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대꾸하기

루인의 몸에 남아 있는 지난 시절의 흔적들 중 가장 오래된 지점에서부터, 욕을 먹고 혼이 난 이유 중 하나는, “표정관리”를 못해서이다. 어른이거나 루인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루인에게 무슨 말을 할 때, 기분이 나쁘면 그 나쁜 감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서 한 마디 듣고 끝날 일을 열 마디를 듣고도 더 듣는 상황으로 만들곤 했다. 학교 선생이든 이성애혈연가족이든 친척 어른들이든 상관없이 기분 나쁘면 얼굴에 기분 나쁘다는 표가 그대로 드러났다. 얼굴 표정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당신의 그런 말 기분 나빠”, 라는 ‘아우라’를 발산한다. 심할 경우, 욕만 먹고 끝날 상황을 손찌검을 당하거나 체벌의 상황으로까지 가기도 했다. 상황이 이 정도가 되면 어느 정도 “표정관리”를 해서 욕을 덜 먹는 방향으로 갈 법 한데 지금도 여전하다. 때론 나름대로 “관리”를 한다고 하는데, 표정은 굳어있고 몸에선 “사악한” 기운이 넘쳐서 상대방이 알아차리니 결국 마찬가지다.

그전까지는 몰랐다가 이랑들과 만나고서야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비단 기분 나쁜 상황 뿐 아니라 좋은 상황, 놀라는 상황 등 그 상황에 따른 감정이 얼굴 표정으로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것이다. 목소리를 통해서도 그런 감정이 선명하게 드러난다고 한다. (정작 루인은 그런지 모른다.;; 하지만 이건 좋은 점인 듯 하다.)

지금은 덜한 편이지만, 한땐 말대꾸가 심해서 욕을 먹기도 했다. 이건 나름 협상을 통해, 요즘은 거의 안 하는 편인데, 사실 협상이라기보다는, 말을 해도 안 해도 욕을 먹었기 때문에 나타난 반응이다. (일종의 트라우마이기도 하다.)

“표정관리”하지 않고 기분 나쁘면 기분 나쁘다는 감정을 얼굴/몸으로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 역시, 말대꾸의 한 방식이라 몸앓는다. 어차피 말해봤자 소용없음을 알 때, 소리가 아닌 몸의 표정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이니까. “대드”는 것 역시 말대꾸의 또 다른 표현 방식이라고 몸앓는다.

지난여름, 벨 훅스bell hooks의 [Talking Back]을 읽으며 가장 어려웠던 부분 중 하나는 제목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였다. 영어 문법도 제대로 모르고 한 페이지에 사전에서 찾는 단어가 15개를 넘나드는 ‘실력’에, (자랑스럽게도-_-;;) 여전히 토익과 토플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상황이니, 오죽하랴만, 대충 감을 잡았으면서도 그렇게 번역하기를 꺼렸다. “말대꾸”라니. 페미니즘 책의 제목을 “말대꾸”로 번역한다는 것이 왠지 안 어울린다는 편견(편견의 견見 역시 “보다”는 의미를 지닌다)으로 인해 뭔가 더 그럴듯한 것이 없나, 했다. (“그럴듯한” 제목은 뭘까?)

말대꾸. 이 말을 책 제목으로 삼기를 꺼린 이유는, 말대꾸가 지니는 의미를 몸앓지 않은 체, 말대꾸는 나쁜 것이라는 “어른”들의 말이 몸에 강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이 역설적인 상황이라니. “어른”들이 말대꾸를 싫어한다는 건, 말대꾸가 그들에게 불편하다는 의미인데, 말대꾸는 (기존의) 권위에 도전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말대꾸는, 선생과 학생, 어른과 아이처럼 권력의 위계질서가 너무도 강력한 상황에서 그 권위를 무시하고(인정하지 않고) 권력에 도전하며 목소리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대드”는 것 역시 그 표현 자체에 나이 혹은 권위 등에 의한 권력에 대항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물론 “어른”들에게서 욕먹기 딱 좋고 심지어 “저래서 사회생활 어떻게 할지 걱정이다”란 소리를 몸에 달고 살게 되지만 그런들 어떠랴. 툭툭 던지는 말대꾸가 상당히 유쾌한 걸.

채식주의로 읽는 [웰컴 투 동막골]

어제 [웰컴 투 동막골]을 접했다. 영화에 대한 흥미보단, 민족주의와 관련한 텍스트로의 흥미 때문이었다. “웰컴 투 동막골”을 “웰컴 투 김일성”이란 식으로 해석한 기사가 있단 얘길 접하고 나중에 접해야지 했다. (이런 측면에서, [공동경비구역 JSA]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이 영화를 읽는 방법은 여러 가지일 텐데, 일테면 이랑 친구, Mars는 여일(강혜정 분)의 몸을 영토화하고 부정적인 의미에서 공간화한, 여일의 몸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해석했다. 동감.

루인이 이 텍스트를 느끼다 충격 받은 부분은, 감자밭에서 먹을 것을 찾는 멧돼지를 잡고 난 다음 장면들이다. 멧돼지를 잡은 다음, 동막골 원주민들은 멧돼지를 먹지 않고 그냥 땅에 묻었다. 하지만, 6명의 군인들은 왜 멧돼지를 잡아먹지 않느냐고 불만을 터뜨리며 밤에 몰래 멧돼지를 잡아먹는다. 생명을 죽이고 음식화하여 고기로 뜯어 먹는 장면도 견디기 힘들지만, 이 육식을 통해 ‘남성’연대를 다지는 장면은 정말 흥미로웠다. 그 전까지 어색하고 서로를 향한 경계심을 품고 있던 6명은 이 육식을 통해 어색함을 어느 정도 해소하고 ‘남성’연대를 다지는데, 육식이 ‘남성’다움/’남성’연대에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

관련해서, 이 장면을 통해 동막골 사람들은 육식을 하지 않는 채식주의자라고 알려준다. 감독이 의도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채식을 하면 성격이 선해진다, 덜 폭력적으로 변한다, 순해진다, 하는 편견들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장면이기도 하다. 채식을 하면 성격이 선해진다고? 그럴 리가. 채식을 해서 성격이 순해지고 착해진다면 루인의 이 악랄한 성격은 어떻게 설명하란 말이냐. 뭐, 채식을 통해 그나마 이 정도라고 한다면, 할 말 없지만-_-;;;

양심적 병역 거부

양심적 병역 거부와 관련한 기사들을 읽으며 고개를 주억거렸어. 중앙일보는 “할 일 안 하고 안 할 일 손대는 인권위”라는 사설도 실었더라. 하지만 가장 흥미롭게 다가온 기사는 “누가 아들을 군대 보내려 하겠나”라는 제목의 세계일보 기사. 제목부터 너무 많은 얘기를 하고 있잖아.

사진으로 해병대 출신의 아저씨가 나오는데, 해병대 출신의 아저씨도 아는 거지. 군대란 곳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그래서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란 걸.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는 군대를, 양심적 병역 거부가 인정되는 순간, “모두”가 군대에 가지 않을 거란 걱정을 어떻게 하겠어. 겉으로는 자랑하지만 실은 자기도 가고 싶지 않았을 테고, “내가 갔는데 네가 안가”하는 심보는 아닌가 싶기도 해.

이 만큼이나 가기 싫은 곳이라고 항변하는 모습을 접하며, 군대가 ‘남성’ 성인식/통과의례로서 얼마나 강하게 작동하는지를 느껴. 군대를 통해 어른이 된다고 말하는 문화 속에서 (이런 문화가 군대에 갔다 오지 않은 사람을 “어린이” 취급 하지) 예비역 병장이란 ‘계급’은 당연하다는 듯 권력과 명예를 가지잖아. 군대나 군사주의 문화와 관련해서 약간의 비판만 나와도 군대에 갔다 오지 않았으면 입 다물고 있어라 거나, 의무는 행하지 않으면서 권리만 주장하지 말고 군대나 가라는 말들. 이런 말들이 왠지 수긍되는 분위기. 경력과는 무관하게 예비역 병장들이 알바 같은 곳에서 팀장을 한다거나, “역시 군대에 갔다 오니 다르네” 라는 말들. 심지어 군 입대 기간을 경력으로 인정하거나 (지금은 없지만) 군가산점 얘기도 여전히 나오고 있잖아. 근데 도대체 왜 군대 경험에 대한 “보상”을, 법적으로 가야함에도 권력과 부를 통해 가지 않는 사람이나 군 제도를 만든 기관에 청구하지 않고 애시 당초 군 제도에 배제되어 있는 사람에게 하는 거야?

혹은 그렇게 가기 싫은 곳이면 폭력을 세습하지 말고 북한과 협상해서 통일하는 게 더 ‘현명’한 거 아냐? 군대가 없어지면 안 되는 이유가 분단국가라고 하니, 그 비용으로 통일하고 통일’비용’으로 전용하면 안 되려나. 그리고 결과적으론 군대 제도 자체를 없애는 것이 더 좋은 거 아냐.

결국, 양심적 병역 거부를 인정하면 군대에 가지 않을 거란 얘기와 군대를 갔다 오면 어른이 된다며 예비역 병장들이 가지는 자부심(혹은 열등감? “피해의식”?)은 같은 내용인거야. 그 만큼 가기 싫고 폭력적인 곳을 갔다 왔으니 그에 따른 보상을 해야 하고 자부심을 가질 만 하다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