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남자] ([황산벌]과 함께): 권력과 이성애적 ‘동성애’

부끄럽게도, 파일 공유가 가능할 때 까지 기다려서야 원하는 영화를 접하는 루인으로서는 드물게, 개봉한지 며칠 되지도 않은 [왕의 남자]를 접했다. 아침 9시 상영을 선택할까 했지만, 어제가 일요일인지라 내일 [청연]을 9시로 계획하고, 느긋하게 준비해서 오전 11시 35분을 선택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중간, 중간 찔끔찔끔 울다가 마지막엔 훌쩍거리며 울었다.

※당연히 스포일러 많아요!!!
[왕의 남자] 감독이 [황산벌] 감독이라고 해서 여러 날 전에 [황산벌]을 먼저 접했었다. 비윤리적이고 폭력적이지만 흥미로운 영화라는 게 현재 남아있는 느낌이다. [#M_ 황산벌 계속 읽기.. | 황산벌은 접기.. | 흥미로운 점은, 알다시피 언어와 소통의 문제. 단일민족이란 환상을 가뿐하게 날려버리고 한국어란 환상도 깬다. “신라 말 정말 어렵다”는 대사나 “거시기” 뭔지 몰라 모든 한자를 다 조합하면서 해독하려고 하고, “거시기”를 알 때까지 공격 하지 못하는 상황은 코미디가 아니라 현실이다. 비서울지역 언어의 다름 때문에 생기는 오해와 “희화화”는 너무도 많다. 경상도 “사투리”의 억샌 말투로 인해 시비 거는 느낌이라고 말하거나 서울 “사투리”를 사용하는 ‘남자’를 “사내자식이 말투가 그게 뭐냐”며 재수 없게 여기는 반응은 루인에게 익숙하다. 오래전 한 코미디 프로그램에선 “가가가가가”(그 아이의 성이 가씨냐)란 말을 하며 사람들을 웃겼다. 전라도 사투리는 언제나 조폭의 언어로 등장하고 [웰컴 투 동막골]을 통해 강원도 “사투리”는 2005년의 유행이 되기도 했다. 이 영화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동질감을 느끼게 하고 내 편이란 공감대를 형성함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표준어”라는 말도 안 되는 기준을 만들고 그런 기준으로 사람들의 상상력을 말살하는 것이 근대국민 만들기임을 폭로한다.

[황산벌]을 비윤리적이고 폭력적이라고 느낀 건, 이 영화가 전쟁영화라서가 아니다. 전쟁 영화라도 성찰적이고 윤리적일 수 있다. (비록 전투 장면은 없지만 [용서 받지 못한 자]는 이런 성찰성과 윤리를 잘 드러낸다.) 루인은 성폭력으로 받아들였기에 차마 쓰고 싶지 않은 한 장면에선 싸움을 성애화한다. 이 영화가 비윤리적이란 감정으로 남게 했던 또 다른 장면은 김유신이 계백과 장기를 두는 장면. 공터에 장기판의 좌표를 그리고 실제 사람들을 세워둔다. 김유신과 계백이 상에 앉아 장기를 두는데 그들이 말을 움직이면 마당에 서 있는 사람들도 같이 움직이고 말을 잡으면 마당의 사람 또한 이동하면서 상대를 정말 죽인다. 바로 이 장면. 장기 놀이를 통해 실제 다른 사람을 살해하는 장면은 너무 충격적이었는데,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게임에 중독 되어 실제 상황에서도 총기 난사로 몇 십 명을 죽이거나 다치게 했다는 “해외토픽”과 무엇이 다르단 말이냐._M#]

이런 이유로 [왕의 남자]에 대한 기대는 복잡했다. 개봉하기 전부터 동성애와 관련 있단 입소문이 자자했고 감독은 권력에 관한 영화라고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전작을 확인하고 싶어서 접했고, 그로 인해 동성애 영화라는 이유만으로 가졌던 기대는 얼마간의 불안으로 바뀌었다. 그 와중에 김태웅의 희곡집 [이爾]를 읽었다.

먼저, 녹수. 영화에서 중요한 한 축을 이루는 녹수와 접하며, 이 영화는 ‘이성애’가 개입한 4각 관계 영화가 아니라 ‘동성애’ 3각 관계구나 했다-_-;; 녹수의 연산을 향한 “애정”은 연산을 향한 것이 아니라 연산으로 나타나는 권력을 향한 애정이다. 당시의 유교, 신분제, 젠더차별, 성차별 등등의 각종 억압이 난무한 상황에서 권력욕을 가진 녹수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연산에게 “간택”되어 아이를 가지는 것. 그렇기에 녹수는 요부가 아니라 협상력을 가진 인물이다(이런 의미에서 [신돈]의 기황후 만큼이나 멋지다). 녹수가 공길에게 누명을 씌우고 죽이려고 했던 이유는 연산의 사랑이 공길에게로 이동해서가 아니라 그로 인해 자신의 권력 기반이 위태로워지기 때문으로 읽었다.

공길, 장생, 연산 이렇게 셋의 관계를 적는 건 너무 진부할 것 같다. 실은 진부해서가 아니라 한 번은 더 접해야만 쓸 수 있을 것 같다. 일테면 연산의 권력을 가지고 싶음과 권력에서 벗어나고 싶음의 욕망은 편견으로서의 SM을 떠올리게 한다(그러니까 머리 벗겨지고 배나온 회장님, 정치인들이 마조히즘적 쾌락을 좋아한다는 그런..). 공길과 장생의 애정관계와는 달리 연산의 공길을 향한 애정은 좀 더 복잡하다. 연산의 왕이라는 계급과 공길의 광대라는 더 이상 낮아질 것도 없는 계급 사이의 거리. 공길의 놀이판을 따라하며 공길에게서 인정받고 싶어 하는 연산의 욕망(녹수에게선 위로 받고 싶어 하는데, 바로 이 점이 젠더로 읽을 때의 핵심적인 차이다)과 공길의 빗나간 화살에 놀란 후 입 맞추는 장면. 연산이 쓰고 공길, 장생 등이 연기한 중국의 경극을 통해, 그리고 공길에게 보여준 첫 그림자 연극을 통해 공길에게서 엄마와 아빠를 동시에 찾고 싶어 하는 욕망. 이런 복잡한 요소들로 인해 연산에게서 ‘동성애’적 욕망과 이성애적 욕망을 동시에 느꼈다. 때문에 기회를 만들어 다시 접하고 싶고 그러고 나서야 셋의 관계를 좀 더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개입하기

개입할수록 취약해진다. 루인이 아는 모두에게 동일한 정도로 개입하는 것은 아니지만, 개입하고 있는 상대의 감정, 상황 하나하나에 예민해지고 민감하게 반응해서, 상대의 고통을 루인의 고통으로 반응하고 상대의 고통의 원인이 루인 때문이라고 인식한다.

아는 사람이, 친구라고 부르는 사람이 적은 이유가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말은 하지 않지만 상대의 상황과 접하면 아픔이 전혀 져서 그 고민을 루인이 하기 때문이다.

“쿨~”하고 싶어 안달하기도 한다. 쿨하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개입하고 더 많은 상처에 더 민감하게 노출된다는 것. 결국 이것이 살아가는 힘이다.

[네 멋대로 써라]

저자: 데릭 젠슨
옮긴이: 김정훈
출판사: 삼인
가격: 12,000원
루인이 좋아하는 선생님이 추천해준 책. 서평을 쓰고자 하는 건 아니니 간단한 느낌을 쓰자면:

근대국민교육제도가 다른 행복을 차단하고 획일화된 노예를 찍어내는 제도임을 비판하면서 그런 교육이 글쓰기 또한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말한다. 책 홍보 리본에 “선생님, 선생님, 난 이걸 할 때는 괴로워요.” “그럼, 그걸 하지 말려무나.”라고 적혀 있는데 이 대화 내용이 책 내용을 함축한다. 덧붙이면 책의 영어 제목이 [물 위로 걷기Walking On Water]인데, 물 위를 걷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정말 불가능 한 것이 아니라 불가능하다는 자기 믿음, 일전에 루인이 쓴 벼룩과 코끼리 이야기처럼 하기도 전에 “난 할 수 없을 거야”란 믿음이 불가능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저자는 하고 싶은 것으로 즐겁고 행복한 글쓰기를 지향하는데, 어떤 글을 쓰다가 고통스러우면 쓰지 말고 그 글이 즐거울 수 있을 때 까지 기다리라고 말한다. 개인은 누구나 자기만의 언어가 있기에 뭔가를 가르칠 필요 없이 개개인의 언어를 끄집어 낼 수 있는 환경만 제공한다면 누구나 멋진 글을 쓸 수 있다는 것. 교육(education)이란 단어 자체가 끌어내다(e-ducere)란 산파의 언어에 어원을 두고 있다. 그렇기에 글쓰기 수업 강사임에도 글쓰기 수업 시간에 숨바꼭질을 한다거나 금기시 하는 언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읽으면서 익숙한 세계관(조한혜정 선생님의 [글 읽기와 삶 읽기]를 떠올렸다)이면서도 갈증을 해결하는 내용이 많이 좋았다.

“정열, 사랑, 미움, 두려움, 희망. 가장 좋은 글쓰기는 이런 원천들에서 솟아 나와요. 삶 자체가 이런 원천들에서 나오죠.” (p.19)

“누가 나한테 말해줬더라면 좋았을 셋째 얘기는, 난 그렇게 겁쟁이가 아니니까 앞으로 밀고 나아가고, 다른 사람들은 꺼지라고 요구하라는 겁니다.” (p.60)

핵심은, ―힘주어 말하건대― 그들을 딴죽 거는 사람으로 바꿔놓고는 서로서로 주장들을 찢어발기도록 하는 게 아니라, 앞뒤가 안 맞고 약한 지점들을 상냥하게 함께 찾아내고, 생각을 넓혀 앞뒤 안 맞는 구석을 건둥그리도록 돕고, 생각을 갈고 닦아 허술함을 깎아내도록 돕는 것이다.
진짜 핵심은, 늘 그렇듯, 재밌게 즐기는 것이다. (p.138)

“(…) 우리는 실제로는 관계와 경험들로 짠 망입니다. 나는, 내가 여태까지 겪은 모든 일, 내가 들이마신 모든 숨, 내가 여태까지 한 모든 말, 내가 여태까지 먹은 모든 음식 한 조각 한 조각과 더불어, 바로 지금 교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가로지름입니다. 난 전혀 어떤 이 아닙니다. 나는 과정입니다. 아니 심지어 그것조차 아닙니다. 우리 언어로는 나를 기술할 수 없는데요. 문장은 명사와 동사를 요구하게 마련이니까요. 자, 봐요. 번갯불이 번쩍하고 칩니다. 그러나 번갯불은 뭡니까? 번갯불이 따로 있다가 번쩍하고 치는 그런 건 아니죠. 그것은 번쩍하는 어떤 과정입니다. 나도 그렇습니다.” (p.212)

※저자의 글도 재밌지만 번역도 성실해서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