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대청소녀-‘불량’-구금시설 관련 논문들

이런저런 일로 영어논문을 찾아서 읽고 있습니다. 학교에 속한 학생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학생이라고 자처하는 입장에서 영어논문을 읽는다는 게 뭐 그리 대수겠어요. 영어건 한국어건, 논문인건 단행본이건 뭐건 읽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죠. 뭐든 읽지 않고 있다면 그걸 부끄럽게 여기고 고백해야겠죠. 그러니 읽는다는 일은 특별할 것 없습니다. 다만 저로선 워낙 새로운, 이제까지 공부하지 않은 영역을 읽고 있어서 이런저런 고민이 많달까요? 제가 구금시설, 비행/일탈/불량, 십대와 같은 주제어로 논문을 찾고, 읽을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까요. 뭐, 워낙 잡식성에 온갖 것에 관심이 있으니 언젠가는 한번 읽었겠죠. 하지만 이렇게 찾아서 읽을 줄은 몰랐어요. 그것도 집중해서 여러 편을… 하하;;

찾아 읽은 논문 중엔 상당히 좋은 논문도 많고 제목에 낚였다는 느낌이 드는 논문도 많습니다. 낚였다는 느낌이 드는 논문의 대다수는 양적연구를 수행한 논문입니다. 설문지를 몇 백 명에서 몇 천 명에게 돌려 그 내용을 통계로 분석한 논문들. 고백하자면 학교를 다닐 때, 통계분석(양방) 논문을 읽는 적이 거의 없습니다. 2년 동안 5편이 될까 말까 합니다. 그보다 적을 수도 있고요. 전 통계분석 논문은 재미가 없어서 안 읽는 편입니다. 이미 다 아는 사실을 반복하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이를테면, 한국에서 트랜스젠더의 생활을 조사한 후, 트랜스젠더가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건 정말 힘들다란 결론을 내린다면? 읽는 시간이 아까워요. 조사한 사람에겐 의미가 있으려나요? 정책이나 제도를 바꾸기 위한 자료로선 의미가 있습니다. 어쨌거나 통계자료를 통해 어떤 ‘구체적인 사실’을 제시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논문이라면 힘들다는 통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구조적인 맥락 등을 같이 분석해야겠죠. 언론사의 여론조사에서도 제시할 수 있는 내용을 학술지 논문을 제시한다는 건 좀… 양식이 없거나 양심이 없거나…

Cochran, Bryan N., Angela J. Stewart, Joshua A. Ginzler, and Ana Mari Cauce. “Challenges Faced by Homeless Sexual Minorities: Comparison of Gay, Lesbian, Bisexual, and Transgender Homeless Adolescents With Their Heterosexual Counterparts.” American Journal of Public Health. 92.5 (2002): 773-777.
Cochran 등이 쓴 논문 “노숙 성적소수자에 의해 직면하는 도전: 이성애 노숙 청소년과 게이, 레즈비언, 바이 그리고 트랜스젠더 노숙 청소년의 비교”를 읽었습니다. 일단 제목만으론 혹합니다. 검색하다가 이 제목에 끌려 내용도 검토하지 않고 출력부터 했습니다. 하지만 결론은? 이성애 노숙청소년보다 LGBT 노숙청소년이 더 어렵다, 성적지향 및 동성애혐모/호모포비아 문화와 십대란 점이 겹쳐있다…가 끝입니다. LGBT 십대의 가출을 호모포비아 문화와 연결해서 고민해야 한다는 문장에 감동 받을 정도입니다. 겨우 이 문장에… 물론 잡지의 성격에 따라, 분과학문에 따라 논문을 쓰는 방식에 차이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건 좀… 암튼 제목 하나는 잘 뽑았습니다. ㅡ_ㅡ;;
(조만간에 읽을 논문 중에 더 매력적인 제목도 있는데, 그건 어떨까요? ;; )

Widom, Cathy Spatz, and Joseph B. Kuhns. “Childhood Victimization and Subsequent Risk for Promiscuity, Prostitution, and Teenage Pregnancy: A Prospective Study” American Journal of Public Health. 86.11 (1996): 1607-1612.
위덤과 쿤스의 논문 “아동 피해와 그것이 난교, 성매매, 그리고 십대 임신에 끼치는 위험”을 읽었습니다. Promiscuity를 사전에선 난교라고 설명하고 있어서 이렇게 옮겼지만 정확한 번역은 아닙니다. 아니, 동의할 수 있는 번역이 아닙니다. Promiscuity는 일부일처가 아닌, 배타적인 관계가 아닌 성관계를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논문을 읽다보면 1년 동안 10명과 성관계를 맺은 경험을 promiscuity란 용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논문의 전제 자체에 문제가 있습니다.

내용은 어린 시절의 아동폭력 피해 경험이 promiscuity, 성매매, 그리고 십대임신에 끼치는 영향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여타의 논문이 통상적인 통계 자료를 비교하며, 아동폭력 피해 경험이 있는 이들은 promiscuity, 성매매, 십대임신 경향이 상당히 높고, 피해 경험이 없는 이들은 경향이 낮다는 식의 결론을 내립니다. 하지만 이런 비교는 두 집단의 다른 사회적 조건을 간과합니다. 만약 피해 경험이 있는 집단은 빈곤층이 상당수고 피해 경험이 없는 집단은 상류층이 상당수라면? 빈곤층에 피해 경험이 많고, 상류층에 피해 경험이 적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계급, 젠더, 인종, 성적지향, 젠더정체성 등에 따라 전혀 다른 결론이 나올 수 있다는 점이 고려해야 하는데 간과한다는 거죠. 그래서 이 논문은 아동폭력 피해 경험이 있는 집단과 피해 경험이 없는 집단을 나눌 때 비슷한 환경에 있는 이들을 선별합니다. 그래서 가급적 다른 조건은 비슷하게 세팅하고, 아동폭력 피해 경험 여부만을 변수로 만들려고 애씁니다. (물론 이런 세팅이 완벽할 수 없는 건 저자들도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데이터 통계를 분석하니, promiscuity와 십대임신은 아동폭력 피해 경험과 상관관계가 없고, 성매매만 아동폭력 피해 경험과 관련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 결론은 기존의 많은 논문들이 제시하는 결론은 다르고요.

이 논문은 데이터 통계분석이 중심이지만 조사분석을 위한 세팅의 방식에 따라 상당히 흥미로운 논문이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물론 구조적인 분석 등은 거의 없다는 점에서 통념을 반복하긴 합니다. 하지만 세팅만으로도 이렇게 다른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읽는 재미가 있습니다.
(관련 공부를 하시는 분들은 이미 이런 기법을 잘 알고 계시겠죠? ^^;; )

Brown, Lyn Mikel, Meda Chesney-Lind and Nan Stein. “Patriarchy Matters: Toward a Gendered Theory of Teen Violence and Victimization.” Violence Against Women. 13.12 (2007): 1249-1273.
브라운, 체스니-린드, 스틴(슈타인?)의 논문을 읽었습니다. 논문 제목을 번역하기가 좀 난감한데요. 이 논문의 가장 마지막 문장에 제목의 단서가 나옵니다. “… the reality that living in a patriarchy matters.” 대충 옮기면, 가부장제에서의 삶이 물질로 만드는 실재…? 가부장제라는 사회구조에서 여러 억압 구조들이 교차하며 만들어지는 삶을 문제 삼자는 내용인데, 이걸 한글로 옮기려니… 저 처럼 내공 없고, 실력 없는 인간으로선 불가능한 일입니다. 크크크. ㅠ_ㅠ 억지로 옮기면 “가부장제 문제: 십대 폭력과 피해의 젠더화된 이론을 향하여” 정도입니다.

체스니-린드는 관련 주제어로 검색하기 전까진 전혀 모르던 사람인데요. 이번에 이런저런 논문을 찾고, 읽는 과정에서 청소녀-일탈/불량-구금시설 관련해서 상당히 유명한 인물이더군요. 마찬가지로 브라운과 스틴도 유명인들이고요. 제게 좀 더 익숙한 이들로 비유하자면, 게일 러빈, 주디스 버틀러, 스잔 스트라이커가 공동으로 논문을 쓴 격? 아니면 구글, 마이크로소프트(MS), 애플이 협력해서 신제품을 출시한 격? 혹은 네이버, 다음, 네이트가 협력해서 새로운 포털을 만든 격? 흐흐. 뭐, 대충 이 정도의 느낌을 주는 공저자들이 모인 논문입니다. 물론 이런 기획에 따른 문제도 많을 테고, 제가 아직 모르는 분야라, 이런 비유가 문제가 많긴 하겠지만요. 그나마 다행인 건, 적어도 체스니-린드의 경우 꽤나 괜찮은 논의를 펼치는 저자란 점이죠. 다른 논문을 읽고 호감을 느껴서 이 논문도 읽기로 했으니까요. 🙂

체스니-린드는 단독저서보다 공저가 많은 듯한데요. 다른 공저 논문에선 여성의 폭력이 좀 더 관계적이란 식의 표현, 덜 폭력적이란 식의 표현이 기존의 여성성을 반복하고, 강화할 수 있음을 지적해서 인상적이었죠. 현상적으로 그렇다 아니다를 떠나서, ‘더 관계적이다’, ‘남자/소년에 비해 덜 폭력적이다’란 표현 자체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지적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브라운 등이 함께 쓴 이번 논문 “Patriarchy Matters”는 이런 인식의 연장선에 있다고 해야 할까요? 십대여성 혹은 청소녀의 범죄 및 구금과 관련한 논문에서 공통으로 지적하고 있는 사항은 1990년대 들어 여성범죄율, 청소녀 범죄율이 상당히 두드러지게 증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건 미국 논문과 한국 논문에서 공통으로 동의하고 있는 부분이고요. 경찰청, 교정시설 등에서 제시하는 통계 역시 이것이 사실이라고 증명합니다. 십대여성의 체포율이 상당히 증가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재밌는 건, 1990년대 들어서면 ‘여성’과 ‘남성’에 관계 없이, 폭력이 줄어들고 있는 추세란 점입니다. 폭력은 줄어들고 있는데, 범죄율은 증가한다? 브라운 등이 쓴 이 논문은 바로 이 지점에서 논의를 출발합니다. 페미니즘/여성주의/젠더관점에서 접근하건 안 하건 상관없이, 거의 대부분의 논문들이 여성의 범죄율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은 언급하지만 폭력은 감소하고 있음을 간과한다는 점에서, 이 논문의 의의는 상당합니다. 저자들은, 폭력이 감소하는데 체포율이 증가하고 있다는 건 다른 무언가가 변한 것이라고 지적하며, 그것은 여성을 통제하는 방식이 변한 점과 관련 있다고 주장합니다.

거칠게 요약하면 두 가지. 과거엔 젠더 차이를 강조하며 여성을 통제했다면 지금은 젠더 동등을 강조하며 여성을 통제하고 있으며, 과거엔 여성 섹슈얼리티를 통제했다면 지금은 여성 폭력을 통제하고 있다는 거죠.

전자의 경우, 과거엔 여성과 남성은 다르기에 여성의 가사노동은 당연하단 식으로 여성을 통제했죠. 하지만 지금은 여성과 남성은 동등하니, 젠더 범주를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여성의 행동을 통제합니다. 즉, 현대사회는 더 이성 성차별이 없다는 식의 접근이죠. 그래서 성폭력, 젠더 권력 관계가 작동하는 폭력을 그냥 개인 간의 폭력으로 대한다는 거죠.

후자의 경우, 과거엔 여성이 섹슈얼리티를 표현하면 그것을 처단하는 식으로 여성을 통제했죠. 마녀란 이름으로 부르거나, 무성적인 존재로 여기며 여성의 성적 표현을 억압하여 여성을 통제했다는 거죠. 하지만 지금은 특정 행동을 폭력으로 명명하고 그것을 못 하게 하는 방식으로 여성성을 통제한달까요? 이를테면 작년 말, “루저의 난”으로 불렸던 키와 관련한 논쟁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그 여성을 법원에 고소할 정도로 엄청난 테러가 있었는데요. 특정 발언을 폭력으로 명명하고, 그것에 테러를 가해 여성성을 통제하는 거죠. 그러니 이젠, 성적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것이 폭력이냐 아니냐로 명명하는 방식이 바뀌었고, 전통적 젠더 역할에 위배될 때 그것을 폭력으로 명명하고 처단하는 식이죠. 여성이 미니스커트를 입은 것을 “내가 미니스커트 입은 모습에 불쾌함을 느꼈으니, 성희롱이고 (성)폭력이다”란 식으로 반응하는 것이 단적인 예가 되겠죠. 폭력이란 명명이 상당히 포괄적인 표현이듯, 여성의 행동을 폭력으로 명명할 때 젠더표현부터 섹슈얼리티 실천까지 거의 모든 행동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

이 논문의 결론은 다소 뻔합니다. 젠더가 인종이나 계급, 성적지향 등과 별개일 수 없으니 여러 범주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는 거죠. 하지만 논의 과정에서 충분한 사례와 분석을 제공하고 있어서 공허한 결론은 아닙니다. 어쨌거나 진부한 결론이긴 하지만, 논의를 차근차근 따라 읽노라면 꽤나 감동적입니다. 무엇보다, 누군가에겐 익숙하겠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막연하게 짐작만 하고 있던 부분을 잘 정리하고 있으니 유용하기도 하고요. 흐흐. 여성성 통제와 관련해서 참고문헌을 찾고 계시다면 읽으셔도 괜찮을 듯합니다. 치명적인 문제는 영어논문…ㅠ_ㅠ (그렇다고 제가 이 논문을 한국어로 옮길 의향은 없습니다. 그 시간이면 트랜스젠더 관련 논문을 옮길 수도 있으니까요. 흐흐. 그렇다고 트랜스젠더 관련 논문을 한국어로 옮기는 것도 아니지만요… 음하하;;; )

묻고 답하기: ‘있는 그대로의 나’?

가끔 이메일로 트랜스젠더와 관련해서 인터뷰를
요청 받거나, 간단한 질문을 받곤 합니다. 그때마다 답장을 보내곤 하는데요. 그러다보니 비슷한 내용을 반복하는 경우가
생기더라고요. 아울러 이메일을 보낸 분만 읽기엔 아쉽기도 하고요. 제가 쓴 내용이 좋아서가 아니라(!!) 글을 쓰는 동안 들인
품이 아깝달까요. 하하 ;; 그래서 앞으로는 관련 내용을 정리해서 이곳에 올릴까 합니다. 올리는 주기는 없습니다. 이메일이 오면
그때마다 정리해서 올릴 수도 있고 귀찮으면 한두 번으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



글 혹은 이 시리즈의 독자는 이제 처음 LGBT(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트랜스섹슈얼) 이슈나 퀴어 이슈에
관심을 가진 이들입니다. 그러니 내용은 최대한 단순하게 정리했습니다. 내용이 단순하니 문제가 되는 부분이 상당하지만 어쩌겠어요.
😛 이 시리즈(?)에 실릴 글의 상당 부분은 다른 단체에서 발간한 자료집에도 비슷한 내용이 많으니 꼭 함께 읽으시길 바랍니다.
🙂

기본 용어는 KSCRC사전을 참고하세요. 🙂 출판물로는 [젠더의 채널을 돌려라]에 실린 용어정리가 있고, 다른 여러 단체에서 발간한 다양한 자료집도 있습니다.

모든 관련 기록물은 한국퀴어아카이브 퀴어락(www.queerarchive.org)을 참고하세요. 🙂



질문: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고 꼭 수술을 해야 할까요?

답변:
다이어트를 하려는 사람에게, 성형수술을 하려는 사람에게, 혹은 자신감이 없는 사람에게 “있는 그대로의 네 자신을 인정해”란 식의 조언을 많이 하는 편입니다. 네. 가장 무난한(=맥빠지는) 조언이긴 합니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란 개념 자체를 다시 고민하는 것이 더 좋은 게 아닐까요?

트랜스젠더의 맥락에서, 주민등록번호 상으로 남자의 몸으로 태어난 사람이 자신을 여성으로 생각하고 단 한 번도 자신이 여자가 아니란 사실을 의심한 적이 없다고 가정할 때, 이 사람에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은 남들 보기에 남자인 몸일까요, 자신이 인식하는 여성이라는 젠더정체성일까요? 이것을 결정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있는 그대로의 나’라고 생각하는 ‘나’와 다른 이들이 생각하는 ‘있는 그대로의 너’는 다르기 마련입니다. 이 차이에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판단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을 누가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가도 논쟁거리고요.

비단 이런 경우만이 아닙니다. 한 쪽 손의 손가락이 여섯 개일 때, 의사 중에서 수술을 해서 손가락을 다섯 개로 만들지 않고 여섯 개를 그대로 두는 것에 동의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샴쌍둥이가 태어나면 거의 언제나 분리수술 기사가 함께 합니다. 많은 의사들은 아이가 간성으로 태어났을 때, 간성 아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항상 여성 아니면 남성 어느 하나의 젠더로 만드는 간성수술을 그 부모에게 권합니다(많은 경우, 간성의 의견은 무시되고요). 이런 맥락에서 ‘있는 그대로의 나’는 어쩌면 사회에서 가장 규범적인 형태에 맞춘 몸, 규범에 완벽하게 들어 맞지는 않아도 대충 그에 근접하는 형태의 몸일 가능성이 큽니다. 사회가 용인하는 수준의 몸을 갖추었을 때, ‘있는 그대로’라는 언설이 그나마 가능합니다. 아니, 사회에서 용인할 수 있는 ‘있는 그대로’의 수위와 기준이 있고, 그에 맞춘 몸일 때만 ‘있는 그대로’라는 말이 성립할 수 있습니다. 트랜스젠더의 맥락에서, 여성이면서 고환과 음경을 유지하는 몸, 남성이면서 질을 유지하는 몸을 ‘있는 그대로의 몸’으로 여기진 않는다는 거죠.

질문 자체에 대한 대답은 쉽지 않습니다. 다만, ‘있는 그대로’란 표현 자체를 다시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건 분명하게 말하고 싶습니다. 🙂

묻고 답하기: 트랜스젠더는 꼭 수술까지 해야 할까요?

가끔 이메일로 트랜스젠더와 관련해서 인터뷰를 요청 받거나, 간단한 질문을 받곤 합니다. 그때마다 답장을 보내곤 하는데요. 그러다보니 비슷한 내용을 반복하는 경우가 생기더라고요. 아울러 이메일을 보낸 분만 읽기엔 아쉽기도 하고요. 제가 쓴 내용이 좋아서가 아니라(!!) 글을 쓰는 동안 들인 품이 아깝달까요. 하하 ;; 그래서 앞으로는 관련 내용을 정리해서 이곳에 올릴까 합니다. 올리는 주기는 없습니다. 이메일이 오면 그때마다 정리해서 올릴 수도 있고 귀찮으면 한두 번으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

이 글 혹은 이 시리즈의 독자는 이제 처음 LGBT(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트랜스섹슈얼) 이슈나 퀴어 이슈에 관심을 가진 이들입니다. 그러니 내용은 최대한 단순하게 정리했습니다. 내용이 단순하니 문제가 되는 부분이 상당하지만 어쩌겠어요. 😛 이 시리즈(?)에 실릴 글의 상당 부분은 다른 단체에서 발간한 자료집에도 비슷한 내용이 많으니 꼭 함께 읽으시길 바랍니다. 🙂

기본 용어는 KSCRC사전을 참고하세요. 🙂 출판물로는 [젠더의 채널을 돌려라]에 실린 용어정리가 있고, 다른 여러 단체에서 발간한 다양한 자료집도 있습니다.

모든 관련 기록물은 한국퀴어아카이브 퀴어락(www.queerarchive.org)을 참고하세요. 🙂



질문:
내가 남자건 여자건 상관없이 남자를 좋아할 수도 있고 여자를 좋아할 수도 있는 건 상관없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굳이 성전환 수술까지 해야 하는 걸까요?


답변:
일단 트랜스젠더/비트랜스젠더라는 젠더정체성과 동성애/양성애/이성애라는 식으로 구분하는 성적지향/성정체성 개념을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이 둘을 구분하지 않을 경우, 트랜스젠더의 성전환 수술을 이성애자되기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아서요. 성적지향은 내가 누구를, 어떤 젠더를 좋아하는가를 핵심으로 해요. 이를테면, 나는 나를 여자로 인식하고 있는데, 내가 좋아하는 상대방이 여성이면 레즈비언/여성동성애자, 좋아하는 상대방이 남성이면 이성애자, 여성과 남성 어느 한쪽만 배타적으로 좋아하는 것이 아닌 경우엔 양성애자로 구분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이런 식의 간단한 구분이 문제가 없는 건 아니지만 여기선 그냥 넘어 갈게요. 하하. ;; )

반면 젠더정체성은 나 자신의 성별(젠더), 즉 흔히 말하는 여성이나 남성 중 어느 쪽으로 생각하는가와 관련 있는 거죠. (물론 젠더가 여성이나 남성만 있는 건 아니지만, 일단은 둘만 가정하고 설명하겠습니다.) 나를 여성 젠더로 인식한다면 나의 젠더정체성은 여성일테고, 남성 젠더로 인식한다면 남성이겠죠. 그래서 성적지향이 상대와 나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개념이라면, 젠더정체성은 나 자신의 성별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와 관련 있는 개념이라고 이해하면 쉬울 듯합니다.

성적지향과 젠더정체성의 관계는, 성적지향이 자신의 젠더정체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나의 성별, 상대방의 성별을 확정한 다음에야 통상적인 성적지향을 얘기할 수 있죠. 여성으로서 여성을 좋아한다는 말은, 즉 나의 젠더정체성이 여성이고 상대의 젠더정체성이 여성이라고 확정한 다음 우리 둘의 젠더정체성은 동일하다고 가정할 때, 동성이란 개념이 가능한거죠. 이렇듯 성적지향은 젠더정체성에 바탕을 두고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이랄까요.

거칠게 설명했는데, 대충 이렇게 이해하면 성적지향과 젠더정체성은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다소 다른 개념입니다. 즉 내가 남자 혹은 여자란 것과 내가 누구를 좋아하는 건 다른 이슈인 셈입니다. 성적지향과 젠더정체성을 구분한다면, 성전환 수술은 젠더정체성 이슈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트랜스젠더의 성전환 수술이 ‘이성애자 되기’는 아니란 거죠. 🙂 언젠가 기회가 되면(과연?) 정리하겠지만, 트랜스젠더의 성전환수술을 이성애자되기로 이해한다면, 레즈비언인 트랜스여성, 게이인 트랜스남성, 바이인 트랜스젠더를 설명하기 힘들고요.

(논의를 더 진행하면 이런 구분 자체도 문제가 되긴 하지만 여기선 생략할게요. 더 자세한 논의는 … 부끄럽지만 루인 “범주명명과 경계지대” [젠더의 채널을 돌려라]를 참고하세요. ;;; )


그 다음의 논쟁점은 흔히 얘기하기를 “나는 내가 남자건 여자건 상관없다”는 식의 표현입니다. 그럼요. 저 역시, 어떤 의미에서, 제가 어떤 젠더인지 크게 개의치 않아요. 하하. 🙂 문제의 핵심은 그럼에도 내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람들이 나를 구분하고 그 구분에 따라 행동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입니다. 이를테면 나는 남성이 아닌데, 사람들은 계속해서 나를 남성으로 구분하고 남자답게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식으로요. 아울러 남성처럼 생긴 사람이 자신을 여성으로 설명한다면 주변 사람들은 이상하게 바라볼 가능성이 크고, 남성처럼 생긴 사람이 여성일 거라고 여기고 여성으로 대하는 주변 사람들은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암튼 갈등의 많은 지점은 여기서 발생하기도 합니다. 물론 스스로 바라는 몸의 형태가 있긴 하지만 이런 형태는 한 사회의 지배규범과 크게 다르진 않겠죠. 인기 연예인의 몸이 규범적인 몸이 될 때, 많은 이들이 그 연예인을 닮고 싶어 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하듯. 혹은 실질적인 노력은 하지 않아도 그런 규범으로 인해 많은 스트레스를 받듯. 수술 자체의 논의는 좀 다르게 가져가야 할 부분이 있긴 하지만, 우선은 이 정도로 설명할까요? (슬쩍 얼버무리고 도망치는 분위기!!) 관련해서 유명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충 정리하겠습니다. 논쟁적이지만 음미할 만한 구절이거든요.


“많은 사람들이 내[트랜스젠더]가 젠더시스템을 위반한다고 말하는데 내가 젠더시스템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라 젠더이분법이 나를 위반합니다.”
-리키 앤 윌킨스(Riki Ann Wilchi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