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담스럽지만 즐거운 시간

그 사람이 퀴어건 아니건 상관없이 절대 다수가 어떤 퀴어 행위를 범죄거나 그에 준하는 문제라고 인식할 때, 해당 이슈를 적극 사유하는 글을 쓰기란 참 부담스럽다. 해당 이슈를 적극 사유할 뿐만 아니라 다소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글을 쓰기란 더 부담스럽다. 가벼운 예를 들면, 퀴어 범죄자 이슈, 퀴어와 정신병 이슈 같은 게 그렇다. 물론 이 이슈는 그나마 가벼운 축에 속한다. 아직은 말 할 수 없는, 12월 즈음에나 공개할 수 있는 이슈는 정말 말하기 부담스럽다. 그렇다고 부담을 갖느냐면 딱히 그렇지는 않다. 부담스러워하진 않지만 어떤 형태로건 곤란한 느낌이 드는 건 사실이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한국 정치인에게 ‘국민 대통합’은 왜 그렇게 자주 인용되는 구절일까? 그리고 이 수사는 왜 적잖은 사람을 유혹할까? 정말 끔찍한 논의인데 왜 이런 수사가 여전히 의미 있는 가치로 통용될까? 슬퍼야 할 이유가 없지만 슬픈 건, 이런 분위기가 LGBT/퀴어 커뮤니티 혹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종종 통용된다는 점이다. 동성결혼 이슈에서 비판적 목소리를 적대하는 분위기와 같은 방식으로. 혹은 어떤 이슈에 확 몰려가는 어떤 분위기처럼.
아무려나 즐거우면서 부담스러운 시간이다.

심란한데 기억나지 않는 꿈

요즘 심란한 꿈을 꾸고 있다. 꿈을 꿀 땐 생생하고 심란한데 깨고 나면 기억이 안 난다. 관련 이야기를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다. 꿈을 잘 안 꾸는 편이라, 더 정확하게는 내가 꿈을 꾸고 있음을 인지하는 그런 꿈은 잘 안 꾸는 편이라 요즘 계속해서 꿈을 꾸는 상황이 낯설다. 뭐, 이것도 적응하면 그냥 지나가겠지.

법을 퀴어하게 재독해하는 사람이 나오면 좋겠다

LGBT/퀴어 이슈에 특히 집중하는 변호사가 많아지는 건 확실히 좋은 일이다. 일상에서 발생하는 많은 사건에 도움을 줄 수 있으니까. 무척 소중한 존재지. 내가 법제화 운동에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좋은 일이다. 이것과는 별개로 나는 법 자체를 퀴어하게 다시 읽는 법(철)학 연구자가 많아지면 좋겠다.
법학 논문을 읽고 있으면 정말 갑갑하다. 아니, 깝깝하다. 논의는 거의 언제나 ‘이 정도까지는 허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 수준이다. 이른바 진보연하고 지식인을 자처하며 똑똑하다고 알려진 사람의 법학 논문 역시 딱 이 수준이다. 그 정도의 조건은 보수주의적 입장이니까 그러면 안 되며 좀 다르게 재조정해야 한다는 논의를 펼치는 게 끝이다. 이유는 간단한데 법의 한계 내에서 사유하고 논하기 때문이다. 현행법의 한계를 절대 벗어나지 않는 수준에서 논의를 전개하다보니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뻔하다. 뻔하다보니 내가 모르는 정보는 얻을 수 있어 유용하지만 의미 있는 논의가 제공하지는 않는다.
물론 기존의 법학 학제에서 법의 한계를 벗어난 논의를 출판하긴 어려울 것이다. 논문 심사 과정에서 게재불가 평가를 받을 테니까. 그렇다고 해도 이것이 전부일까? 갑갑하다. 법 자체를 퀴어하게 완전히 재구성하는 작업은 법학 학제에서 공부하는 이들에겐 어려운 일일까? 정말로 재밌는 논의를 펼치는 것은 어려운 일일까? 이 질문을 하는 이유는 법을 공부하는 동시에 LGBT 운동을 한다는 사람 중에서도 법 관련 글을 쓴다고 하면 언제나 법의 한계에서만 논의를 전개하는 걸 읽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넘어서는 상상력과 문제의식은 불가능할까? 그리하여 법을 퀴어하게 완전 재구축하는 논의는 어려운 것일까? 퀴어하게 재구성하지는 않더라도 뭔가 좀 더 흥미롭고 재미있게 재구성하는 것은 어려운 것일까?
요즘 법 관련 문헌을 찾아 읽으며 자꾸 이런 아쉬움을 느낀다. 물론 아쉬움을 느끼면 안 된다는 걸 안다. 아쉬운 일이 어디 한두 가지여야지. 그리고 이제 조금씩 시작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아쉬움은 부당한 평가일 수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 LGBT/퀴어 관련 논문이 본격 등장한 게 1990년대 중반부터란 점을 감안하면 여전히 아쉽다는 감정을 느낀다(이 감정은 정확하게 나 자신에게도 적용된다).
그냥 구시렁구시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