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슬러와 맥켄나의 『젠더』: 1970년대 젠더 이론을 추적하기

Kessler, Suzanne J. and Wendy McKenna. Gender: An Ethnomethodological Approach. Chicago &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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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계획이라면 지난 달에 다 읽었어야 했다. 중간에 여러 일이 있었지만, 이런 이유는 모두 핑계다. 정말 열심히 읽었다면 열흘이나 늦을 리가 없으니, 그냥 게을러서 늦었다.

책 한 권을 읽고 세 편 정도의 관련 글을 쓴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책’은 아닐 테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서 하고 싶은 말이 생기고 쓰고 싶은 글이 생긴다면 ‘좋은 책’이지 않을까? 즉, 어떤 형태로건 독자의 몸을 움직이게 한다는 점에서 ‘좋은 책’인 건 분명하다. 다 읽었는데도 할 말이 없고 몸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시간 낭비에 가까우니까. 그렇다면 케슬러와 맥켄나의 책은 어떨까? 세 가지로 구분해서 얘기할 수 있을 거 같다.

페미니즘이건 트랜스젠더이론이건 퀴어이론이건 뭐건 간에, 내게 1970년대는 초기에 해당한다. 이론과 논의가 지금과 같은 형태로 번창했다기 보다는 싹이 트기 시작하는 시기랄까. 좀 더 구체적으로 쓰면, 1950년대 중반 ‘젠더역할’이란 용어를 의학에서 처음 사용하기 시작하며 ‘섹스역할’과 구분하기 시작했고, 1960년대 즈음 트랜스젠더 개인(Virginia Charles Prince)과 의학에서 섹스와 젠더를 구분하기 시작했다. 섹스와 젠더 구분을 1960~1970년대 페미니즘에서 적극 받아들였고, 젠더는 페미니즘 논의의 중심이 된다. (논의하는 사람에 따라 1930년대의 마가렛 미드를 섹스-젠더 구분의 시발점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나는 1970년대까지의 섹스-젠더 구분 논의는 상당히 단순했다고 이해했다. 앤 오클리(Ann Oakley) 식으로, 섹스는 용기처럼 변하지 않지만 젠더는 용기에 담는 내용물처럼 변할 수 있다는 정도랄까? 혹은 성전환수술의 토대를 닦은 존 머니(John Money)나 로버트 스톨러(Robert Stoller)처럼 섹스가 변할 순 있지만, 지정한 젠더를 강화하는 방식이어야 한다는 정도? 어느 쪽이건 상관없다. 1970년대까지는 섹스-젠더를 분명하게 구분할 뿐만 아니라 ‘여성’과 ’남성’이란 이분법을 당연하게 여기는 시기란 인상이 강했다. 이것이 1980년대로 넘어가면서 변한다는 게 내 앎의 전부였다. 그래서일까? 1979년에 처음 나온 케슬러와 맥켄나의 책을 읽는 내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들은 시종일관 이분법을 당연하게 가정하는 이론들을 꼼꼼하게 비판하며 이분법을 가정하지 않는 이론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이 책은 내가 알고 있던 1970년대 미국 젠더 논의의 지평을 넓혀줬다. 그래서 난 이 책을 읽는 내내 흥분했고, 마지막 결론을 기대했다.

한편, 이 책은 당시의 범주인 트랜스섹슈얼을 상당히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내가 이 책을 읽기로 결정한 이유기도 하다. 트랜스섹슈얼을 다루지 않는 젠더 이론이었다면 나중에 읽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젠더 이론을 다루는 동시에 트랜스섹슈얼의 경험도 다루고 있어 예정보다 일찍 읽었다. 다루는 정도도 한 챕터가 아니라 책 전반에 걸쳐 언급하고, 한 챕터에선 집중해서 분석한다. 그리고 트랜스섹슈얼을 다루는 장면에서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케슬러와 맥켄나는 두 영혼의 사람(버다치)은 젠더 이분법을 위반하거나 이분법에 부합하지 않지만 트랜스섹슈얼은 이분법을 강화한다고 비판한다. 성전환수술은 트랜스섹슈얼들이 이분법을 내면화하고 강화하는 실천의 하나란 것이 저자들의 주장 중 하나다. 이런 큰 주장때문에, 수술을 바라지 않고, 자신을 ‘여성’이나 ’남성’이 아니라 트랜스섹슈얼로 설명하는 이들의 경험은 잠깐 언급하고 넘어간다. 다른 부분에선 매우 영민한 저자들이 트랜스섹슈얼을 분석할 땐 왜 이렇게 막힌 걸까 싶어 안타까웠다. 이분법을 강화하느냐 하지 않느냐란 논쟁은 소모적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이분법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마지막 챕터를 읽기 전 나는 무척 기대했다. 제목도 “Toward a Theory of Gender”(젠더 이론을 향하여)로, 이분법의 한계에 갖히지 않는 새로운 젠더 이론을 제시할 거란 기대를 부풀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 기대는 금물. 간단하게 요약하면, 젠더를 ‘여성’과 ‘남성’으로 구분해서 접근하면 차이는 당연할 수밖에 없기에 이런 구분 자체를 질문하고 이분법을 몸에 익히는 과정 자체를 질문하는 이론을 만들어야 한다,  끝. ㅡ_ㅡ;; 1970년대 후반엔 상당히 새롭웠겠지만, 그리고 지금의 어떤 사람들에겐 이 정도의 논의만으로도 신선할 거 같다(젠더는 양성평등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상당하니까). 하지만 나 혹은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사람들에겐 무척 진부할 따름이다. 아니, 내용이 진부한 게 아니라 나의 기대가 너무 컸는지도 모른다. 난 케슬러와 맥켄나가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을 읽고 싶었지, 문제제기를 읽고 싶었던 게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논문 한 편으로 써도 충분할 주장을 도대체 왜 책 한 권 분량으로 쓴 거냐고!!”라고 구시렁거렸다. 흐흐.

이 책을 읽던 초기엔 이 책이 무척 흥미진진했다. 다 읽고 나니 어쩐지 허탈하다. ;;;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1970년대 젠더 논의를 이해하는데 상당히 중요한 책이란 점이다. 아울러 버틀러와 같은 이의 주장이 뜬금없이 등장한 것이 아니라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활발하게 진행한 이론적 논쟁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어 즐거웠다. 젠더 이론을 다루는 수업이라면 이 책을 읽어도 괜찮을 듯 하다.

『젠더』: 상대방의 젠더를 판단하는 여러 기준들

미국정신의학회(APA)의 1974년 회의에서 성전환증(transsexualism) 세션에 참가한 한 의사는 mtf 트랜스섹슈얼이 유난히 예쁘고, 일반적인[비트랜스] 미인이 자신에게 유발하는 느낌을 환기한다면, 그 mtf 트랜스섹슈얼의 여성다움을 더 잘 확신한다고 말했다. 다른 의사는 트랜스섹슈얼이 정말로 자신이 주장하는 젠더인지를 결정하는 기준으로 의사 자신에게 성적인 흥미를 일으키는지로 판단한다고 우리에게 말했다.
-Kessler, Suzanne J. and Wendy McKenna. Gender: An Ethnomethodological Approach. Chicago &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8. 118.
(번역은 대충 날림입니다. 이럴 때 사용하라고 만든 격언이 아니겠지만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세요.” *뻔뻔*)


한동안 분주했고, 별도의 읽을거리가 있어 『젠더』를 못 읽었다. 원래는 『젠더』를 6월까지 다 읽으려고 했는데 실패했다. 하지만 특별히 아쉬운 건 아니다. 어쨌든 어제부터 약간의 시간이 생겨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이 글을 시작하며 인용한 구절은 예전에 다른 곳에서 들은 적이 있다. 2006년 여름이었나. 여이연에서 트랜스젠더 강좌를 열었는데 담당 강사가 위의 일화를 소개했다. 무척 인상 깊어 어디선가 몇 번 언급했지만, 출처가 명확하지 않아 인용하길 관뒀다. 근데 『젠더』에 나오는 일화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어제 늦은 밤 지하철에서 이 구절을 읽고 꽤나 흥분했다. 흐흐.

이 책이 처음 나온 시기가 1978년이란 점, 그러니 1970년대 중후반에 이 책을 썼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당시엔 트랜스젠더를 진단할 공적 진료규범이 없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미국정신의학회에서 성전환증(transsexualism)을 성동일성장애(GID: gender identity disorder)란 항목으로 의료진단범주에 포함한 건 1980년이니 그전까진 설만 분분했다. 이런 시기에 몇 명의 의사들이 위와 같은 얘길 했다: 자신을 트랜스젠더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찾아왔을 때, 진짜 트랜스여성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자신에게 성적인 흥분을 일으키는지, 자신이 “환자”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끼는지로 판단한다고.

의사들이 다소 노골적으로 표현했을 뿐 유별난 기준은 아니다.

작년 ftm 관련 다큐를 여성영화제에서 상영한 후 감독 및 출연자와의 대화 시간을 가졌을 때, 몇 명의 관객들은 출연자를 보며 “쟤는 좀 남자 같네.”라고 속삭였다. 난 이 속삭임과 『젠더』에서 전하는 의사들의 발언에서 어떤 차이도 찾을 수 없다. 하리수를 “여자보다 더 여성스러운”이란 수식어로 설명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아가, 어떤 개인을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 구분하는 일상의 실천 역시 마찬가지다. 누군가를 “여성”으로, “남성”으로 판단하는 방식은 위에 인용한 의사들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매혹을 기준으로 삼았고, 어떤 사람은 머리카락 길이를 기준으로 삼고, 어떤 사람은 걷는 방식이나 목소리 톤을 기준으로 삼는다. 전화를 걸었을 때 목소리만 듣고선 상대를 “여자”로 판단한다면, ‘내’가 “여성의 목소리”라고 판단할 자극을 받았다는 의미기도 하다. 이것이 위의 의사들이 성적 매력, 유혹으로 판단하는 것과 얼마나 다를까.

이런 구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매우 드물고 나 역시 이런 구분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러니 이런 구분을 옳고 그름이나 잘잘못으로 구분하는 건 곤란하다. 이 말을 덧붙이는 건, 예전 어느 강의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몇 번인가 의사의 사례를 언급했는데, 그 당시 강의실은 술렁이며 의사를 비난하는 분위기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그건 의사의 성차별적인 태도를 향한 비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술렁임, 의사를 향한 비난/비판은 용인할 만한 행동과 용인할 수 없는 행동을 구분하고 있단 점에서 유쾌하지 않다.

유쾌하지 않음, 불쾌한 건 아니라도 유쾌한 건 아닌 감정은 순전히 나의 경험 때문이다. 내 몸은 언제나 나를 배신한다. 낯선 사람을 만날 때 많은 이들이 나를 “남성”으로 판단했다가 내가 트랜스젠더인 걸 ‘알면’ 태도가 미묘하게 바뀐다. 혹은 나의 이름은 알고 오프라인의 모습은 모르다가 오프라인에서 인사를 할 때, 내가 “그 루인”이라는 얘길 할 때면 종종 놀라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놀람은 지극히 당연하다. 사람들이 트랜스젠더를 소비하는 방식에서 내 몸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글로 드러나는 나와 오프라인에서 드러나는 나 사이에 상당한 간극이 있기 때문이다. 성질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놀람은 온라인이나 글로만 알던 사람을 오프라인에서 만났을 때도 빈번하잖아. 그저, 이런 놀람과 의사의 발언을 구분하고 놀람은 괜찮지만 의사의 발언은 나쁘다는 식으로 반응하는 태도가 유쾌하지 않았다.

어제 지하철에서 『젠더』를 읽다가 이런 저런 고민이 떠올랐다. 요즘 다시 두드러진 고민 중 하나가, 20~30년 뒤의 내 모습이라 좀 심란하기도 했고.

두 영혼의 사람들(버다치), 젠더를 이해하는 다른 방식

딸만 여럿이고 아들이 없는 가족을 상상하자. 그 가족이 사는 사회에서 여자는 사냥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버지는 사냥을 도울 아들이 필요하다. 마침내, 아이가 새로 태어났지만 딸이었다. 부모는 사냥꾼이 필요했기에, 그 아이를 아들로 키우기로 결정했다. 그 아이가 5살이 되었을 때 부모는 그 아이가 임신을 할 수 없도록 조치했다. 그 아이는 소년으로 옷을 입었고, 남자들의 기술을 배웠고, 실제로 매우 튼튼하게 자랐고, 훌륭한 사냥꾼이 되었다.
아들이 있는 또 다른 가족을 상상하자. 그 아이는 여자들의 일에 관심을 보였고, 남자들의 일은 피했다. 그래서 부모는 그를 시험하기로 했다. 그들은 작은 울타리에 아들을 데려갔고, 활과 화살, 그리고 바느질 도구가 든 바구니를 넣어줬다. 부모든 울타리에 불을 질렀고, 아들이 무엇을 챙겨 탈출하는지 지켜봤다. 그 아이는 바느질 도구를 챙겼고, 그때부터 그 아이는 딸이 되었다.
-Kessler and McKenna. “Cross-Cultural Perspectives on Gender.” Gender: An Ethnomethodological Approach. Chicago and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8. 21.


위의 문장은 케슬러와 맥켄나(맥케나/맥키나?)가 함께 쓴 책의 일부다. (정확한 번역은 아니고 대충 얼버무린 번역. -_-;;) 미국 인디언 원주민들 중엔 버다치(berdache)로 불렸던, 지금은 두 영혼의 사람들(two-spirit people)로 불리는 또 다른 젠더가 존재했다고 한다. 위에 날림으로 번역한 내용은 두 영혼의 사람들의 일화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인디언 문화를 조사한 인류학자들이 남긴 기록의 일부다.

1978년에 이 책을 쓴 케슬러와 맥켄나의 주장에 따르면, 현존하는 인류학지 중에서 두 영혼의 사람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를 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한다(사실상 없다고 한다). 대부분이 옆 부족에 두 영혼의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라는 식의 얘기를 전하고 있단다. 암튼 그렇게 기록에 남은 두 영혼의 사람들과 관련한 위의 일화는 젠더를 다르게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물론 위의 두 사례는, “어쨌든 결국 남자 아니면 여자로 구분하고 있는 것 아니냐”란 반응을 끌어내기 쉽다. 현재 남아있는 기록을 중심으로 이해했을 때, 현대의 통상적인 젠더 개념으로 이해했을 때, 이렇게 이해할 여지는 상당하다. 그럼에도 이 두 사례가 말하는 젠더 개념은 현대 한국사회에서 접하는 것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우선, 위의 두 사례는 모두 젠더를 소위 “생물학적 본질로 불리는 몸”에 고착된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여기서 젠더는 개인이 어떤 역할을 선호하느냐에 초점을 맞춘다. 비록 태어날 땐 생물학 혹은 몸의 외부 형태로 젠더를 결정한다고 해도, 그것이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변화에 유연해서 여성과 남성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인식은, 개인을 둘 중 하나로 설명한다 해도 이분법이라고 단언할 수 없게 한다. 이 유연함은 개인의 젠더를 둘 중 하나로 인식하지 않거나, 인식할 필요가 없다는 걸 이해하고 있기에 가능한 듯하다. 혹은 그것이 그렇게까지 중요한 이슈는 아니라고 여겼거나.

물론 이 두 사례로 인디언 부족들 각각의 젠더 개념을 유추하는 건 불가능하다. 만약 인디언 부족의 젠더 개념을 이분법의 틀로 이해한다면, 그런 이해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것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이해다.

그런데 …. 사실 첫 번째 사례를 읽으며, 뭔가 운이 좋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만약 새로 태어난 아이가 사냥꾼이 되기 싫었다면 꽤나 괴로웠을 테니까. 부모는 사냥꾼이 되길 강요하는데, 아이는 바느질을 하고 싶어 했다면 부모들은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두 번째 사례에서, 딸이고 싶지만 활과 화살을 좋아한다면 얘기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우선 그 아이는, 아마 매우 똑똑했을 테니, 시험에선 선택하기 어려웠을 거 같다. 바느질 도구를 선택하면 딸로는 살 수 있지만 활과 화살을 사용할 수 없을 테고, 활과 화살을 선택하면 사냥은 할 수 있겠지만 딸로는 살 수 없을 테고. 어쩌면 그냥 빈손으로 탈출했을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 인디언 부족은 어떻게 대처했을까? 특정 문화적 기호와 젠더가 일치하지 않는 상황에서, 나는 분명 현대 사회의 대처 방법과는 달랐을 거라고 짐작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처했을까? 아쉽지만 이 역시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