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지 않은 눈처럼 그렇게 숨겼으면 좋겠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어제 밤, 한 통의 문자가 왔다. 눈이 내린다고 행복하라고. 창 밖을 보니 마당(루인의 입장에서 마당이다, 주인집의 입장에선 옥상이고;;)에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형광등을 끄고 보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이 내리는 줄도 몰랐다.

눈을 보면 항상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뒤섞인다. 설레고 좋은 몸, 금방 지저분할 것 같은 불안함, 녹으면서 사라지길 바라는 것들에 대한 기대, 그리고 마주하기 겁나서 살짝 덮어두고 외면하고 있는 것들이 곧 드러날 것 같은 두려움.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몸들이 복잡하게 고개를 들이민다.

아침이 되고 오후 햇살이 나쁘지 않았는데도 장독 위, 텅 빈 화분 위에 쌓인 눈이 아직도 녹지 않고 있다. 밤을 견디면 얼음이 되려나. 그렇게 얼어버리면 아픈 것들도 조금은 더 쉽게 견딜 수 있으려나. 무뎌진 몸으로 아무렇지 않은 듯 지내다가 해빙의 시간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으려나. …하는 기대를 품는다.

녹지 않은 눈을 보며, 그렇게 얼어가는 풍경을 보며, 그렇게 숨어버리면 좋겠다. 꽁꽁 숨어서 한 겨울 견디고 나면 살면서 만난 아픔들에 무뎌질 수 있을 것 같아서.

…하지만 그렇겐 안 되겠지? 이런 바람과는 상관없이 금방 눈은 녹을 테고 흉터 자국은 여전히 환하게 빛나겠지. 종종, 숨고 싶은 순간이 절실한 만큼이나 숨기고 싶은 것들을 까발리고 싶으니까. 그냥 이틀, 어제 오늘해서 딱 이틀만 이렇게 숨고 숨기고 지내는 거지, 뭐.

덧.
참, 조금 있으면 외출한다. 이랑 친구 카카키오의 공연이 있어서. 카카키오의 공연은 자주 있었지만 그간 기회가 여의치 않아 못가다가 오늘은 가야지, 하고 스스로 다짐했다. 녹지 않은 눈을 밟으며 걸어가야지. 눈에 신발이 젖고 옷이 젖으면 그 차가움 만큼 다시 걸어갈 수 있는 힘이 생길 테니까.

숨책, 헌책

치치(치치는 [마녀 배달부 키키]에 나오는 고양이 이름이기도 하다)와 만나느라 이번 달 생활비가 간당간당 했는데, 다행히, 어제 숨책에서 잠깐 알바를 했다. 조교일이 6시에 끝나니(끝나는 시간은 매일 다르다) 끝나자마자 종종 걸음으로 숨책에 갔다.

인간관계가 무척이나 좁은 편이지만 그런 만큼 좋은 인연이 많은 편이다. 팔자에 인복이 있다고 하는데 틀린 말이 아닌가 보다. 숨책 역시 그런 소중한 인연의 하나.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건, 몇 해 전 알던 사람의 소개였지만 헌책 보다는 새 책을 선호하던 당시, 헌책방은 한 달에 한 번 갈까 말까 하는 공간이었다. 그냥, 그런 곳이 있구나, 정도랄까. 그렇게 알고만 지내던 숨책이 루인에게 소중한 공간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것은, 알바 때문이다. 알바가 아니었다면 지금까지도 이곳과의 인연이 닿지 않았을 것 같다.

5달 계약으로 알바를 하며 숨책과 그리고 헌책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이 인연은 루인의 생활에 심상치 않은 영향을 미치는데, 두 번째 玄牝에서 현재의 세 번째 玄牝으로 이사를 결심하게 한 결정적인 원인 제공이 숨책과의 인연에 있다.

소유욕이 있는 루인은 좋아하는 것은 소유하고 싶어 하는데, 책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그러다보니 당시 알바비의 절반이 책값으로 고스란히 나갔고 지금도 생활비의 적지 않은 부분이 (새 책과는 별도로) 숨책에서 헌책 사는데 든다.

알바가 끝나서도 숨책과의 인연은 계속되는데, 그러다 보니 당시 지금보다 좁은 玄牝은 바닥에 쌓인 책으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과장이 아닌데, 그 만큼 책이 많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만큼 방이 좁았다는 의미다-_-;;) 이사할 의사가 별로 없었지만 이사를 결심할 수밖에 없었던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숨책과의 인연은 단순히 이렇게만 엮이지 않는데 이사하는 날, 상당한 도움을 받는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다들 의도적으로 정한 것 아니냐고 했을 만큼 이사한다고 정한 날은, 크리스마스였다. 음하하. 복덕방에서 정하고 나온 다음, 이사하는 날이 크리스마스인 걸 알고 어찌나 좋아했던지. (그 후유증이 아직 남아있다;;) 이사 일정을 정하고 이사 준비를 하며 친구 한 명이 도와준다고 했지만 이삿짐센터 아저씨의 도움을 요청해야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숨책에서 이삿짐 나르는 걸 도와주겠다고 연락이 왔다!

5달 계약의 알바가 끝났다고 해서 숨책과의 관계가 마냥 단골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가끔 숨책에서 급한 일이 있을 땐, 잠깐잠깐 알바를 했으니 일명 내부자?;;;;;; 그런데 이삿짐 나르는 걸 도와주겠다고 연락이 왔으니, 너무 고마워서, 울컥….

문제는 이사하는 날, 예약했던 이삿짐센터에서 실수를 한 것인지 날짜를 잘못 알고 오지 않은 것. 기다린다, 다른 이삿짐센터를 알아본다 하는 와중에 나온 말이 숨책의 자동차로 나르자는 것이었다. 그날 숨책의 다마스가 아니었으면 이사를 못했거나 했더라고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렸겠지.

이런 일이 있었으니 어떻게 숨책과의 인연이 예사로울 수 있으랴.

굳이 이런 고마움이 아니었어도 숨책에서 연락이 오면 거의 무조건 알바를 한다고 승낙했지만 이런 이유로 숨책에서 오는 연락은 가장 중요한 약속이 되었다. 수업이나 이랑 세미나가 없는 한 거의 무조건 한다고 할 정도. 사실 알바비를 주지 않아도 숨책에서의 알바는 하고 싶은 일인데, 책의 향기가 주는 매력과 숨책 사람들의 좋은 관계 때문이다.

암튼 오랜만에 숨책에서 알바를 하며 몇 권의 책을 샀는데(이럴 때 마다 알바해서 책값으로 다 쓴다고 걱정하는 말을 듣는다), 그 중에 한 권이 [부시의 정신분석]. 부시에게 관심 있냐고 물어와, 헤헤헤, 하고 루인 특유의 웃음을 지었다. 이 책을 산 건 부시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정신분석에 관심이 있어서이다. 아직 정신분석을 배운 적이 없으니 관심만 있는 단계인데, 그럼 굳이 이 책과 만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가해자의 정신분석에 관심이 많아서이다.

리플을 달지 않음

*예전에 살던 블로그에 비슷한 글을 쓴 기억이 몸에 남아 있지만 조금은 다를 법한 내용.

블로그를 처음 시작한 건, 몇 해 전, 블로그 “열풍”이 불기 직전이었다. 우연히, 단순히 개인 홈피 대용 정도로 시작했다. 블로그에 대한 개념도 없었고 딱히 블로그에 대한 어떤 입장이나 개념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말 그대도 딱, 개인 홈피 대용 그것이었다.

당시 몇 달 정도 운영하다가 조용히 접었는데, 그 이유는 리플이었다. 견디기 힘들 만큼의 악플이라도 있었냐면 그렇진 않다.

블로그를 접은 후 새로 시작하기까지 1년 가까이 걸렸고 새로 시작한 블로그에 10달가량 살며, 모든 글에 리플 금지 설정을 했다. 리플이 너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처음 블로그에 살 땐, 다른 블로그와 관계 맺기가 조금은 부담스러웠기에(모르거나 낯선 사람과 관계 맺기를 힘들어하는 편이다) 가려가며 블로그에 들어갔고, 조심스레 리플을 달았다. 그런 조심스러움도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지고 리플을 다는 블로그는 조금은 편했기에 자주 들어가고 자주 리플을 달고 그랬다. 하지만 그 리플이 어떤 날엔 부담스러웠는데 리플을 다는 것이 일종의 의무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당시는 인터넷이 익숙하지 않은 공간이었고(지금도 낯설긴 마찬가지다, 뭐, 어딘들 편하겠느냐 만은..) 그랬기에 새로운 글엔 의무처럼 리플을 달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지금도 없다곤 못한다). 바로 이 강박이 문제였다/이다. 리플이 의무가 되고 부담감으로 무겁게 누르면서, 블로그 자체를 떠나야지 했다. 블로깅이 즐거운 삶이 아니라 부담스런 의무라면 억지로 할 필요는 없잖아. 당시 만난 블로거들과의 관계가 끊긴다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의무처럼 다는 리플은 자칫 상대에게도 불쾌감이 될 수 있다는 몸앓이에 결국 블로그를 그만두기로 했다.

그랬기에 일 년여 지난 후 다시 시작한 블로그엔 리플 자체를 달 수 없게 설정했다. 리플이 소통 방법이 되기도 하지만 부담감이 될 수도 있고, 루인에게 리플은 부담으로 다가왔기에 그냥 기능 자체를 없앤 것이다. 그러면서 생긴 버릇은 다른 블로그에도 글만 읽고 리플은 달지 않는 것이다.

물론 오프라인으로 만난, 이랑들의 블로그엔 가끔씩, 아주 가끔씩 리플을 달긴 한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가끔씩 일 뿐이다. 리플을 달지 않아도 오프라인에서 만날 수 있기에, 리플을 달지 않는다는 것이 그 블로그에 들리지 않았다거나 글을 읽지 않았다거나 관계가 소홀해졌다거나 등등의 의미는 아니기에.

이런 이유로 지금의 블로그에 살면서도 다른 블로그엔 리플을, 트랙백을 남기지 않고 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리플을 달기 시작하면 그것이 의무감으로 무겁게 짓누를 것만 같아서. 리플을 쓰거나 트랙백을 보내고 싶은 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떤 글은 너무도 리플을 쓰고 싶어지지만, 그냥 참는 이유는, 첫 블로그의 기억이 아직도 무겁게 남아 있어서다.

뭐, 결론은 간단하다. 리플을 달지 않아도 봐 주세요~, 랄까-_-;;

[#M_ 덧.. | 오프.. | 그러다 보니, 오프라인으로 아는 블로거의 경우엔(오프라인으로 안다는 건, 오프라인에서 먼저 알고 그 사람의 블로그는 나중에 알게 되는데, 이때 블로거란 표현은 적절할까?), 만나면 관련 얘기를 하는 편이다. 글을 읽으며 하고 싶은 말이 떠오르면 몸에 저장했다가 하기도 하고 그냥 그 순간 떠올라 하기도 한다. 몸에 저장한 말을 할 땐,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로 하고 싶은 말을 몸에서 한참을 굴리는데, 그렇게 언어를 만들어가는 시간이 즐겁다._M#]

#덧붙이면, 한 순간, 열심히 리플을 달다가 어느 순간 시드는 것 보다는 그냥 소리없이 꾸준히 글을 읽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핑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