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과 경험의 틈 (각주들)

다른 곳에 쓴 글의 각주들

주1) 페미니즘은 책을 몇 권 더 읽었는지, 수업이나 강의를 몇 번 더 들었는지, 더 많이 알고 있는지 아닌지, 어떤 경력이 있는지 아닌지로 얘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페미니즘/여성학은 학문이 아니라거나 너무 어려워 현실과 상관없다, 등의 의미가 아니라 이런 내용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대학교육을 받고 영어 텍스트 한 둘 읽으면 ‘당연히’ 더 많이 알거라는 믿음 자체가 이미 엘리트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저작권(copyright)과 함께 상당히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지식인이니 지식인(대학생)의 사명이니 하는 따위의 언설들이다. 역사책을 읽으며 깨달은 것 중 하나는, 지식인은 그가 살던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이 아니라 가장 뒤쳐져 있는 사람이며 때론 뒷북치는 존재라는 것이다. “민중”/대중이라 불리는 집단(지식인 자신은 민중/대중이 아니라는 오만함을 전제한다)이 이미 경험했고 알고 있는 내용을 불필요하게 어렵게 만들고 그것에 저작권을 주장하는 것. 페미니즘은 이런 방식과 가장 멀며 이런 방식 자체에 문제제기 한다. 특화가 불편한 건, 그 한 편에 이런 지점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루인이 어떤 특정 지점을 더 많이 이야기 한다면 그런 책을 한두 권 더 읽어서거나 관련 경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지점들이 루인에게 특히나 더 민감한 경계들이기 때문이다. 루인에게 첨예한 정치적 긴장이 발생하는 지점을 다른 사람들과 얘기할 때, 지식/경력과는 상관없이 기존의 ‘상식’과는 다른 언어/내용으로 말 할 수밖에 없다.

(사회학 관련 수업에 참가하며 “사회학자가 없으면 사회현상도 없다”란 말을 접한 적이 있다. 이 말을 한 선생님은 사회현상은 사회학자들의 인식틀로 구성된 것이라고 해석했지만 루인에게 이 말은 현상 혹은 경험은 지식권력에 의해 위계화 된다, 로 다가왔다.)

주2) 관련 경력이 있다는 것과 경험을 말한다는 건 다른 문제이다. 11년 넘게 채식을 해왔지만 채식주의자로 정체화한 건 기껏해야 2년이 안 된다. 채식과 루인의 삶을 엮어가며 몸앓기 전까지, 루인에게 채식은 단지 식사 시간만의 문제였다. 아직도 채식(주의)은 루인에게 무지의 영역 중 하나이며 때론, 채식주의자가 아닌 사람의 언어가 루인의 몸에 더 잘 닿는 경우도 있다. 경력이 있다는 것이 곧 그것에 대해 가장 잘 안다거나 그것을 말 할 수 있는 유일한 권리가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제목을 붙일 수 없는 글

34권으로 완결한 만화를 며칠 전부터 읽기 시작해서 오늘 오전에야 다 읽었다. 원래 계획은 조교 사무실에 가는 것이었다.

어제 오후, 서점에 들렀다 귤을 사서 玄牝으로 돌아왔다. 어제의 내일, 오늘 오전에 일이 있어서였다. 기대하는 일이었기에 혹시나 늦잠 잘까봐 일찍 잠들기도 했다. 아침, 옷 갈아입을 즈음, 연기되었다는 문자를 받았다. 한편으로 아쉽고 한편으로 좋고. 라디오에서 아침 날씨가 상당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귤은 결국 주말까지의 간식으로 결정되었고 깎아 가려고 했던 키위도 그냥 루인의 간식이 되었다(지금 먹고 있는데 맛이 별로다;;).

몇 가지 자잘한 일을 하고, 7권 남은 만화를 마저 읽었다. 다 읽고 나선, 주말에나 할까 했던 야채전을 했다. 만화를 보고 나서, 책을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자꾸만 울음이 나고 있다. 뭔가 상황만 된다면 언제든 울어버릴 기세다. 어찌나 잘 울었던지 눈물샘이 터져 수술 했던 흔적이 몸에 있다. 7살이던 그때 이후로 막혀버린 샘은 잘 터지지 않지만 그럼에도 종종 울음이 목구멍을 넘어오곤 한다. 만화책을 읽으면서도 수시로 울었다.

울 수 있는 상황을 찾고 있다. 펑펑 울 수 있는 상황을. 영화도 좋고 책도 좋고. 뭐가 됐든 울음에 체한 것 마냥,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안만 커져간다.

자기 확신이 부족하면 모든 일이 불안하다. 작은 일 하나하나에 불안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루인을 향한 것인지 아닌지도 모를 모든 일이 루인을 향한 일이라고 자학한다. 자학은 “내가 감히 그런 일을 했다니”가 아니라 폭력 가해에 대한 자기 처벌이다. 이런 불안 속에서 울기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다. 다만 그냥 울긴 싫어 다른 이유로 울었다고 핑계 거리를 찾고 있다. 그 뿐이다.

주말 이틀 동안, 별일이 없으면 종일 영화라도 봐야겠다. 미뤘던 영화들로 시간을 보내야겠다.

그나저나 뭘 볼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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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늘, 결국 공개하지 않은 글을 쓰느라 시간을 보냈다. 과도한 예민함은 과도한 둔감함과 닮아 있어서 어느 순간 그 더듬이를 잃어버린다. 너무 예민하게 작동하기에 어느 순간 작동하고 있는지 아닌지 모르게 되며 그 찰라, 둔감함이 작동한다. 꼭 이런 이유로 글을 공개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불안이 영혼을 잠식”하고 나면 안절부절 못하고 무슨 글이든 공개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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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은 일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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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로 울음이 나오고 있다. 아무 때고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울음이 난다. 하루에도 몇 번이 아니라 한 시간에도 몇 번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