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치(치치는 [마녀 배달부 키키]에 나오는 고양이 이름이기도 하다)와 만나느라 이번 달 생활비가 간당간당 했는데, 다행히, 어제 숨책에서 잠깐 알바를 했다. 조교일이 6시에 끝나니(끝나는 시간은 매일 다르다) 끝나자마자 종종 걸음으로 숨책에 갔다.
인간관계가 무척이나 좁은 편이지만 그런 만큼 좋은 인연이 많은 편이다. 팔자에 인복이 있다고 하는데 틀린 말이 아닌가 보다. 숨책 역시 그런 소중한 인연의 하나.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건, 몇 해 전 알던 사람의 소개였지만 헌책 보다는 새 책을 선호하던 당시, 헌책방은 한 달에 한 번 갈까 말까 하는 공간이었다. 그냥, 그런 곳이 있구나, 정도랄까. 그렇게 알고만 지내던 숨책이 루인에게 소중한 공간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것은, 알바 때문이다. 알바가 아니었다면 지금까지도 이곳과의 인연이 닿지 않았을 것 같다.
5달 계약으로 알바를 하며 숨책과 그리고 헌책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이 인연은 루인의 생활에 심상치 않은 영향을 미치는데, 두 번째 玄牝에서 현재의 세 번째 玄牝으로 이사를 결심하게 한 결정적인 원인 제공이 숨책과의 인연에 있다.
소유욕이 있는 루인은 좋아하는 것은 소유하고 싶어 하는데, 책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그러다보니 당시 알바비의 절반이 책값으로 고스란히 나갔고 지금도 생활비의 적지 않은 부분이 (새 책과는 별도로) 숨책에서 헌책 사는데 든다.
알바가 끝나서도 숨책과의 인연은 계속되는데, 그러다 보니 당시 지금보다 좁은 玄牝은 바닥에 쌓인 책으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과장이 아닌데, 그 만큼 책이 많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만큼 방이 좁았다는 의미다-_-;;) 이사할 의사가 별로 없었지만 이사를 결심할 수밖에 없었던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숨책과의 인연은 단순히 이렇게만 엮이지 않는데 이사하는 날, 상당한 도움을 받는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다들 의도적으로 정한 것 아니냐고 했을 만큼 이사한다고 정한 날은, 크리스마스였다. 음하하. 복덕방에서 정하고 나온 다음, 이사하는 날이 크리스마스인 걸 알고 어찌나 좋아했던지. (그 후유증이 아직 남아있다;;) 이사 일정을 정하고 이사 준비를 하며 친구 한 명이 도와준다고 했지만 이삿짐센터 아저씨의 도움을 요청해야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숨책에서 이삿짐 나르는 걸 도와주겠다고 연락이 왔다!
5달 계약의 알바가 끝났다고 해서 숨책과의 관계가 마냥 단골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가끔 숨책에서 급한 일이 있을 땐, 잠깐잠깐 알바를 했으니 일명 내부자?;;;;;; 그런데 이삿짐 나르는 걸 도와주겠다고 연락이 왔으니, 너무 고마워서, 울컥….
문제는 이사하는 날, 예약했던 이삿짐센터에서 실수를 한 것인지 날짜를 잘못 알고 오지 않은 것. 기다린다, 다른 이삿짐센터를 알아본다 하는 와중에 나온 말이 숨책의 자동차로 나르자는 것이었다. 그날 숨책의 다마스가 아니었으면 이사를 못했거나 했더라고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렸겠지.
이런 일이 있었으니 어떻게 숨책과의 인연이 예사로울 수 있으랴.
굳이 이런 고마움이 아니었어도 숨책에서 연락이 오면 거의 무조건 알바를 한다고 승낙했지만 이런 이유로 숨책에서 오는 연락은 가장 중요한 약속이 되었다. 수업이나 이랑 세미나가 없는 한 거의 무조건 한다고 할 정도. 사실 알바비를 주지 않아도 숨책에서의 알바는 하고 싶은 일인데, 책의 향기가 주는 매력과 숨책 사람들의 좋은 관계 때문이다.
암튼 오랜만에 숨책에서 알바를 하며 몇 권의 책을 샀는데(이럴 때 마다 알바해서 책값으로 다 쓴다고 걱정하는 말을 듣는다), 그 중에 한 권이 [부시의 정신분석]. 부시에게 관심 있냐고 물어와, 헤헤헤, 하고 루인 특유의 웃음을 지었다. 이 책을 산 건 부시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정신분석에 관심이 있어서이다. 아직 정신분석을 배운 적이 없으니 관심만 있는 단계인데, 그럼 굳이 이 책과 만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가해자의 정신분석에 관심이 많아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