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을 매개로 읽는 지난 시절-혈연가족

눈을 뜨고 라디오를 튼다. 7시, 김성주 목소리가 나온다. MBC FM4U. 특별히 김성주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고(듣다 보면 짜증나는 일이 더 많다) 일기예보와 뉴스를 들을 수 있기에 습관처럼 듣고 있다. 학교에 나갈 시간 즈음, 이문세의 목소리가 들린다.

오늘이 수능이란 말이 끊이지 않고 나온다. 오늘이 수능시험 보는 날이란 소식. 경찰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모습을 봤다는 청취자 사연에 시큰해진다. 그냥 슬프고 쉽게 감상에 빠진다.

벌써 여러 해 전 일이기에 이젠 많은 부분이 잊혀지고 있다. 더 무엇을 기억할까. 기억할 것도 없고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데 슬픈 감정이 몸을 타고 도는 이유는 무엇일까.

루인에게 고3 시절은 괴로운 시절이 아니라 너무도 쉽게 흘러간 시간이라고 몸에 각인되어 있다. 그렇게 기억하고 싶은 걸까. 다른 어떤 상처들을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순탄한 시간이었다고 포장하고 싶은 걸까.

중학생 시절부터 고2때까지의 생활은 수능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학교 공부는 항상 뒷전이었고 놀기 바빴다. 물론 루인이 논다는 게 음악 들으며 책 읽는 것이지만, 그 책이란 것이 학교 공부와는 별 상관이 없는 소설책이라든가 인문사회학 관련 책이라든가 그랬다. 물론 고등학생 시절 수학은 ‘공부’ 했는데 사실 당시 수학은 공부가 아니라 놀이였다. 길에서도 문제를 떠올리며 풀곤 하는 그런 놀이! 그런 생활을 하다보니 학교 성적은 중간 보다는 조금 높고 공부를 잘한다고 하기엔 그렇지 않은 어정쩡한 위치였다. 이 어정쩡한 위치가 학교생활에선 장점이었는데, 선생들의 무관심 지역=사각지대였기 때문이다. 공부를 잘해서 관심 대상이 되는 것도 아니고 공부를 못한다고 혼나는 것도 아닌 그 어정쩡하고 애매한 상태. 물론 이성애혈연가족에서 루인에게 가하는 억압은 고통이었다.

처음으로 고백하건데, 정신분열 상태였던 적도 있었다. 미쳤다고 해야지. 중학생 시절은 특히 심했고 우울증도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었다. 몸은 언제나 자살과 죽음 사이에서 맴돌았고 달리 어디로 갈 길도 없었다. (이런 몸이 채식주의로 연결된다. 채식은 생명과 죽음에의 감수성이다.) 가족과는 사이가 갈수록 나빴는데, 고등학생 땐, 살풀이라도 하자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인정받지 못한 건 이때부터였을까, 초등학생 때부터였을까. 무엇을 하든 무시당했고 재능 없고 진부한 인간으로 취급받은 건 가족으로부터다. (그래서 벼룩과 코끼리 이야기를 아프게 기억한다.) 이때부터 가족은 재앙이었다. 당시엔 그렇게 느꼈다. 가족은 폭력이었다. 중학생인 루인에게도 가족주의는 따뜻함이 아니라 일상화된 폭력이 사랑이란 이름으로 둔갑할 수 있는 곳이며 위계서열과 폭력을 은폐시키는 제도였다. 그때 다짐했다. 비혼으로 살리라. 이런 분위기 속에서 루인은 아무리 자신의 재능을 말해도 무시 받았다. 다른 사람이 대신 말해주지 않는 이상 루인의 발화發話는 루인을 발화發火했다. 루인이 수학에 가능성이 있다고 말해준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고등학교 시절 내내 밟히기만 할 그런 생활이었다. (페미니즘과 이반queer정치학을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할 수 없다.)

고2때까지 이렇게 살았다. 울증이 심할 땐, 울음에 체해 울지도 못했고 몸에 무수하게 많은 금을 긋고 그 흔적이 아무는 과정을 반복해서 바라봤다. 그러다, 이곳에서 벗어나야겠다고 다짐했다.

대학만은 서울로 가야겠다고 다짐한 건, 중학생 때부터였다. 다른 대안은 없었다. 부산에 남아 이성애혈연가족과 산다면, 부모를 죽이는 패륜아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였다. 루인의 몸으로 향한 독이 루인의 몸을 뚫고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를 입히는 상태였다. 고2 겨울방학이 되자, 수능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당시의 상상력의 한계를 보여준다.)

그랬기에 고3 생활은 편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생활이지만 힘들 이유가 없었다. 아침 5시에 일어나 아침 먹고(대체로 밥은 루인이 했다, “엄마”가 일어나지 않은 건 아니지만) 6시 조금 넘어 학교에 가서(루인이 수위 아저씨를 깨워서 교실에 들어간 날이 적지 않다, 나중엔 아는 척 했다-_-;;) 아침 조례 전까지 책상에 앉아 공부하고 아침 조례 직전에 화장실 갔다가 수업 시간엔 수업 공부, 쉬는 시간엔 나름의 다른 공부, 점심시간에 점심 먹고 다시 공부하고 그렇게 저녁이 되면 화장실 갔다 오고 공부하고, 10시가 되면 학교를 나서고(그때부터 하루 두 끼 생활을 했다). 고2 겨울방학부터 수능 전날까지 이렇게 생활했다.

지금까지 그 시절을 가장 무난하고 평이한 시간으로 기억하지만 어쩌면 모든 감정을 차단하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은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힘들지 않았고 (그렇게 기억하고 싶어 하고) 큰 편차 없이 모의고사들을 치렀다. 꾸준하게 성적이 올랐고(딱 한 번 떨어졌지만 크게 상심하지 않았다) 담임이 수학 담당이었기에 좋은 점도 있었다.

아마 루인이 기록한 시절 중 유일하게 비어있는 시절이 있다면 이 시절이다. 고3시절. 아무것도 쓰지 않고 버틴 세월. 항상 작은 수첩을 가지고 다니며 기록했지만 이때만큼은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았다. 그 만큼 감정을 닫고 살았다는 얘기도 되지만 목표가 분명했다는 얘기도 된다.

그렇게 11월이 왔고 늦지도 빠르지도 않게 수능 고사장으로 갔다. 너무 담담했기에 편했고 모의고사 치는 기분으로 수능을 봤다. 확률에 약한데 확률문제가 나와 틀렸구나, 했다. 점심은 먹다 반쯤 남겼지만 그렇다고 긴장해서는 아니었다. 따로 가져간 문제집이 없었기에 머리를 식히며 시간을 보냈고 시험을 맞았다. 끝나곤 곧장 집으로 돌아갔고 EBS를 보며 채점을 했다. 수능이 쉬웠고 쉬워진 만큼 혹은 그 보다 조금 더 올랐고 그래서 수학에서 틀린 한 문제를 아쉬워할 여유도 가졌다. 영어는 아직도 잊지 못할 56점이었고(그나마 이 점수가 모의고사를 통틀어 가장 잘나왔다;;; 남들 다 70점은 기본처럼 나왔다;;;) 언어능력은 문과이과를 통틀어 학교에서 가장 높은 점수가 나와 당황했다. 특차를 쓸 만큼은 아니었지만 부산을 떠나 서울에서 학교를 다닐 만큼은 나왔고 운이 좋았는지 학교에서 보는 내신 성적도 루인에게 유리하게 선택할 수 있었다. 그렇게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기 시작했고 세월이 흐르자 졸업을 앞두고 대학원 진학을 바라보고 있다.

이성애혈연가족과는 이렇게 떨어져 보내는 시간만큼 서로를 다시 이해하기 시작했다. 어느 점괘에 루인과 혈연가족과의 인연이 가장 나쁜 관계라는 말을 듣고 응어리처럼 맺혀있던 앙금이 풀림을 느꼈다. 물론 페미니즘을 배우며 끊임없는 자기 성찰의 시간 또한 무시 못 한다. 그러니 다시 혈연가족과 친하게 지내게 되었냐고? 그렇게 끝맺을 리가…. 그런 헐리우드식 해피엔딩은 판타지일 뿐이다. 사이는 여전히 안 좋다. 다만 멀리 떨어져 지내는 시간을 가지면서 그 앙금에 대해, 사이좋지 않음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비록 그것이 가식이거나 가족판타지를 유지하는 방식이라고 해도 가끔 만나는 날엔 그 순간만큼은 친하게 지내고 가끔은 정말 안부가 궁금한 날도 생긴다.

수능이야기가 여기까지 흘렀다. …그래서 청취자들의 수능 관련 사연들이 슬프게만 들렸는지도 모르겠다.

분리-균열: [무어의 마지막 한숨]

심한 폭력에 희생당한 사람은(옛날 올리버 대스가 꿈속에서 직관했던 것처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변해 버릴 것이다. 자신의 몸과 정신뿐 아니라, 온 세상과의 모든 관계가 미묘하고도 명백히 달라져 버린다. 어떤 확신, 자유에 대한 생각도 영원히 산산조각 나 버린다. 때리는 자들이 항상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건지 알고 있다면. 종종 얻어맞는다는 것은 분리이기도 했다. 얼마나 자주 나 자신 그런 걸 목격했던가! 희생자는 사건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킨다. 그의 의식을 공기 중에 떠다니게 한다. 그는 자신을 깔보는 것 같다. 제 몸이 경련을 일으키고 부러지기도 하는 걸 바라본다. 앞으로 그는 결코 완전히 제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

―살만 루시디 [무어의 마지막 한숨](하) p.142~143

더디게 읽고 있다.

폭력이 구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절실하기에 아픈 문단이다.

“희생자는 사건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킨다.”
이 문장에서 숨이 멎었다.

섹슈얼리티가 도대체 뭐죠?

00.주제가 흥미로워 청강(!) 들어간 수업에서 조별 발표한 내용.
(하지만 루인이 원한 주제는 이번 주 목요일이었다.)
주제는 성적 취향(섹슈얼리티)
내용은 동영상과 설명과 퍼포먼스.
퍼포먼스 내용은 ‘이성애’커플과 백인’여성’-흑인’남성’커플, ‘장애”남성’-비’장애”여성’커플, ‘동성애'(게이?)커플, 독신’여성’이 나왔고 성애 장면이 나오고 이성애커플이 불화를 일으키면서 다른 성적 취향이 함께하게 되는 장면으로 끝난다. 뭐, 대충 이렇다는 얘기다. 당사자들이 이 글을 보면 꼭 그렇지는 않다고 항의하겠지만 루인은 이런 식으로 읽었다.

01. 쑥의 지적+루인 첨가
(쑥의 블로그를 링크하고 싶으나 본인이 원하지 않는 곳에서 밝히는 것을 원하지 않을 수 있으므로 생략.)
도대체 발표자들은 성적 취향/섹슈얼리티를 어떻게 해석 한걸까.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사랑도 성적 취향인가. 백인과 비백인의 사랑도 성적 취향이란 말인가.
(자세한 건 뒤에서. 쑥의 문제제기가 여기서 그쳤기 때문이 아니라 뒤에서 할 말과 너무 많이 겹치기 때문에.)

02. 교수의 발언 중에서
(선생님이란 지칭은 말 그대로 먼저 태어나 배운 사람을 일컬으나 존경의 의미도 함께 있는데, 그 수업 교수를 별로 안 좋아하는 관계로 그냥 교수라고 부르겠음. 흔히 청소부님이라고 하지 않는데 교수님이라고 하는 것도 문제임.)
교수의 마무리 발언 중, 많은 부분이 문제였다. 이 수업의 경우, 여성학 개설과목의 한 과목이지만 루인이 아는 사람에 한하자면 이 과목에 호의적인 사람은 별로 없는 듯. 전공자나 깊이 있게 배우고 싶은 사람에겐 실망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엔 극렬 안티(페미니즘)가 되어 나가는 사람도 있다고 함. 루인은 수업을 직접 들은 적은 없고 직간접적으로 수업을 듣거나 다른 사람의 얘기를 전해들은 적이 있고, 교수와 얘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마다 실망했기에 별로 안 좋아한다. 어떻게든 이 교수의 수업을 듣지 않고 대학원까지 졸업하는 것이 목표이기도 하다는-_-;;

02-1. “당연한 것을 뒤집어 봐라”
마무리 발언을 하며 교수가 한 말 중에 “페미니즘에서 당연한 것을 뒤집어 봐라고 하듯이”라는 말이 있었다. 그 순간 문제제기할까 하다가 그냥 넘어갔는데(이미 수업 마칠 시간이 지났기에-_-;;) 문제 있는 말이다.
루인이 아는 페미니즘은 당연한 것을 뒤집어 보는 것이 아니라 당연함은 누구의 입장이냐고 묻는 것이며(전자와 후자는 다르다) 또한 그 당연함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이다. 페미니즘도 이반정치학(퀴어queer정치학)도 당연한 것을 뒤집어 보는 것이 아니다. 다른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당연한 것을 뒤집어 보겠냐. 당연하지 않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기존의 이데올로기가 억압적이고 폭력적이며 매 순간이 투쟁이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지 당연해서 아무렇지 않은 것을 뒤집어 보려는 것이 아니다. “당연한 것을 뒤집어 보라”라는 말은 그렇게 말 하는 사람에게 “당연한 것”은 불편하지 않은 것, 경계를 형성하지 않는 것이란 의미를 내포한다.
페미니즘이 당연한 것을 뒤집어 보는 것이라면 루인은 페미니즘에 반대한다. (조금 딴 소리지만, 수업 교수의 말을 들으며 페미니즘/여성학과 양성평등을 거의 동의어처럼 사용한다고 느꼈는데 페미니즘이 양성평등을 말하는 것이라면 마찬가지로 루인은 페미니즘을 반대한다. 반대 수준이 아니라 열렬한 안티페미니스트가 되었을 듯. 크크크)

02-2. “우리”
비단 이 교수의 말에서 뿐이랴. “우리”란 말은 너무도 빈번하게 사용되기에(우리 집, 우리 엄마, 우리 학교 등등) 별문제제기 없이 넘어가기 쉽지만 너무 자주 “우리”에 포함되지 않는 루인에겐 폭력적인 말이다.
우리? 오늘 수업의 경우, 교수인 당신과 학생인 루인이 우리일 수 있을까. ‘이성애’자인 당신과 비’이성애’자인 루인이 우리일 수 있을까. 젠더 범주의 성으로 살고 있는 당신과 이반queer 범주의 루인이 우리일 수 있을까.
“우리”란 말은 그 자체로 배타적이며 배제하고 위계질서를 강조한다. 그리하여 화자의 “우리” 범주(일테면 서울출신, 서울거주, ‘이성애’, 비’장애’인, 대한민국 국적을 가지고 병역 의무를 마친 ‘남성’)와 다른 위치positioning에 있을 때, ‘나’의 다른 경계를 지우고 “우리”에 속하는 척 해야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서 원천봉쇄 되어 배제된다. “우리”라는 말은 획일화시키는 언어이며 그래서 차이와 그 차이를 발명하는 권력을 말할 수 없게 한다.

02-3. “조심스럽다”
교수는 여러 번에 걸쳐 이 주제에 대해 말하기 조심스럽다고 했다.
그런데 그거 아세요? 그런 말은 타자화/대상화하는 말이란 거? 조심스럽다고 생각하는 당신의 심리/무의식에 대해 말해야지 않을까요?

03. 성적 취향 – 섹슈얼리티가 뭐예요?
(01번 내용과 연결)
변혜정 선생님은 섹슈얼리티sexuality를 관계라고 해석하고 루인은 정체성으로 해석한다. 다르면서도 ‘같은’ 말인데, 루인이 말하는 정체성(섹슈얼리티)은 관계 속에서 유동하고 다중이기 때문이다. 또한 정체성(섹슈얼리티)은 어떤 관계냐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진다. 어떤 집단에선 피부색이 의미를 가지지 않지만 어떤 집단에선 피부색이 차별의 근거가 된다. (선생님도 정확하게 이런 의미로 관계라고 해석했던가…기억이 가물가물-_ㅜ)
하지만 발표조는 섹슈얼리티를 다양한 성적 취향으로 해석했던가. 사실, 발표조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정확한 해석 없이 막연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섹슈얼리티와 성적 취향을 거의 동의어로 사용한 것.
만약 섹슈얼리티를 관계나 정체성으로 해석한다면 01번의 문제는 문제가 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성적 지향은 물론 피부색, ‘장애’/비’장애’, 나이, 출신지역, 젠더 등이 모두 섹슈얼리티의 범주이기 때문이다(이 말이 인종, 종교, 젠더, 나이 등이 섹슈얼리티의 하위 범주란 의미가 아니다). 일테면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비‘이성애’적 연애는 섹슈얼리티의 범주에서 읽는 지점이기에(젠더 범주에선 해독 불가능한 부분이 너무 많기에) 그렇게 해석했다면… 이 글을 쓸 이유도 없었겠구나-_-;;
하지만 발표조는 섹슈얼리티를 성적 취향과 동의어로 사용했고 그러면서 퍼포먼스 내용엔 ‘장애”남성’과 비’장애”여성’의 사랑, 흑인’남성’과 백인’여성’의 사랑을 함께 다뤘다. ‘장애”남성’을 사랑하는 게 성적 취향인가?
앞의 글을 읽어오며 눈치 챈 이도 있겠지만 성적 취향이란 말 자체도 문제다. 이 말이 문제가 되는 건, 현재 한국 사회가 강력한 젠더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성애’나 ‘동성애’가 취향인가, 라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성적 취향이란 말은 성적 지향이 사회문화적인 맥락과는 동떨어진 아주 개인적인 문제로 축소시키는 의미이다(그렇기 때문에 “성적 취향은 개인적 선호”라는 식의 말은 상당히 문제적인 언설이다). 성적 취향이란 말은 ‘이성애’/젠더 문제를 정치적이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면서 자신의 쿨cool함을 강조하고 싶음을(“동성애? 당연히 인정하지”라는 식의 말처럼) 무의식에 깔고 있다. 비’이성애’ 행위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지향성orientation의 문제이며 그렇기에 정치적인 행위이다.
하지만 발표조는 심지어 인종이나 ‘장애’/비’장애’와 같은 지점들도 성적 취향으로 환원해버렸다. 동시에 이들 성적 “취향”은 곧바로 성애화/성교화 되었고.
그렇다면 발표조가 해석하는 섹슈얼리티/성적 취향은 도대체 뭘까, 묻지 않을 수 없다. 쑥이 이런 의미로(좀 다를 수도 있다;;) 질문을 던졌지만 발표조는 전혀 알아듣지 못했고. (루인이 던진 질문 역시 알아듣지 못했기는 마찬가지.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그나마 빗나간 방향으로라도 답변을 한 건 반도 안 된다. 힝~)

04. 다양하다고?
발표조는 다양한 성적 “취향”의 공존을 말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지만 무대 위에 올라온, 그리고 발표조가 말한 내용은 이성애/젠더 관계뿐이었다. 발표조는 전복적인 내용을 구성했다고 했지만 너무도 진부하다 못해 위험스럽고 폭력적이기도 했다. 영화 [오아시스]를 예로 들며 그와는 다른 ‘장애”남성’과 비’장애”여성’의 연애를 무대에 올렸고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흑인’남성’과 백인’여성’의 연애를 무대에 올리며 그것이 전복적인 관계를 꾸미기 위해서라고 했다. 도대체 뭐가 전복적인 거냐고. 질문 시간에도 말했지만 상상력이 너무 빈곤하게만 보였다는 것이 솔직한 평이다.
교수는 수업을 마무리 하며 발표조의 의도를 생각하자고 했지만 의도를 모르는 것이 아니잖아. 또한 의도는 언제나 선하다는 걸 모르고 하시는 말씀인지. 모든 의도는 선하다고. 아내폭력 가해 남편도 의도는 아내를 사랑해서란 걸 모르시는지요.

05. 그리고
목요일에 또 이 수업 청강할 예정. 주제가 드랙퀸이라는데 어떻게 듣지 않을 수 있겠냐고.

믿을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쓴 말은 하고 싶은 말의 반의반도 안 된다. 아직도 몸이 말하는 언어를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기 검열’ 때문이기도 하다.

#지난 주 화요일, 다른 수업에서 루인과 의견이 같으냐 다르냐로 약간의 논쟁이 있었고 결국 같은 것 같다고 루인이 수긍했는데, 오늘 너무도 다르다는 걸 확인했다. 그럼 도대체 왜?

#(다시 읽으며) 03번에서, 루인의 글과는 미묘하게 다른 지점에서 쑥이 말했는데, 그 지점 역시 루인도 말하고 싶은 문제인데, 문제는 그게 너무도 ‘자명’해 보여(일테면 01번에 쓴 것 처럼) 뭐라고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듣지 못하고 있다. 으으으 이 답답함이라니!! 몸이 말하는 언어를 모두 들을 수 있다면 그땐 행복할까? 불행해도 좋으니 듣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