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수학 시험

어제로 학부에서의 마지막 수학 시험을 쳤다. 아직은 시험기간이고 조교일로 금요일까지는 시험과 관련한 일이 남아 있지만, F만 아니면 더 이상 수학 수업을 들을 일은 없을 것 같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문과냐 이과냐, 로 갈등하면서 수학, 한 가지 이유로 이과를 택했고 그래서 대학을 선택할 때도 수학과 중에서 ‘선택’했다. 그랬기에 수학과 생활을 잘 했을 거라고 짐작할 수도 있겠지만, 적응 못하고 몰래 도장 파서-_-;; 휴학까지 했다. 물론 그 “부적응”은 수학과와 관련한 것이라기보다는 대학 생활 전반에 관한 것이지만, 루인이 원하는 것과 대학에서 가르치는 것 사이의 괴리는 있었다.

루인이 원한 건 수학이 어떤 철학적 기반에 있는지, 수학을 통해 어떤 식으로 삶을 해석할 수 있는지, 하는 부분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걸 가르치는 과목은 없다. 남아있는 방법은 유일한데, 혼자서 공부하는 것.

그랬기에 할 수 있는 선택은, 시험이야 졸업을 위해서라도 기존의 방식을 따른다 해도 그 외의 시간(시험기간을 제외한 시간)엔 루인 식으로 해석하기였다. 비록 그것이 “무식한 오독”일 수 있다 하더라도.

그래서, 일테면 투사projection란 개념을 배운 것도 이런 과정을 통해서이다. 즉, 심리학/정신분석학을 통해 투사 개념을 배운 것이 아니라 위상수학을 통해 투사 개념을 몸앓았다. 차이difference 역시 페미니즘을 통해서 몸앓은 측면도 있지만 미적분을 통해 그 의미를 확장하고 더 풍부하게 몸앓을 수 있었다.

이렇게 수학을 루인 멋대로 해석하며 배운 소중한 자산은,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라는 것이다. 혹자는 고등학교 수학의 경우 정석 문제집만 달달 외우면 된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수학은 답을 요구하는 학문이 아니라 답을 찾아가는 과정의 학문이다. 그것도 어떻게 하면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답을 찾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1+1의 답이 2인 건 유치원생 정도라도 알고 있겠지만 2라는 “정답”보다는 어떻게 해서 2가 되는가를 고민하는 과정. (이런 연유로 문제풀이과정/레시피는 하나가 아니라 무수히 많다.)

또 하나의 소중한 자산은, 전제를 질문하는 것이다. 수학 수업을 들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수업 첫 시간에 배우는 내용은 증명이나 결과들이 아니라 그 수업/내용이 어떤 위치/맥락에 있는가, 이며 어떤 전제에서 출발 하는가 이다. 일테면 “차이가 차별이 되어선 안 된다”란 언설이 있다. 비록 이 언설 자체도 의미가 있겠지만 이런 언설은 “차이” 자체를 질문하지는 않는다. “차이”가 있음을 당연시 한다. 반면 “차이”는 누구에 의해 어떻게 구성/발명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페미니즘, 트랜스, 이반정치학 등등이면서 동시에 (루인이 배운) 수학이다. 흑인과 백인은 다르지만 차별해서는 안 된다가 아니라 어째서 피부색이 차이로서 의미를 가지며 그로인해 비가시화되는 집단/권력은 누구/무엇인가를 질문하는 것. 이런 학문적 토대였기에 삼각형의 세 각의 합이 반드시 180도는 아니던데, 라며 다른 기하학을 열었고 괴델과 같은 이가 등장할 수 있었다.

루인이 수학을 몸앓으며 가장 신났고 소중한 지점들은 바로 이런 지점들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루인게게, 글쓰기 방식/형식이나 말 하는 방식/내용 등에서 수학과 티가 난다고 말하면 당황한다. 그 사람이 의미하는 수학(과)적인 것은 무엇일까. 논리적인 글쓰기? 하지만 논리는 사회학과나 철학에서도 중요하다고 알고 있다. 더구나 논리란 것도 시대에 따라 그 시대가 수긍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이다. 루인이 아는 한, 수학에서 중요한 것은 논리이기도 하지만 상상력이다. 이 상상력이 기존의 권위를 도전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자원이다. 일테면 학부생이 교수의 해석과 다른 해석을 제안했고 그것이 아름답다면 그 자리에서 곧 바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야기가 이상한 쪽으로 빠지는데, 수학도 과학일 때, 황우석 집단이 재검증을 수용하지 않겠다고 했을 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다.)

아마 이쯤 되면, 문학도 그래, 사학도 그래, 등등의 얘기가 나오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 “결론은 버킹검”이 아니라-_-;;; 학문을 칼로 두부 자르듯 그렇게 구분할 수 없다는…;;; 무슨 결론이 이래? 흐흐;;;;;

이제 수업을 통해서는 더 이상 수학과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이 아쉽다. 대학원에 가서도 수업을 들을 수 있지 않느냐고 말하겠지만 그럴 엄두는 안 난다. 그저 가끔씩 수학책을 읽으며 그 정도에 좋아할 밖에.

[#M_ 덧.. | 흐흐.. |
1. 루인의 바람 중 하나는 40이 넘어, 그러니까 현재 하고 싶은 공부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후 다시 수학과(학부)에 입학해서 배우는 것이다. 누군가, 인간의 평균 수명이 150살 정도 될 거라는 무시무시한 말을 했는데, 그렇다면 나이 40에 수학을 처음부터 배우는 것도 즐거울 것 같다. (문제는 돈이다.ㅠ_ㅠ)

2. 농담반 진담반으로 하는 얘기 중 하나. 수학 증명에도 젠더나 인종이 작동할까? 과학 교과서 등에서 내용을 설명하며 ‘남’학생은 실험을 하고 ‘여’학생은 옆에서 보조하는 기존의 젠더 역할을 반복/재생산하고 있는데, 이런 거 말고, 학문 집단에서 ‘여성’에 배타적인 풍토 같은 것도 말고, 증명 내용에서 젠더와 같은 요소는 없을까 하는 궁금증. 일테면 피타고라스 정리를 증명하는 그 내용 안에 젠더가 작동하지 않을까 하는 질문이다. 다른 식으로 물으면 이성은 어떤 식으로 구성되는가 하는 질문이기도 하지만 이렇게까지는 묻지 않고 그냥 증명 자체를 묻는 것. 물론 주변의 많은 사람들의 반응은 “재밌겠다, 하지만…”이 대세다. 루인도 그냥 혼자 비실비실 웃는 정도의 장난처럼 여기는 편이다. 하지만 또 모르잖아. 이와 관련해서 공부하다가 의외의 측면이 보일지도. “의심하라/모오든 광명을!”이란 시 구절처럼 의심하라고 배웠으니 증명 역시 식민주의/탈식민주의의 예외라는 보장이 어디 있겠어. 흐흐. 같이 하실 분? (어.. 진지하다;;)_M#]

국가가 공인하는 기부?

두 장의 소득공제용 기부금 영수증이 도착했다. 연말이긴 한가 보다. 하지만 공제할 소득도 없으니 그냥 책장 한 곳에 보관하고 말겠지.

기부금이라고 부르니 불편하다. 루인은 어디에 기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고 있는 것이니까.

2001년 마지막 달의 어느 날이라고 기억한다. 서울로 와서 인터넷책방의 포장알바를 하던 그 어느 날이었다. 시간 당 계산해서 받았으니 한 달 해봐야 생활비로 그렇게까지 여유 있는 금액은 아니었다(생활비엔 당연히 방값에 각종 공과금을 포함한다). 다만, 무언가를 시작하고 싶다는 욕망이 몸에 있었다.

아는 것 없고 어딜 돌아다니는 걸 싫어하지만 루인이 원하는 정치적 지향에 어떤 형식으로든 참여하고 싶었다(단체에서 활동하며 배워가도 되는데 아는 게 있어야 단체에 참여할 수 있다고 몸앓았다, 지금도 이런 경향이 없진 않다). 그래서 한 선택이 회원가입이다. 회원가입을 결정하기까지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쉬운 것도 아니었다. 한편으론, 나중에 돈 많이 벌면 그때 큰 액수로 기부금 내야지, 했다. 관심 있는 곳의 홈페이지를 찾지도 않았다. 기본적으로 혹은 누구나 한 달에 몇 십 만원씩 낼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그랬기에 홈페이지에 들어가 회원가입 약관을 봤을 때, 당황하기까지 했다. 의외로 액수가 적었는데, 한 달에 만원 정도였다. 별 망설임은 없었는데, 한 달 수입이 50만 원 일 때 참여하지 못하면 500만원 일 때도 참여하지 못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아니 스스로에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비록 종교가 없고 기독교/천주교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 참이나 먼 삶을 살(았)지만 십일조란 말도 몸에서 떠돌았다. 내야한다 아니다가 아니라 그 의미가 좋았다. 더구나 운동단체에 참여하는 것은 스스로에게도 상당한 공부니까.

물론 사람마다 한 달에 만 원이란 금액의 크기는 다르다. 루인에겐 최소 생계비로서 약간 빠듯한 알바비였고 그로인해 갈등이 있었다(최소 생계비 하니까 다른 의미랑 겹칠 것 같아 덧붙이면 방값이랑 각종 공과금 내고 하루 두 끼의 밥을 먹고 몇 권의 책을 살 수 있는 정도의 금액을 의미한다, 루인의 식단은 간소함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간소해서 문제다-_-;;). 하지만, 하겠다고 결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떻게든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에 500원 정도 저축하는 셈이었으니까.

이렇게 시작해서 4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고 현재 4곳에 참여하고 있다. 한 곳이 늘어날 때 마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처음 시작과는 선택의 기준이 달라졌다. 한 달 생활비의 여유를 보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참여 역시 당연한 지출로 여겼다. 책을 보는 것이 시간이 남아서 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내서 보는 것이 듯.

4년 전 보다 방값은 두 배가 넘으면서 더 좁은 집으로 이사했는데(계약금이 좀 차이가 난다;;) 생활비는 그때에 비해 그렇게 많이 늘지 않았다. 때론 50원 단위로 생활비를 계산하며 사는 날도 있다. 그럼에도 어느 한 곳을 취소한다거나 그만하고 싶은 몸 보다는 돈이 빠져나갈 날 인 것 같은데 빠져나가지 않은 것 같으면 도리어 걱정한다. 참여하고 싶은 곳이 더 있는데도 정말 마지노선에 걸린 생활비라 더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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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곳에 회비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기존의 단체에 회원으로 참여해야만 활동/운동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시작하는 첫 문장에도 적었듯, 소득공제용 영수증은 두 곳에서만 왔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두 곳에선 아직 안 보냈다는 의미가 아니라 보낼 수도 없는 곳이란 의미다. 이런 차이는 은행에서 신청할 때부터 난다. 영수증을 보내주는 곳은, 신청할 때 언제까지라고 정하지 않지만 영수증이 없는 곳에선 언제부터 언제까지라는 계약기간이 있다. 영수증이 없는 곳의 경우, 한 곳은 단체이지만 이 달의 회비납부내역을 게시판에 쓸 수 있을 만큼 납부 인원이 적은 것 같고, 다른 한 곳은 단체가 아니라 매체이며 창간할 때부터 “친구들”로 기념되어 있을 뿐이다(어딘지 눈치 챈 분들도 있을 듯…).

정말 씁쓸한 일은 “법인세법시행규칙 제18조 제1항 39호에 의한 공익성기부금대상단체”라는 말 때문이다. 운동단체마저도 법률/국가에 의해 그 공익성이 ‘인증’되는 사실은 끔찍하기까지 하다. 하긴, 퇴폐 3등급이기도 했던 성적 소수자(비’이성애’, 이반queer, 트랜스 등등) 관련 단체가 “공익성” 단체로 ‘인증’될 리 만무하지만, NGO단체가 국가에 의해 ‘인증’된다는 건,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루인의 참여가 국가에 의해 ‘공인’되며 그 중 절반만 ‘인증’되는 격이다. 이쯤 되면 씁쓸함이나 짜증을 넘어 분노가 슬금슬금 피어오른다.

물론 이런 소득공제를 통해 더 많은 사람이 운동단체에 참여할 수 있다면, 그래서 (운동과 일상을 구분할 순 없지만)운동이 더욱 일상화된다면 좋은 일이지만 국가에 의해 그 기준이 설정되고 구획된다는 사실은 (과도한)국가주의 혹은 다시 한 번 국가를 최종심급으로 여기는 것은 아닌가, 해서 불편하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운동단체의 딜레마이기도 할 것이다.)

그냥, 영수증을 받아들고 떠오른 불만이다.

*루인에겐 성격이 좀 다르게 다가오지만, 일 년에 한 번 “후원”하는 곳도 있다(일 년에 한 번 후원한다니, 표현이 참 웃기다). 한 번 내면 일 년에 책 네 권을 보내주고 각종 혜택도 있다고 한다. 굉장하지 않은가. 관심 있으신 분은 루인을 통해서….(그렇다고 루인에게 떡고물이 있는 건 아니니까, 의심은 마세요. ………정말? ㅋㅋ)^^;;;

용서받지 못한 자

지난 주 금요일, 정희진 선생님 강의 시간에 이 영화에 대해 언급했었다. 그 언급이 없었다면, 이 영화를 보다 쇼크를 받았거나 짜부라졌겠지.

영화에서 군대는, 단지 은유일 뿐이다. 권력과 폭력의 팽팽한 긴장감에, 숨이 막혔다.

따로 더, 리뷰를 쓸 것 같지는 않다. 아니 아직은 쓸 용기가 없다. (쓴다 해도 이곳에 공개하지 않을 것 같다.) 직면하지 않고 도망치고 있는 일들이 너무 많이 떠올라서 감당하기가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