸앓는다. 물론 현재의 몸앓이일 뿐이지만, 대화를 위한 그리고 그것이 대화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있다는 것이 현재의 믿음/몸이기도 하다.

경험의 정치화

데이터가 되기 싫으면 자기 경험을 직접 이론화할 수 있어야 한다.

아픈 몸의 발화를 읽고 그것을 정치화할 수 있어야지 아픈 몸이라는 경험만 가지고 있는 것으론 충분하지 않다.

경험이라는 것이 그 자체로 언어화 되는 것은 아니다. 경험은 지극히 정치적이고 논쟁적인 것이기에 경험을 해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아픈 몸은 언어의 증거이다

몸이 아팠다. 이 말은 병이 나서 아팠다는 것이 아니라 “언어 없음”으로 인한 몸앓이였다. 타인의 행동에 부당함 혹은 폭력성을 느꼈지만 그것을 표현할 언어가 없었다. 비단 타인의 행동에 대해서 뿐이랴. 루인,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잘못했는데, 분명 어떤 행동에 스스로도 깨림칙함을 느꼈는데 왜 그런지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지냈고 그런 불편함들이 몸에 쌓여 가면서 아프기 시작했다.

그래서 언어를 찾았는가.
혹은 언어를 배웠는가.

그 말을 기억한다. “자기 목소리를 가져라.” 혹은 “자기 언어를 가져라.” 이 말에 매혹되었다. 언어와 소통에 천착하는 루인이기에 이 말은 그 자체로 매혹이었다. 하지만 충돌하는 감정들. 이 감정의 출처는 어디일까.

소위 진보적이라고 자처하거나 운동권이라고 불리는 집단에서 “딸들아 깨어나라”와 같은 노래를 부른다고 들었다. “딸”은 깨어나야 할, 계몽되어야 할 대상인가. 정희진 선생님의 말처럼 “성차별에 저항하는 여자는 나쁜 여자로 찍히고, 가만있으면, “여성들이 의식이 없어서 문제”“고 여긴다. 마찬가지로 “목소리를 가져라”, “언어를 가져라”는 말은 목소리나 언어가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이는 “딸들아 깨어나라”처럼 계몽의 대상이라는 타자화/대상화와 얼마나 다른가.

목소리가 없었다고 언어가 없었다고 몸앓지 않게 되었다, 어제 쓴 글에서도 적었듯. 목소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말하고 있지만 그 말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 말들, 언어들이 억압되고 억눌려진 것이다.

몸이 아팠던 건, 그리고 지금도 아픈 건, 언어가 없어서 생기는 감정들의 충돌들 때문이 아니라 억압하고 있는 자기 안의 언어/감정들이 깨어나려고, 발화하려고 몸을 타고 돌기 때문이다. 언어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를 들을 귀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혹은 그 언어를 발화하면 ‘처단’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언어가 없는 것처럼 가장假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가장된 행동이 자신을 더 아프게 하는 ‘역설’적인 상황.

“언어를 가져라”, “목소리를 가져라”가 아니다. (이런 언설은 또한 몸과 정신의 이분법을 가정한다.) 자신의 몸이 곧 언어이고 목소리며 감정이다. 페미니즘은 언어를 주거나 목소리를 주는 것이 아니라 억압된 언어/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용기라고 몸앓는다. 그래서 아픈 몸 혹은 ‘무력감’은 허약함 혹은 약자/타자의 ‘약점’/본질이 아니라 발화하려는 몸의 팽팽한 긴장감이다. 몸이 아픈 건 현 상황에 부당함, 불편함을 느끼는 몸의 또 다른 발화 방식인 것이다.

자기 몸에 가장 편한 언어가 있다고 몸앓는다. 그 언어는 하나가 아니라 다양해서, 때론 모순처럼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모순이 아니며 오히려 그것을 모순으로 여기며 한 가지 방식의 목소리만 강제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런 다양한 몸언어를 발화할 수 있기를…

Audre Lorde의 시 [Latany For Survival]를 기억한다.

and when we speak we are afraid
our words will not be heard
nor welcomed
but when we are silent
we are still afraid

So it is better to speak
remembering
we were never meant to survive.

어차피 잃을 것도 없다면, 아픈 몸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랑에도 올린 글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