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 일상적인 정체성 검열, 승인, 규제 장치로서의 공간

어제 모 대학에서 진행한 행사의 일환으로 특강을 갔다 왔어요. 행사 제목은 “1인 화장실을 꿈꾸는 문화제, <너는 어디로 가니?>“ 제목을 보면 아는 분은 아시겠죠? 흐흐.

어떻게 보면 급하게 만든 강연록입니다. 전체적인 흐름을 잡고 읽으면서 설명 하기 위해 만든 거라, 정확한 문장이나 문단은 없어요. 때로 맥락이 빠진 부분도 좀 있고. 그냥 재미 삼아 참고로 읽으면 재밌을 거예요. 흐.

[#M_ 길어서 접음.. |좀 많이 길어요;;.. |

화장실: 일상적인 정체성 검열, 승인, 규제 장치로서의 공간
-루인(runtoruin@gmail.com)

1. 화장실을 고민하다
-2007 인권활동가대회에서, 참가를 준비하기 전에 이미 화장실과 관련한 조율을 했고 각 방마다 화장실이 있어 문제가 없었음. 하지만 행사 장소에 가서 방을 배정하기 전에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이 시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 없었어. 그리하여 화장실 문제를 공식 이슈로 제기했고, 이것이 사람들에게 꽤나 강한 인상을 준 듯. 이때 임시방편으로 층에 따른 사용을 구분했는데(2층은 구분해서, 3층은 구분 없는 것으로), 하지만 결국 사용하지 못 함. 기호의 문제. 그리고 기호의 무게.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장애운동단체와 화장실이 공동의 이슈로 가능하겠다는 공감대를 형성함. 성별이분법으로 나뉜 비장애인 화장실의 문제와 무성적 존재로 성별 구분 없이 장애인 화장실만 있는 문제의 접점을 모색하며 나온 아이디어가 일인화장실 혹은 개별화장실

-mtf와 ftm의 경우, 수술이나 호르몬 투여 여부에 따라 그리고 화장실의 조건에 따라 사용 가능한 공간이 전혀 다름. 아울러 신체를 변형했는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화장실과 같은 “여성”/“남성” 구분이 분명한 공간은 불편한 동시에 곤란한 공간. 이런 고민은 트랜스젠더 만의 고민은 아니며, 부치를 비롯해서 외형이 기존의 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이들, 그리고 기존의 규범적인 외모에 어느 정도 부합하거나 트랜스젠더가 아니어도 이런 구분이 불편한 이들은 상당함. 일테면 양심적 병역거부를 하며 화장실의 성별이분법을 문제제기한 분도 있어. 화장실의 성별구분과 군대의 성별에 따른 차별/구별의 접점을 지적.

-2008 인권활동가대회에선, 각 방에 있는 화장실 말고 복도에 있는 화장실의 경우, 개별화장실로 사용함. 좌변기만 사용하기로 하고 소변기 칸은 사용하지 않기로 합의. 이에 문제제기가 두 가지 있었는데, 어떤 장애인의 경우 좌변기보다 소변기 사용이 더 편하다는 점, 혼자선 화장실을 사용할 수 없음에도 개별화장실 혹은 일인화장실이라 활동보조원과 같이 들어가기가 부담스럽다는 것. 이것 외엔 대체로 긍정적인 반응.

-이런 반응의 결과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5월 초에 있었던 인권활동가들을 위한 인권교육워크숍에서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운영함. 활가대회에선 입구가 하나고 하나의 입구에서 “여/남”으로 갈라지는 방식이었다면, 교육워크숍에선 서로 떨어진 곳에 있었음. 그리고 관찰한 결과, 내부 구조가 달랐음에도 개의치 않고 사용하는 사람들과 여전히 익숙한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으로 나뉨. 이는 여전히 몸에 익숙한 공간을 찾는 기호와 상징의 무게가 작동한 효과일까, 반드시 그렇진 않아도 여전히 어떤 금기가 작동하는 걸까?

-모든 공간이 성별이분화 되어 있음에도 그럼 왜 굳이 화장실을 가장 많이 얘기하는 걸까? 단지 하루에도 몇 번씩 사용하기 때문에? 공공장소로서 사용할 때마다 비용을 지불하는 공간이 아니어서? 하지만 화장실을 구성하고 설계하는 과정 자체가 이미 비용이 지불되는 것. 기존의 화장실과 다른 방식의 화장실을 구성하고, 장애인 화장실을 만들거나, 장애여성과 장애남성 화장실을 만드는 것이 힘든 건 항상 경제문제인데 이것 자체가 비용을 지불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어. 동시에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다른 화장실이란 상상력은 어떻게 가능할까?

2. 화장실의 역사와 현재: 일상의 규제장치
-아파치족 인디언이나 중세 아일랜드인의 경우, 남성은 쪼그리고 앉아서 여성은 서서 소변을 봄. 이는 19세기 후반에 이를 때까지 빈이나 파리 할 것 없이 유럽의 어느 거리에서나 흔히 볼 수 있었다 함. 19세기 즈음에도 여성의 노상방뇨가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는 건, 근대기획을 통해 여성의 몸이 숨겨져야 할 것, 성적인 대상으로 변했다는 걸 의미. (cf. 인도의 화장실 문화, 영화 [Q2P])

-대변 역시 서서 보는 관습과 쪼그리고 앉아서 보는 관습이 일률적이지 않으니, 양변기 사용은 일종의 문화적인 규율. 좌변기가 만들어졌을 당시(19세기 즈음), 사람들은 좌변기 사용이 익숙하지 않았음. 그 당시 대변을 서서 하는 경우도 있고, 쪼그리고 앉아서 하는 경우도 있었음. 좌변기의 경우, 의자에 걸터앉아 사용하는데, 이런 습관이 낯선 경우가 많았음. 그래서 좌변기에 올라가서 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앉아서 일을 보는지 감시하기 위해, 화장실 위와 아래를 뚫어 둠. 아래를 뚫은 건, 다리가 바닥에 있는지를 확인 하는 것이며, 위를 뚫은 건 머리가 보이지 않은 걸 확인 하는 것. 지금의 화장실 역시 아래와 위가 뚫려 있는데, 이것이 단순히 환기나 다른 이유가 아니라 규제와 감시의 역사적인 맥락이 공존하는 것으로 해석 가능.

-노상방뇨가 불법이 되고, 공중화장실이 사라지기 시작한 건, 위생과 청결의 근대성과 노상방뇨를 금기시 하는 분위기 조성이 한 몫 함. 사람들이 보는 대로에서 소변과 대변 행위를 하는 것이 수치심과 당혹감을 유발하는 것이란 인식이 퍼지면서 “볼 일”은 화장실에 들어가서 봐야 하는 것으로 바뀜. 화장실에선 인사를 하지 않는 것이 예의라는 인식 역시 화장실 사용을 일종의 수치심 혹은 부끄러움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걸 의미함.

-화장실의 위생개념, 더러움과 불결함에의 혐오는 근대 이후 발생한 개념. 당연히 이런 관념은 근대과학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함. 그리하여 일상생활을 과학의 이름으로 규제하기 시작(일테면 일제시대 가사노동의 과학화/합리화란 광고가 등장하고 실제 가사노동의 과학과 능률이 당시의 지배적인 인식으로 일상생활을 규제함). 아울러 근대 (성)과학의 발달은 비이성애자, 트랜스젠더들, 장애인들 등을 불결함, 더러운 것으로 간주하고 병리적인 현상으로 설명하기 시작. 이전까지 주변에서 만나던 사람들이 정신병으로, 고쳐야 할 대상으로 바뀌고, 혐오와 불결의 대상으로 바뀜. 이런 맥락에서 소위 말하는 “정상적인” “여성”/”남성”에 부합하지 않는 존재들은 불결하고 오염된 존재. 가까이 하면 오염될 수도 있다는 언설이 가능해짐. 이는 최근에도 여전한데, 학교 수업에서 “동성애”를 가르치면 학생들 가치관에 혼란을 줄 수 있다는 식의 언설이 설득력을 얻고, 이반이면 학생들과 격리하거나 왕따를 시키는 것과 궤를 같이 함. (최근 한 고등학교 동아리에서 동성애와 관련한 특강을 하려고 했을 때 불허한 사건이 있음.)

-이런 과정에서 비규범적인 이들은 “사회”에서 사라지기 시작함. 물론 이들은 언제 어디에나 살아가고 있지만, 소위 말하는 “공적 공간”에서 이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낯선 이들이 됨. 아울러 자신을 규범적인 존재로 여기는 이들은, 동성애자, 양성애자 혹은 트랜스젠더, 간성, 장애인의 존재를 모르거나 부인해야 하는(정말 모르는지, 모른다고 부인하는 건지, 모른다고 부인해야 하는 것조차 망각하는 수위의 부인인지는 모호함) 존재로 여김. 그리하여 LGBTQI/장애인들은 매체나 모니터 너머에서만 접할 수 있는 존재로 여겨짐. 즉, 이들은 근대적인 공간에서 배제됨. 이는 근대적인 공간과 제도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통해 알 수 있음. 간단하겐 화장실, 기숙사, 목욕탕 등의 공간이 비장애 “여성”과 “남성”들만 출입 가능한 곳으로 이루어진 것.

-그렇다면 자본주의 혹은 근대 사회는 사회인을 누구로 규정하고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어. 비트랜스젠더, 비장애인, 그리고 때로 “남성”들만이 존재하는 구조. 회사가 빈번한 동네에 “여성”사우나가 없는 곳이 많고, 국회의사당에 “여성”사우나나 화장실이 없었던 적이 있었음. 장애인이 국회의원으로 당선 되고서야 장애인 출입이 가능하도록 보수했다는 말은, “사회생활을 한다”란 말의 주어가 누구인지를 알려 줌. 결국 근대 공간, 근대에서 얘기하는 개인/사회인은 배제와 은폐를 통해 이루어지며, 규범적인 존재들만이 “사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함.

-이는 또한 개인의 정체성을 통제하는 가장 기본적인 토대가 무엇인지를 알려 줌. 즉 근대 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상이 누구인지, 어떤 몸을 지닌 인간을 요구하는지를 안다는 건, 개인을 어떤 식을 통제하고 규제하는지를 알 수 있음. 기존의 규범적인 형태의 몸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공간을 구성하고 배치함으로써, 트랜스젠더들, 간성들, 장애인들이 생활을 곤란하게 하거나 불가능하게 한다는 건, 개인을 통제하는 주요 정체성(정체성과 통제는 사실 상 동의어)에 젠더와 장애여부가 있다는 것을 의미. 농담처럼 한국에서 사회생활을 하며 낯선 누군가를 만날 때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이 성별과 나이란 것처럼, 성별은 소통의 첫 번째 잣대이며, 여기에 장애여부가 없다는 건 애당초 장애인은 만날 수 없는 어딘가에만 존재한다는 걸 의미하며, 마찬가지로 피부색, 출신지역, 언어, 성적지향 등을 얘기하지 않는다는 건, 이는 고려사항에도 없다는 걸 의미.

-그리하여 현재 한국에서 살아가며 경험하는 공간은, 성별과 장애를 통해 개인을 통제함. 특히나 화장실이 개인을 통제하고 규제하는 곳으로 작동한다는 건 출입 가능성의 여부에 따른 문제에서 발생. 앞서 얘기했듯, 소변기만 있는 남자화장실의 경우, 호르몬 투여를 통해 남성으로 통하는 ftm들은 사용이 불가능하고 동시에 여성화장실 사용도 불가능. 남성으로 좀 더 통하는 mtf의 경우 역시, 화장실 입구에서 어느 곳으로 가야 할지 혹은 갈 수 있는 지로 고민. 이런 고민은 장애/비장애 구분으로도 발생하는데, 경증장애인이라 비장애인 화장실 사용이 가능한데 장애/비장애로 구분하고 있다면 어떤 화장실을 사용해야 할까? 즉, 화장실은 “너는 누구냐”, “너의 정체성은 어떻게 되느냐”를 물어보며, “네가 이 화장실 공간을 사용하는데 적합한 인간인지 네 스스로 한 번 확인하라.”고 말함. 화장실 앞에 서는 순간, 나 자신이 규범적인 요구에 부합하는지의 여부를 질문해야 한다는 점에서, 검열과 승인이 동시에 일어나며, 사용하고 싶어도 사용할 수 없거나 갈등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규제 장치.

-결국 화장실 앞에 붙어서 개인을 규제하는 기호 혹은 상징의 무게가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의미. 이런 금기를 위반하기 힘들고 이런 위반을 상상해본다란 말 자체가, 이미 실현의 어려움과 상징과 기호의 무게를 알려줌. 다른 상징과 기호가 그러하듯, 화장실의 상징과 기호 역시 개인을 규제함. 이럴 때, 지금 내가 남자화장실을 사용하건 여자화장실을 사용하건 모두 퀴어한 상황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지만, 실제 이 공간들을 사용해야 하는 나는 곤혹스러움. 각각의 기호가 가진 무게와 ‘위반’은 짜릿한 쾌락인 동시에 곤란하고 언제나 갈등을 요구함.

-일테면 치마와 바지로 구분한다면, 치마를 입고 있는 사람과 바지를 입고 있는 사람이 사용하는 곳으로 해석할 수도 있어. 하지만 “여성”이 바지를 입고 있다고 해서, 바지 입은 사람으로 해석 가능한 표지의 화장실을 사용하지는 않음. 때로 빨강과 파랑으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그럼 두 가지 색깔 중, 빨강을 좋아하는 사람은 빨강으로 표시한 화장실에, 파랑을 좋아하는 사람은 파랑을 표시한 화장실에 가면 되지만 그렇지도 않아. 즉, 이런 기호는 여성의 옷과 남성의 옷, 여성을 상징하는 색과 남성을 상징하는 색이 무엇인지, 그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있다는 걸 의미. 동시에 여성과 남성 각자에게 요구하는 복장과 취향, 혹은 여러 행동 방식이 있다는 걸 의미하며, 이를 규제하고 있다는 걸 의미.

-화장실문화와 관련한 책(저자는 한국인, 발행연도는 2000년대)에서 저자는 화장실의 성별을 구분하는 기호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처음엔 치마와 바지 표시가 헷갈려서 잘못 들어가곤 했다는 에피소드를 적었음. 지금에야 이런 표시가 헷갈린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지만, 과거엔 성별구분이 없는 화장실이 대부분이었음. 또한 1960~1970년대에 걸쳐 새마을운동으로 마을을 “개량”하기 전까진 대부분의 화장실이 “푸세식”이었고, 성별표시가 없었기에, 바지와 치마 구분에 따른 화장실 성별구분이 헷갈림이 당연한 것일 수 있음. 즉, 지금 화장실을 구분하는 표시가 당연한 문화가 아니라, 근대기획 속에서 익숙해진 것임을 의미.

3. 일인 혹은 개별 화장실을 상상하다
-술집 등에서 쉽게 접하는 공용화장실의 경우, 얼핏 보기에 따라 두 가지 대립하는 이슈를 제기함. 우선 많은 “여성”들이 술집과 같은 공간에 있는 화장실 사용을 꺼림. 이런 공간이 성폭력 등의 가능성이 상당하고, 구조 자체가 상당히 위협적이기 때문. 다른 한편, 트랜스젠더들의 경우 이런 공용화장실이 편하다고 말하는데, 이는 입구에서 어느 곳으로 가야할지 갈등할 필요가 적기 때문. 그렇다고 이 말이, 공용화장실이 그 자체로 편하다거나 좋다는 의미는 아님. 그럼에도 이런 이해는, 서로 상반되는 것으로 읽히기도 함.

-실제 일본의 경우, 트랜스젠더 운동의 한 방식으로 개별/일인화장실을 법제화 하는 운동이 있었는데, 개별화장실의 경우 몰카를 설치할 수 있다는 이유로 법제화가 실패함. 그렇다면 과연 여성주의운동과 트랜스젠더운동에서 제기하는 화장실 공간은 상충하며, 성별을 구분한 장애인화장실을 요구하는 장애여성운동과 트랜스젠더운동은 서로 상충하는가.

-이런 식의 대립은, 기존의 구조에 문제제기하지 않는 방식으로 가기 쉽다는 점에서 문제. 쟁점은 이들 집단의 이익의 상충이 아니라 이들 집단의 이익이 상충하는 것으로 만드는 구조에 문제제기 하는 것. 동시에 이렇게 구분하면 성폭력에서 안전할 것이란 믿음 역시 문제인 것. 분리와 구분이 폭력에서 벗어나는 일시적인 장치일 수는 있어도 궁극적인 대안일 수는 없어.

-미국 캘리포니아(?)의 경우, “여성”/“남성”이란 구분에 따른 화장실뿐만 아니라 개별화장실을 갖추고 있는 곳이 꽤나 있다고 함.

-성별/장애를 구분하고 있는 현재의 화장실은, 다른 한편, 행위와 정체성을 일치시키고 있는 방식. 일테면 비장애-비트랜스-여성이면 이러이러하게 행동하고 저러저러한 외모이다, mtf면 이런 외모에 과잉 여성성을 재현할 것이다와 같은 선입견이 개인을 해석하는 토대로 작동하고 있음. 이는 역으로, 비장애-남자화장실을 사용하는 사람은 비장애-남성, 장애인화장실을 사용하는 사람은 장애인(이럴 때 성별은 무시됨)이라고 가정함. 내가 누구인가와 내가 어떤 행동을 하고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별개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일치시킴. 게이는 여성스러운 행동을 할 것이다, 부치는 남성적이고 때로 마초일 것이다와 같은 말은, 정체성과 행위를 동일시하는 것.

-행위와 정체성을 일치시키는 건, 곧 “여성성”과 “남성성”이란 것, 성별을 규제하는 방식이기도 함. “여자다움”, “여자가 칠칠맞지 못 하게”와 같은 언설은 여성이란 성별정체성과 여성의 행위를 일치 시키는 것. 내가 여성이란 것과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는 건 별개이지만, 이 둘을 일치시킴으로서 개인의 행동과 정체성을 규제함. 그리고 일치할 것을 요구하는 규범에 부합하지 않을 때 상당한 비난과 폭력을 행사함. 이런 비난과 폭력을 당연시 하는 분위기가 있음은 말할 것도 없고.

-개별화장실이란 공간을 상상하는 것은, 행위와 정체성을 일치시키려는 기획에 문제제기하는 것이기도 함. 물론 일상을 살아가는 개인의 불편을 어느 정도 해소하는 방식이기도 함.

4. 그럼 어떻게 상상할 것인가
-하지만 “사먹기 싫으면 안 사먹으면 된다.”, “잘 키워서 1억짜리 소를 만들면 된다.”라고 말하는 신자유주의사회, 자본주의사회에서 개별화장실은 어떻게 실현 가능할까. 사실 이 질문에 다소 무력함. 개별화장실의 경우, 한 명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넓어짐. 비장애-여성/남성화장실, 장애인화장실로 구분하고 있는 현재의 방식에서, 2분 동안 10명이 사용할 수 있다고 치자. 내가 다니는 학교의 경우, 장애인화장실은 한 층에 한 칸 뿐인데, 개별화장실은 장애인화장실 정도의 공간을 요구함. 이럴 때 지금의 방식의 대안으로 개별화장실을 얘기한다면, 장애인화장실 규모의 화장실이 10개 정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걸 의미. 학교의 경우, 화장실 공간을 확장하지 않으면 쉬는 시간 10~15분 동안 화장실을 사용할 수 없는 이들이 많을 것(그렇다면 쉬는 시간을 1시간 정도로 늘여야 할까?). 이는 곧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논리에 부딪힘. 그렇잖아도 공간이 부족하다는 말이 많은 상황에서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우선, 효율의 의미를 재구성하기 전엔 개별화장실의 실현은 상당히 어려운 부분이 있음. 혹은 한 층에, 비장애-여성/남성, 장애-여성/남성, 개별화장실, 이렇게 5가지를 기본으로 갖추도록 요구할 수도 있긴 함.

-비단 화장실만의 문제는 아님. 기숙사, 목욕탕, 증명서나 기록부에서의 성별표시란, 만나는 개인을 구분하는 방법(언어)들, 등등 성별을 둘로 구분하고 있는 현행 제도 자체에 문제제기가 들어갈 때만 개별화장실의 의미가 살아날 듯._M#]

커밍아웃, 아웃팅

책에 들어갈 용어설명으로 쓴 초안. 이 초안을 토대로 얼마간 수정해서 인터뷰 자료집에 들어갈 예정. 그냥 이런 의견도 있다고 읽으면 되욤. 흐 ;; 마무리가 많이 허접하다.

Ⅳ. 커밍아웃coming out과 아웃팅outing

LGBT(레즈비언lesbian, 게이gay, 바이bisexual, 트랜스젠더transgender)의 맥락에서 커밍아웃과 아웃팅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커밍아웃은 성적지향/성정체성이나 성별정체성을 스스로의 의지로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고, 아웃팅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타인에게 알려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식의 설명은 커밍아웃과 아웃팅의 기본적인 의미를 담고 있긴 하지만, 충분한 건 아니다.

커밍아웃의 경우,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성적지향이나 성별정체성을 얘기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대상이 반드시 ‘다른 사람’일 필요는 없다. 현재의 한국사회는, 모든 사람은 주민등록번호상의 성별과 갈등 없이 자라고, 당연히 이성애자일 것이라는 가정을 자연스럽게 여긴다. 그리하여 자신이 주변에서 기대하는 성별이 아니라고 느끼거나, 이성애자가 아니라고 느낄 때, 당혹과 긴장을 느끼며 자신에게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고민을 하곤 한다. 이런 긴장과 갈등의 과정에서 규범적인 요구에 부합하지 않는 자신을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커밍아웃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 (반드시 긴장과 갈등을 경험하는 건 아니며, 자연스럽게 자신의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이들도 많다.) 즉, 커밍아웃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러고 나서야 주변 사람들에게 얘기할지의 여부를 고민하고 결정한다. 이때, 자신에게 커밍아웃을 했다고 해서, 더 이상 긴장과 갈등을 경험하지 않는 건 아니다. TV 등 언론매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얘기하며 이와 관련한 인권활동을 하는 이들이라고 해서 긴장과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건 아니란 점에서, 자신에게 하는 커밍아웃은 평생에 걸친 작업이다.

다른 사람에게 커밍아웃을 하기로 결정했을 때라고 해서, 누구에게나 커밍아웃을 하는 건 당연히 아니다. 다른 사람에겐 말해도 가족들에게만은 말하지 않는 이들, 친한 사람들에게만 얘기하는 이들, 오프라인 자리에선 얘기하지만 언론매체엔 나가지 않는 이들처럼, 누구에게 어떤 식으로 커밍아웃을 할 것인가는 개인마다 다르다.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숨기는 것이거나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데, 이는 내가 상대방과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판단에 따른다. 전적으로 신뢰하고 평생 친구로 여기지만 커밍아웃으로 헤어질 것을 염려하여(실제 이런 경험들이 있다) 커밍아웃을 하지 않을 수도 있고, 성별정체성이나 성적지향을 밝히는 것의 여부가 관계를 지속하는데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해서 하지 않을 수도 있다(이를 알아야만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주변 사람들에게 커밍아웃을 하기 시작했다고 해서, 이것이 한 번에 끝나는 작업은 아니다. “저 트랜스젠더예요.”라고 얘기할 때, 상대방은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를 수도 있고, 이 말에 화가 나거나 당황할 수도 있고, 그러려니 하며 별다른 반응이 없을 수도 있다. 화를 내거나 더 이상 소통하길 거부하는 경우라고 해서, 이를 혐오로만 단정할 수는 없다. 자기 자신에게 커밍아웃하기까지의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상대방 역시 이런 커밍아웃을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그냥 그러려니 하는 반응 역시 마찬가지다. 일테면 “난 레즈비언이야.”라고 커밍아웃을 했고, 상대방은 별다른 반응이 없어서, 알아들었나보다 했는데, 다음에 만났을 때 “남자친구 안 사겨?”라고 묻는 경우가 있다. 그렇기에 커밍아웃은 단순히 일회성으로 끝나는 경험이 아니라 장시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커밍아웃을 통해 한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계속해서 얘기해야 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피곤한 작업이긴 하지만, 한 번에 끝날 수 있는 일이 아님은 당연하다(이는 상대방이 LGBT이건 아니건 상관없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커밍아웃을 한다는 건, 일회성 통보가 아니라 ‘난 당신과 나의 어떤 정체성과 관련해서 얘기를 나누고 싶다.’, ‘당신은 나의 어떤 정체성을 고민하며 나와 얘기했으면 좋겠다.’는 의미이자, 나의 어떤 정체성과 관련해서 소통하겠다/하고 싶다는 신호이다.

트랜스젠더와 비이성애자가 ‘낯선 존재’로 여겨지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정말 낯선 건지, 낯선 것처럼 행동하는 건지, 낯설게 행동해야 한다는 인식조차 잊어버린 낯설음인지는 모호하지만), “나는 mtf다.”라고 말하는 건 간단하지 않다. 이 말을 들은 상대방의 경우, 지금까지 나를 “남성”으로 대했다면 이제부턴 “여성”으로 대해야 하는 건지, 아님 “트랜스젠더”로 대해야 하는 건지, 마치 태어났을 때부터 여성으로 자란 사람처럼 대해야 하는지, “남성”으로 살아야 했던 시기가 있을 텐데 이 시기의 경험을 물어봐도 되는지 등등, 상당히 많은 것들이 어려울 수 있다. 현재사회에서 “낯설다”는 건 “잘 모른다”는 의미란 점에서 “난 mtf야.”라고 커밍아웃하는 건, 상대방에게 낯설음과 당혹스러움만을 줄 수도 있다. 아울러 “나는 레즈비언이야.”, “나는 mtf야.”와 같은 말이 나의 무엇을 알려주며, 내가 레즈비언 트랜스임을 알았다면 나의 무엇을 알았다는 것인지를 질문할 필요가 있다. 내가 레즈비언이라면, 내가 mtf라면, 이런 말이 현재 사회에서 레즈비언이나 mtf에게 덧씌운 이미지로 나를 대하도록 하는 효과는 낳을 수 있어도, 이 말 자체가 나와 관련해서 알려주는 건 극히 적다. 그러니 커밍아웃은,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가 이전까지 맺어온 관계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이전까지 맺어온 관계부터 앞으로 맺어갈 관계를 새롭게 구성하는 과정이다.

아웃팅의 경우,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성정체성이나 성별정체성이 드러나는 것이 문제인 건, 이와 관련한 혐오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실제 동성애자이거나 양성애자임이 드러나서, 트랜스젠더임이 알려져서 회사에서 해고되거나 취업이 안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혹은 아웃팅을 협박하며 돈을 갈취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래서 일부에선 아웃팅은 범죄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아웃팅이 생활공간에서부터 생존기반까지 위협할 수 있는 효과를 낳는다는 점에서 “아웃팅은 범죄”라는 주장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아웃팅의 위험만을 강조할 경우, 역설적으로 커밍아웃을 막을 뿐만 아니라 커밍아웃 자체를 위험한 것으로 만드는 효과를 낳기도 한다. 그러니 커밍아웃을 고민한다면, 커밍아웃의 긍정적인 효과(자기 긍정, 주변의 지지 등등)와 아웃팅의 문제를 동시에 고려하며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수위에서 적절하게 할 필요가 있다.

다른 한 편, 커밍아웃이 무엇을 드러내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는 커밍아웃과는 별개의 문제일 수도 있는데, “나는 레즈비언 트랜스야.”, “나는 게이야.”, “나는 바이야.”, “나는 (이성애자) 트랜스젠더야.”란 식의 말하기 과정은, LGBT인 상황의 사람들만 커밍아웃하고 이성애자-비트랜스젠더인 사람들은 커밍아웃하지 않아도 되는 것만 같은 효과를 낳기도 한다. 아울러 LGBT인 상황을 마치 ‘커밍아웃 해야 할 무언가’로 만들 수도 있다. “나는 레즈비언이야.”, “나는 mtf야.”란 식으로 커밍아웃을 할 수는 있지만, 이것을 ‘해야만 하는 무언가’로 이해할 경우, 정작 문제제기하고 고민해야 하는 성별이분법과 이성애주의는 당연한 토대로 둘 수 있다. 그러니 커밍아웃은 기존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과정인 동시에, 이 사회에서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전제에 문제제기하는 과정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간성, intersex, hermaphrodite

어떤 책에 들어갈 용어설명으로 쓴 글. 그 책엔 이걸 어느 정도 요약해서 사용할 예정. 무식함을 자랑하고, 욕먹을 내용도 많지만, 그래도 관련한 내용이 인터넷으로도 퍼지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공개. 문제제기와 지적은 언제나 환영해요. 🙂

#글을 보면, 내가 수학을 공부했다는 티가 너무 난다. -_-;;

간성(혹은 양성구유, 어지자지, 남녀추니, 반음양, “사방지” 등으로도 알려진)이란 말을 들어본 사람들이라면, 한 개인이 “남성과 여성의 성적 기관과 특질을 모두 지니고 있는 이들”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이미지가 아주 잘못된 건 아니지만, 이는 간성을 상당히 제한적으로 이해한 것이다.

한 개인의 몸에 고환(정소)과 난소가 모두 있고, 2차 성징을 거치며 “여성적 특질”과 “남성적 특질”을 모두 지니는 이들은, 의학적으로 진성 양성구유(true hermaphrodite)라고 부른다. 하지만 진성 양성구유는 간성 인구 중 소수이다(간성 인구 중 4% 정도라는 말도 있다). 두 개의 난소와 XX 염색체를 지녔지만 “남성적 외부성기형태”를 지닌 이들, 두 개의 정소와 XY 염색체를 지녔지만 “여성적 외부성기형태”를 지닌 이들도 많다. 그러니 난소나 정소, 염색체 형태, 외부성기형태, 2차 성징 이후 신체변화 등의 조합은 상당히 복잡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결국 “진성”이 소수라는 건, 의학에서 간성을 규정하고 이런 규정에 따라 “참/가짜”(true/pseudo)를 판별하려는 기획과 의도가 있음을 알려준다. 아울러 이른바 비-간성인 “여성”과 “남성”의 몸이라는 것, 일테면 한 “여성”이 두 개의 난소, XX 염색체, “여성형 외부성기형태”, 유방형성, 월경 경험 등을 동시에 지니는 건, 이런 다양한 조합의 한 형태일 뿐이다.

사실 한 개인을 간성으로 판정하는 방법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이는, 태어났을 땐 간성이 아닌 “남성”/“여성”이란 성별을 할당받았는데, 20살이 넘어 우연히 유전자 검사를 하고서야 자신이 간성임을 알게 된 이들이 적지 않다는 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성별을 판정하는 방법은 외부성기의 형태가 어떠한가에 따른다. 물론 태아의 성별을 판정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외부성기의 형태가 페니스인 것 같으면 “남성”, 페니스가 아니고 클리토리스가 있으면 “여성”으로 우선적으로 판정하는 경향이 있다. 문제는 이런 구분의 기준도 애매한데, 클리토리스(혹은 페니스)의 길이가 0.9㎝ 이하이면 여성으로, 페니스(혹은 클리토리스)의 길이가 2.5㎝ 이상이면 남성으로 구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이의 길이면 간성으로 판정한다. 이 말은 0.1~0.2㎝ 정도의 차이로 간성으로 판정 받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즉 간성과 비-간성을 구분하는 의학 기준이 임의적이라는 걸 의미한다. 간성에 따라선, 태어났을 땐 남자아이로 보여 남성으로 구분했는데 2차 성징이 시작하면서 유방이 발달하고 생리를 하는 이들 역시 적지 않다.

만약 아이가 태어났을 때, 간성으로 판정 받았다고 해서 그 아이가 “간성”으로 자라는 건 아니다. 외부성기 형태가 “모호”하여 여성/남성으로 판정하기 쉽지 않은 경우, 의사들은 아이가 간성으로 자라면 불행할 것이라 단정하고, 의사 임의로 혹은 부모들을 협박하여 외부성기재구성수술을 한다. 이때 부모를 설득하는 방법은 아이가 간성으로 자라면 불행할 것이다, “비정상”으로 놀림 받을 것이다, 건강에 안 좋아 일찍 죽을 것이다, 외부성기재구성수술을 하지 않으면 동성애자가 될 것이다, 등이 있다. 간성의 성별을 결정하는 건 의사의 판단에 따른다. 어느 정도 “남성형 페니스”로 기능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경우를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 여성의 성기 형태로 수술하고 호적상의 성별을 여성으로 할당한다. 이는 페니스의 크기가 상당히 작은 남성으로 자라 삽입을 할 수 없으면 굉장히 불행할 것이라는 판단, 남성의 고통이 여성의 고통보다 더 중요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발생하는 동성애 혐오/이성애주의와 여성혐오 뿐 아니라, 간성 개인들이 경험하는 큰 문제는 자신이 스스로 원하는 성별을 선택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의사가 임의로 간성의 행복과 운명을 결정하고 이에 따라 살아갈 것을 강요한다는 점은 심각한 문제이다. 아울러 많은 경우 부모와 의사는 아이에게 간성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모르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많은 간성들은 자신들에게 정보를 정확하게 알려주지 않아서 더 불행하다고 얘기한다.

간성과 관련한 또 다른 이슈는, “간성을 남성과 여성의 성적 기관과 특질을 모두 지니고 태어난다”는 설명에서 발생한다. 이런 식의 설명은, 개인은 “남성”과 “여성”으로 태어나고 아무 문제없이 자라는데, 유독 간성만 문제가 있다는 식의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생물학 교과서에는 간성을 잘못 태어나서 문제가 있는 이들로 다루며 일종의 증후군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간성을 젠더이분법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는 문제는, 트랜스젠더 이슈와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개인은 “여성”/“남성”으로 태어나지도 않고, 호적제도가 할당하는 방식의 성별로 자라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오직 “여성”과 “남성”으로만 태어나고, 할당받은 성별대로 자랄 것이라는 인식은 간성과 트랜스젠더 모두가 곤란함/갈등으로 경험하는 지점이다.

사실 이 용어 설명에서 가장 곤혹스러운 점은 ‘용어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이다. 현재 한국에서 간성운동이나 활동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어서(순전히 내 무식과 게으름의 문제이다), 운동과 커뮤니티에서 용어를 어떻게 사용할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트랜스젠더 운동의 경우, 트랜스젠더인권활동단체 지렁이는, 단체이름을 통해 성전환자가 아니라 트랜스젠더를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간성운동에선 양성구유를 사용할지 간성을 사용할지 혹은 지금 내가 모르는 다른 용어를 사용할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다. 그러니 지금 사용하고 있는 간성이란 말은 임시로 사용하는 것임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간성과 intersex를 대응하고, 양성구유와 hermaphrodite(헤르메스Hermes와 아프로디테Aphrodite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의 이름이 어원이다)를 대응하는 것도 논쟁적이다. 이는 향후 지속적으로 고민할 사항이기도 하다. [루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