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전까지는 몰랐다가 이랑들과 만나고서야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비단 기분 나쁜 상황 뿐 아니라 좋은 상황, 놀라는 상황 등 그 상황에 따른 감정이 얼굴 표정으로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것이다. 목소리를 통해서도 그런 감정이 선명하게 드러난다고 한다. (정작 루인은 그런지 모른다.;; 하지만 이건 좋은 점인 듯 하다.)
지금은 덜한 편이지만, 한땐 말대꾸가 심해서 욕을 먹기도 했다. 이건 나름 협상을 통해, 요즘은 거의 안 하는 편인데, 사실 협상이라기보다는, 말을 해도 안 해도 욕을 먹었기 때문에 나타난 반응이다. (일종의 트라우마이기도 하다.)
“표정관리”하지 않고 기분 나쁘면 기분 나쁘다는 감정을 얼굴/몸으로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 역시, 말대꾸의 한 방식이라 몸앓는다. 어차피 말해봤자 소용없음을 알 때, 소리가 아닌 몸의 표정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이니까. “대드”는 것 역시 말대꾸의 또 다른 표현 방식이라고 몸앓는다.
지난여름, 벨 훅스bell hooks의 [Talking Back]을 읽으며 가장 어려웠던 부분 중 하나는 제목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였다. 영어 문법도 제대로 모르고 한 페이지에 사전에서 찾는 단어가 15개를 넘나드는 ‘실력’에, (자랑스럽게도-_-;;) 여전히 토익과 토플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상황이니, 오죽하랴만, 대충 감을 잡았으면서도 그렇게 번역하기를 꺼렸다. “말대꾸”라니. 페미니즘 책의 제목을 “말대꾸”로 번역한다는 것이 왠지 안 어울린다는 편견(편견의 견見 역시 “보다”는 의미를 지닌다)으로 인해 뭔가 더 그럴듯한 것이 없나, 했다. (“그럴듯한” 제목은 뭘까?)
말대꾸. 이 말을 책 제목으로 삼기를 꺼린 이유는, 말대꾸가 지니는 의미를 몸앓지 않은 체, 말대꾸는 나쁜 것이라는 “어른”들의 말이 몸에 강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이 역설적인 상황이라니. “어른”들이 말대꾸를 싫어한다는 건, 말대꾸가 그들에게 불편하다는 의미인데, 말대꾸는 (기존의) 권위에 도전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말대꾸는, 선생과 학생, 어른과 아이처럼 권력의 위계질서가 너무도 강력한 상황에서 그 권위를 무시하고(인정하지 않고) 권력에 도전하며 목소리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대드”는 것 역시 그 표현 자체에 나이 혹은 권위 등에 의한 권력에 대항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물론 “어른”들에게서 욕먹기 딱 좋고 심지어 “저래서 사회생활 어떻게 할지 걱정이다”란 소리를 몸에 달고 살게 되지만 그런들 어떠랴. 툭툭 던지는 말대꾸가 상당히 유쾌한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