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의 소녀

그런 영화나 책이 있다. 너무도 빼어난 작품이지만 누구에게도 권하고 싶지 않은. 혼자만 그 텍스트를 읽고 싶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권하기엔 너무도 아프기 때문이다.

[천상의 소녀Osama]가 그렇다. 이랑의 이번 주 세미나 주제와 관련해서 봐야지 하고 봤다가, 그 이상의 결과와 만났다.

이 영화에 대해 무슨 말을 할까. 혹은 지금의 루인에게 있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일전에 젠더 구조에선 ‘여성’/이반queer/트랜스젠더/트랜스섹슈얼리티의 삶과 일상, 공포, 폭력, 전쟁을 구분할 수 없음을 그린 소설이나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을 품었다. 아니, 영화를 찍고 싶다는 욕망은 없으니 그런 소설을 쓰고 싶다는 욕망을 품고 개략적인 줄거리를 써 보기도 했다. 이 영화는 그런 영화다. 살아간다는 것이 곧 전쟁과도 같음을, 전쟁과 평화가 구분되는 것은 젠더 사회에서의 남성젠더들만의 경험일 뿐, 그렇지 않은 이들에겐 삶이 곧 전쟁이며 매 순간이 치열한 생존투쟁임을. 이 영화는 바로 그런 지점을 빼어나게 보여준다. 그래서 보는 내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울 수도 없었다.

비록 아프가니스탄 영화(?)지만 보는 내내 한국이라고 느꼈다. (타인의 고통을 상징으로 환원하는 이런 시선에 저주를!)

매스껍고 어지러워

속이 매스껍고 어질어질해.
토할 것 같아.

종일 이런 상태로 지내면서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버스를 탔어.
자동차 냄새를 너무 싫어하는데.
자동차 냄새를 맡으면 속이 울렁거리면서 토할 것 같은데.

이런 적이 근래에 없었으니 당황스러워.
하긴, 이런 느낌은 언제라도 익숙할 수 없어.

토할 것 같아.
목 깊숙이 손가락을 넣어 억지로 토하면 좀 편할까?
먹고 토하길 반복하던 그 시절처럼 그렇게 토하면 좀 편할까?
억지로 토하면 위가 상한다고 하던데.

그런데 어떻게 하면 이 어지러움이 조금은 가실까.

토할 것 같아.
매스꺼움이 어지럽게 몸을 타고 빙빙 돌아.

황우석이란 불편함 혹은 황우석이란 성폭력

지난 봄, 어느 강좌에서 황우석에 관한 얘기가 나왔다. 무슨 얘기였냐고? 바로 요즘 한창 떠들썩하게 회자되고 있는 그 내용이다. 교수와 연구원이란 위계 권력 관계로 인해 연구원 중에서 난자를 제공하고 있다는 얘기, 불임클리닉 등에서 난자가 제공/판매된다는 얘기, 등등. 당시 한 기자가 황우석에게 질문했다고 한다. 바로 이 문제로. 그러자 그가 했던 말은, “여기가 어떤 자린데 감히 그런 얘기를 하느냐”(정확하게 이렇게 말한 것은 아니고 이런 내용으로 말했다는 것)이다.

의사 혹은 과학자는 자신이 신이라도 된다고 믿는 걸까.

玄牝엔 TV가 없으니 MBC PD수첩을 못 봤지만 지금 MBC를 향한 무수한 악플들을 보고 있으면 일련의 몇 가지 ‘사건’들이 떠오른다. 작년 가을에 있은 이영훈씨 사건, 이승연씨의 “위안부 누드” 사건, 더 거슬러 올라가면 끔찍했던 2002년 월드컵. 그리고 이 사건들과 연결고리가 되는 일제식민지 경험과 박정희 독재 경험, 1980년대 민주화 운동 방식.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민족의 수치라고 말하는 당시의(그리고 여전한) 발언이나 지금, MBC에서 방송하는 광고 상품 불매운동을 벌이겠다고 말하며 “아이러브 황우석” 같은 카페가 뜨는 것은 연장선상에 있다.

국익이 아니라 진실이 우선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국익’과 ‘진실’을 경합하는 것으로 여기는 태도는 누구의 국가/국익인지 말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턱대고 국익 운운하는 태도나 “아이러브 황우석”과 별로 다르지 않다.

소위 진보 운동 단체라고 말해지는 곳에서 성폭력 사건이 발생할 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단체가 중요 하냐 성폭력(같이 사소한 문제)이 중요 하냐”이다. 민족이 먼저냐 ‘여성’운동이 먼저냐, 계급이 우선 하냐 ‘여성’운동이 우선 하냐 란 말도 모두 같은 내용이다. 이들 언설은 모두 ‘여성’은 단체/민족에 속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남성’만이 단체/민족 구성원일 수 있다는 의미이다. 국익과 진실이 경합할 수 있는 것은 그 진실이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일테면, 별로 안 좋은 비유지만, 이번 사건이 정관수술이나 정소 제거와 관련 있다면, 즉 황우석 연구를 위해선 정관수술을 하게 된다거나 해도 이런 식으로 반응할까. 국익과 진실이 갈등하는 식으로 말할까.)

연구를 위해선 한 사람의 ‘여성’에게서 한 번에 10개 정도의 난자를 ‘채취'(채취라는 단어의 뜻을 생각하면 ‘여성’이 어떻게 간주되는지 너무도 분명해진다)한다고 한다. 이를 위해서 사용하는 호르몬 주사가 몸에 얼마나 해롭고 고통스러울 지는 조금만 생각해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황우석 문제를 (국가) 성폭력으로 볼 능력이 안 된다는 말인가. 진실은 도대체 누구의 진실이고 국익은 누구의 국익인가. 이 과정에서 ‘여성’/’여성’의 몸이 비가시화 되고 있는 맥락은 무엇이며, 난자기증 관련 기사의 제목이 “기증자”란 몰성적沒性的인 언어로 표시되고 있음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비가시화되고 이득을 보는 자는 누구인가.

루인의 위치positioning에서 이 문제는 ‘여성’에 대한 폭력(violence against women: 성폭력)이기 때문에 황우석이란 인물, 황우석의 연구 방식, 그리고 이를 둘러싼 논란들이 모두 동일한 선상에 위치한다. 그렇기에 인터넷에서 접하는 황우석 지지, 비판 모두 불편하다. 황우석 비판이 가시적으론 MBC PD수첩에서 이루어졌지만 그렇다고 언론의 자유 운운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불편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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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익’이 중요하면 이건희의 노동자 탄압과 탈세와 같은 문제도 용인 한다는 의미인가.

2. 호르몬 주사의 고통을 상상할 수 없다고? (그런 사람만 읽으세요.) 그 강좌에서 선생님이 해준 비유를 그대로 하면, 열 번에 할 월경을 한꺼번에 한다고 상상해 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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