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속의 라디오가 주는 다른 느낌.

초등학생 시절에도 라디오를 듣던 몸의 흔적이 떠올랐다. 그땐, 방학 때, 숙제를 하기 위해서 들었다. 방학 숙제를 하기 위해선 라디오의 어떤 방송을 들어야 했고 그러다 보면, 다른 방송도 듣곤 했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이 흔적이 떠오른 건, 엉뚱하게도 라디오에서 하는 상품 소개와 사연을 읽고 나서 챙겨주는 선물(=상품-_-;;) 때문이다. 어떤 방송에선 느닷없는 선물을 주기도 하는데, 여기 나오는 상품이 예사롭지 않다. 가끔은 루인도 참여해보고 싶을 정도로 끌리는 상품도 있고.

몇 해 전, 주로 아침 방송을 즐겨 듣던 루인은, 지금은 없어진 한 방송에서 몇 번인가 선물 신청을 했다. 영화 DVD를 준다거나 음악 CD를 준다고 하면 별다른 기대 없이 신청하곤 했다. 그런데, 누군가 챙겨주는 것도 아닐 텐데 신청만 하면 선물을 받았다. 그땐 무던했는데 지금 와 돌이키면, 그 방송 관계자 중,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어떻게 그렇게 자주 받았던 걸까.

라디오 방송과 선물을 떠올리면 항상 그때를 떠올렸다. 라디오와의 인연은 그때부터 시작이라는 듯. 그런데 아니었다. 초등학생 시절에도 라디오를 즐겨 들었던 흔적이 몸에 남아 있다. 지금이 겨울이어서 그런 건지도 모르지만 초등학생 시절 들은 라디오는 따뜻한 느낌으로 떠오른다. 겨울에만 들은 것이 아니라 여름에도 들었는데 과거의 라디오가 주는 느낌은 따뜻함이라니.

그때도 선물을 받은 적이 있다. 열심히 라디오를 듣던 어느 날, 루인도 사연을 한 번 보내고 싶었다.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그 어느 날. 별로 예쁘지 않은 디자인에 삐뚤어진 글씨로 엽서를 썼다. 처음 라디오 엽서를 쓰는 티를 풀풀 내는 내용이었고, 우표를 붙이로 가기 전, 미리 읽은 엄마는 “보내지 마라”는 말로 내용을 가볍게 비웃어 줬다-_-;; 그리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잠시 다른 일을 하고 방에 들어왔을 때, 루인의 사연이 소개되고 있었다. 아아, 녹음하고 싶었지만 이미 시간을 놓쳤고 너무 기뻤지만 한편으론 부끄럽기도 했다. 그때 진행자는 무슨 말로 루인의 엽서에 말을 덧 붙였는지는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좋았지만 예상만큼은 기쁘지 않고 무덤덤하기도 했다. 그냥 남의 일이라도 되는 냥. 그렇게 방학은 지나갔고 개학하고 며칠 후, 방송국에서 선물이 왔다. 플라스틱 곽 속에 들어있는 볼펜 한 자루.

오랫동안 잊고 있던 흔적이다. 잊고 있던 흔적을 떠올리면서 그 시절 라디오는 참 따뜻하고 설레었구나, 했다. 지금과는 소통하는 방법이 달라도 너무 다르니까. 그땐 라디오와 소통하는 방법은 엽서를 보내고 우편사고 없이 무사히 도착하는 것, 거기에 운이 좋으면 소개도 되는 것이었다. 소개는 둘째 치더라도 사연을 보내는데 며칠이 걸렸다. 반면, 요즘은 인터넷은 물론 문자로도 사연을 보내니 빨라진 편이다. 선물의 크기도 달라졌고. 김치냉장고에 해외여행 상품권까지 등장했으니. 시간을 놓치면 다시 듣기로 들을 수도 있고. 어느 한 쪽이 좋고 어느 한 쪽은 그렇지 않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다시 듣기는 루인이 좋아하는 서비스니까). 다만 그땐 참 따뜻했구나, 하고 중얼거릴 뿐이다. 지금의 라디오도 따뜻하지만 그때와는 그 느낌이 많이 다르다.

어쩌면 과거를 따뜻하게 포장하고 싶어 하는 욕망인지도 모른다. 한 편으론 속도에 안달하면서 한 편으론 느림을 욕망하는. 과거는 화석처럼 고정되어 있다는 착각 속에서 지금과는 다른 느낌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라고. 이런 바람이 과거의 한 시간을 지금과는 다르게 포장하고 박제해서 그땐 지금과는 달리 좋았는데, 라고 말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갑자기 이렇게 말을 만들기 시작하는 건, 일테면 대중음악에서 1960, 1970년대 음악이 참 좋았어, 라는 식으로 말하며 요즘 음악을 폄하하는 것처럼 비춰질까봐서다.

그냥 갑작스레 오랫동안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라서 따뜻해졌다. 좋은 기억이니까. 그래, 어쩌면 그래서 그때의 라디오를 따뜻하게 느끼는 지도 모른다.

경력과 경험의 틈 (각주들)

다른 곳에 쓴 글의 각주들

주1) 페미니즘은 책을 몇 권 더 읽었는지, 수업이나 강의를 몇 번 더 들었는지, 더 많이 알고 있는지 아닌지, 어떤 경력이 있는지 아닌지로 얘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페미니즘/여성학은 학문이 아니라거나 너무 어려워 현실과 상관없다, 등의 의미가 아니라 이런 내용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대학교육을 받고 영어 텍스트 한 둘 읽으면 ‘당연히’ 더 많이 알거라는 믿음 자체가 이미 엘리트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저작권(copyright)과 함께 상당히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지식인이니 지식인(대학생)의 사명이니 하는 따위의 언설들이다. 역사책을 읽으며 깨달은 것 중 하나는, 지식인은 그가 살던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이 아니라 가장 뒤쳐져 있는 사람이며 때론 뒷북치는 존재라는 것이다. “민중”/대중이라 불리는 집단(지식인 자신은 민중/대중이 아니라는 오만함을 전제한다)이 이미 경험했고 알고 있는 내용을 불필요하게 어렵게 만들고 그것에 저작권을 주장하는 것. 페미니즘은 이런 방식과 가장 멀며 이런 방식 자체에 문제제기 한다. 특화가 불편한 건, 그 한 편에 이런 지점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루인이 어떤 특정 지점을 더 많이 이야기 한다면 그런 책을 한두 권 더 읽어서거나 관련 경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지점들이 루인에게 특히나 더 민감한 경계들이기 때문이다. 루인에게 첨예한 정치적 긴장이 발생하는 지점을 다른 사람들과 얘기할 때, 지식/경력과는 상관없이 기존의 ‘상식’과는 다른 언어/내용으로 말 할 수밖에 없다.

(사회학 관련 수업에 참가하며 “사회학자가 없으면 사회현상도 없다”란 말을 접한 적이 있다. 이 말을 한 선생님은 사회현상은 사회학자들의 인식틀로 구성된 것이라고 해석했지만 루인에게 이 말은 현상 혹은 경험은 지식권력에 의해 위계화 된다, 로 다가왔다.)

주2) 관련 경력이 있다는 것과 경험을 말한다는 건 다른 문제이다. 11년 넘게 채식을 해왔지만 채식주의자로 정체화한 건 기껏해야 2년이 안 된다. 채식과 루인의 삶을 엮어가며 몸앓기 전까지, 루인에게 채식은 단지 식사 시간만의 문제였다. 아직도 채식(주의)은 루인에게 무지의 영역 중 하나이며 때론, 채식주의자가 아닌 사람의 언어가 루인의 몸에 더 잘 닿는 경우도 있다. 경력이 있다는 것이 곧 그것에 대해 가장 잘 안다거나 그것을 말 할 수 있는 유일한 권리가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제목을 붙일 수 없는 글

34권으로 완결한 만화를 며칠 전부터 읽기 시작해서 오늘 오전에야 다 읽었다. 원래 계획은 조교 사무실에 가는 것이었다.

어제 오후, 서점에 들렀다 귤을 사서 玄牝으로 돌아왔다. 어제의 내일, 오늘 오전에 일이 있어서였다. 기대하는 일이었기에 혹시나 늦잠 잘까봐 일찍 잠들기도 했다. 아침, 옷 갈아입을 즈음, 연기되었다는 문자를 받았다. 한편으로 아쉽고 한편으로 좋고. 라디오에서 아침 날씨가 상당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귤은 결국 주말까지의 간식으로 결정되었고 깎아 가려고 했던 키위도 그냥 루인의 간식이 되었다(지금 먹고 있는데 맛이 별로다;;).

몇 가지 자잘한 일을 하고, 7권 남은 만화를 마저 읽었다. 다 읽고 나선, 주말에나 할까 했던 야채전을 했다. 만화를 보고 나서, 책을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자꾸만 울음이 나고 있다. 뭔가 상황만 된다면 언제든 울어버릴 기세다. 어찌나 잘 울었던지 눈물샘이 터져 수술 했던 흔적이 몸에 있다. 7살이던 그때 이후로 막혀버린 샘은 잘 터지지 않지만 그럼에도 종종 울음이 목구멍을 넘어오곤 한다. 만화책을 읽으면서도 수시로 울었다.

울 수 있는 상황을 찾고 있다. 펑펑 울 수 있는 상황을. 영화도 좋고 책도 좋고. 뭐가 됐든 울음에 체한 것 마냥,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안만 커져간다.

자기 확신이 부족하면 모든 일이 불안하다. 작은 일 하나하나에 불안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루인을 향한 것인지 아닌지도 모를 모든 일이 루인을 향한 일이라고 자학한다. 자학은 “내가 감히 그런 일을 했다니”가 아니라 폭력 가해에 대한 자기 처벌이다. 이런 불안 속에서 울기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다. 다만 그냥 울긴 싫어 다른 이유로 울었다고 핑계 거리를 찾고 있다. 그 뿐이다.

주말 이틀 동안, 별일이 없으면 종일 영화라도 봐야겠다. 미뤘던 영화들로 시간을 보내야겠다.

그나저나 뭘 볼지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