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라서 불편하냐고요?

제목처럼 이런 질문을 많이 받는다. 한국에서 채식주의자로 살면 많이 불편하지 않느냐고. 이런 질문을 받으면 상당히 곤혹스러운데,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부정확하지만 그래도 ‘간단’하게 할 수 있는 대답은, 별로 안 불편해요, 이다. 물론, 이 말의 전제는 기본적으로 직접 음식을 해 먹는다는 것. 젠더 사회에서 음식을 하는 사람은 주로 “엄마”/”아내”이니, “엄마”/”아내”와 함께 살고 “엄마”/”아내”가 모든 음식을 다 하는 상황에서 채식주의자인 자신의 정치성을 “배려”해주지 않는다고 말하는 건, 착취(폭력)라고 몸앓는다.

루인이 채식주의자로 사는 것이 불편하지 않다는 건, 루인이 접하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페미니즘을 공부하거나 페미니스트거나 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이유로 상처 받은 적이 있다. 물론 채식주의자로 살아가면서 불편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모임이 있을 때 음식점을 선택하는 문제 등에 있어선 “불편”하다. 하지만 이 불편함은 루인이 채식주의자라서 불편한 것이 아니라 루인이 채식주의자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다른 사람들의 반응 때문인 편이다. 그리고 루인이 보기에 ‘정말’ 불편한 사람은 루인이 아니라 육식주의자들이다(육식주의자는 루인 농담처럼, 장난스레 사용하는 말로 유제품을 포함한 육식을 하는 사람을 일컬음). 정말 불편한 사람은 채식주의자가 아니라 채식주의자 ‘때문에’ 선택 사항이 줄어들거나 여러 가지로 신경을 써야 한다고 느끼는 그 질문자가 아닐까. 채식주의자가 같은 자리에 없었다면 그 사람은 불편함을 느낄 이유가 없을 테니까.

루인이 불편하지 않다고 말하는 건, 육류나 유제품 등의 다른 존재들이 애시 당초 루인의 선택 사항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일테면 루인이 육식을 좋아하고 선택사항에 있는데, 어떤 이유로 먹을 수 없다면 불편할 수 있겠지만 애시 당초 루인에겐 선택사항이 아닌데 어떻게 불편할까. 일테면 ‘이성애’자에겐 ‘레즈비언’이 “대안”일 수 있겠지만 정작 ‘레즈비언’에겐 그렇지 않은 것처럼.

물론 채식에 대한 감수성이 없어 음식점에서 주문할 때, 요구사항을 이상하게 여기는 반응은 불편하다. 이런 연유로 모임 등의 이유가 아니면 직접 해 먹는 편이다. 루인이 채식주의자라는 걸 알고는 외국의 각 종 사례를 들며 “인류학”적 지식을 자랑한 후 “그래도 나는 고기가 좋아”라고 말하며 채식을 정치학이 아닌 ‘단순한 취향’으로 간주하는 태도는 불편하다. 혹은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싶어 반응하는 “관용”적인 (척 하는) 태도 역시 불편하다. (후자의 두 경우엔 거의 분노한다.)

불편하다니, 그럴 리가. 얼마나 좋은데!

[#M_ +.. | -.. | 채식을 여러 가지로 분류하는 방식(여기 참조)과 “채식한지 얼마나 되셨어요?” 란 질문 모두 싫어하는데, 루인이 무식해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11년 하면 대단하고 6개월 하면 그냥 그런 건가? 모르겠다._M#]

[#M_ ++.. | –.. | 내용 중, “그 질문자”는 특정 누군가를 지칭하지 않아요. 행여나 해서…_M#]

이 즈음 떠오르는 노래: Eva Cassidy

몇 해 전, 인터넷 책방에서 포장 알바를 하던 겨울이었다. 사는 곳에서 한 시간 가량 걸리는 거리에 일하는 곳이 있었기에 오갈 때 마다 한 장의 CD를 듣곤 했다. 두 장 정도 챙기면 일하러 갈 때 한 장, 돌아 올 때 한 장.

그날은 12월 24일 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라고 “특별히” 저녁에 일을 하지 않았고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끝났다. 평소라면 9시 혹은 10시 즈음까지 일하는 알바 팀이 따로 있었지만 크리스마스이브니 일찍 끝난다고 했던가.

당시의 玄牝으로 돌아오는 길, 무슨 음악을 들을까 하다가, 며칠 전 산 앨범에 끼워준 샘플러 시디를 골랐다. 당시엔 몰랐지만 이후에야 알았는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소장하고 싶어 했다는 알레스 뮤직의 샘플러 세 번째 앨범. 알고 골랐다고 하기 보다는 그냥 한 번 들어보고 싶었기에 선택했다. 어떤 음악이 들어 있나 궁금했기에. 혹은, 언제나 그렇듯 앨범이 루인을 부른 건지도 모른다.

회사에서 나와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은 추웠고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크리스마스이브이니 그럴 만도 했지만, 사람 많은 곳을 유난히 싫어하기에 서둘러 걸었다. 어느 거리였던가. 귀로 흘러 들어가는 소리. 기타 연주에 이어 흐르는 음악.

Eva Cassidy의 Autumn Leaves였다. 음악이 몸에 흐르는 순간, 숨이 막히는 느낌과 함께 멈춰 섰다. 자리에 주저앉을 뻔 했고 눈물이 났다. 그 순간만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Eva Cassidy와는 그렇게 닿았다. 이후 Eva Cassidy의 모든 앨범과 닿았고 이 계절이면 습관처럼 Eva Cassidy의 음악을 떠올린다. 이 계절이 좋은 이유 중 하나는 추억이 묻어있는 음악이 유난히 많아서 인지도 모르겠다. 날이 날이니 만큼 종일 Eva Cassidy의 음악을 들으며 보낼 것 같다.

보다에서 느끼다/감각하다로

“다음에 만나자”, “내일 만나” 라는 말에서의 “만나다”는 “보다”란 의미다. “보다”는 시각으로 상대를 확인한다는 의미인데 시각으로 확인한다는 건, 시각을 통해서야 비로소 알 수 있다는 의미이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은 이처럼 시각을 통한 인식이 곧 경험임을 말해준다. 근대주체는 시각주체인데 사진/사진기는 시각주체의 욕망을 표상한다. 하지만 주지하다 시피 시각적 주체를 가정하는 것은 시각’장애’인을 배제하는 차별적인(폭력적인) 언어이다. 루인이 “보다”와 같은 의미의 언어를 쓰지 않기 시작한 건 여기에 있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시각주체로서, 사람은 누구나 볼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단순히 보는 것 이상으로 어떤 규범적 보기를 전제한다. 다른 식으로 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며 내가 보는 사물은 너도 같은 식으로 볼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런 관점(觀點: 관점이란 말도 시각에 기반 한다)에선, 1.5의 시력을 가진 사람과 0.1의 시력을 가진 사람 모두 같은 방식으로 볼 것을 강제하고 색깔에 있어서도 모두가 같은 식으로 구분할 것을 전제한다.

0.1의 시력이지만 평상시 안경을 쓰지 않는 루인에겐 이런 다른 식의 보기가 단순한 ‘불편함’을 넘어 인간관계를 맺는 방식을 읽는 한 방법이기도 하다. 웬만큼 가까운 거리가 아니면 상대방이 누구인지 못 알아 보는데 이럴 경우 상대방은 무시한다고 화를 내거나 불쾌하게 받아들인다. 나이주의가 강한 한국사회에서 상대방이 루인보다 나이가 많거나 심지어 교수/상사이기라도 하면 상황은 더 골치 아프다. 어떻게 ‘해명’을 하고 나면, 왜 안경을 안 쓰고 다니느냐고 묻는데, 루인의 대답은, 안경 쓰기 불편해요. 렌즈는? 시도했지만 실패했어요. 이런 불편함을 경험하는 루인에게 ‘진짜’ 문제는 안경을 쓰지 않고 ‘낮은’ 시력으로 다니는 루인이 아니라 동일한 시력으로 다닐 것을 강제하는 사회이다. 그들과 같은 시력으로 다닐 것을 강제하는 사회에서 시력의 기준은 누구의 눈으로 정한 것이며, 돌아다닐 때 상대방을 확인하면서 다닐 것을 강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만약, 0.1의 시력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였다면 지금과는 엄청나게 다른 사회였을 것이다. TV시청은 1.5m 떨어진 곳에서 하라고 하는데, 그건 시청자의 시력이 그 거리에서도 불편함 없이 볼 수 있음을 전제한다. 루인의 시력으로 안경 없이 그 거리에서 보려면 TV 화면도 엄청 커야하지만 그 만큼 자막과 같은 글씨 등의 크기도 충분히 커야 한다. 노안이란 말 자체도 특정 시력을 정상화 하고 있기에 가능하다. 노안에 맞춘 세상이었다면 노안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

더 불편한 말 중 하나는, 왜 다른 사람을 안 보고 다니느냐는 것이다. 즉, 거리에서 마주쳤으면서도 인사하지 않았다고 불쾌해 하는 상대의 반응. 왜 거리에서 아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고 살피면서 다녀야 하는데? 더구나 다른 사람 얼굴을 잘 기억 못하는 데다 시력이 0.1인 루인이니 당신이 먼저 말을 걸면 될 거 아냐. (상대의 얼굴을 잘 기억 못하는 걸 주의가 부족하다느니 관심이 없어서라느니 하는데, 이런 말을 들으면 더 화난다. 루인이 영화를 玄牝에서 보길 선호하는 이유 중 하나는 영화 속 등장인물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해서 때때로 앞으로 돌려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쓰고 보니, 뭔가 우울하다-_-;;)

규범화된 시각주체로서의 보기는 시력을 넘어, 소위 말 하는 색약, 색맹과 같은 ‘비정상’ 범주를 만든다. 모두가 같은 색깔 체계로 사물을 볼 것을 가정한다. (색깔 자체가 근대의 발명품이긴 하다.)

이 그림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소위 말하는 색약/색맹 검사표이다. 사람마다 이 그림을 읽는 방식은 다른데, 이 다름을 비정상규범에선 색약/색맹으로 규정한다. 다른 사람과는 다른 식으로 색깔 체계를 가지고 있는 거지 어째서 이것이 색”약”이고 색”맹”일까. 색”맹”이라면 흑백과 회색 톤은 색깔이 아니라는 의미?

“만나”는 건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다. “맹”인(盲人: 맹盲자 역시 장님, 어둡다, 무지하다 등의 뜻을 가진다)의 모임은 만남의 자리가 아니란 의미일까. 봐야지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보는 것으로 아는 것도 아니다. 모임이 단순히 보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요즘, 감각하다(感覺-), 느끼다란 말에 매력을 품고 있다. “만나”는 자리는 단순히 보는 자리가 아니라 온 몸으로 느끼는 자리니까. 그러니 인사하는 방법도 달라지겠지. 다음에 “만나”요, 가 아니라 다음에 또 느껴요 혹은 내일 또 감각해요, 와 같이. 물론 느낌/감각은 같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은 아니기에 뭔가 애매한 구석이 있긴 하다. 그래도 왠지 좋은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